萍 - 저장소 ㅁ ~ ㅇ/문득 돌아본 그때 그곳

<40> 광화문 다방들

浮萍草 2014. 1. 17. 15:38
    ‘오늘은 왠지∼’ 한마디면 다 通했다 
    사람들에게 광화문 종로 무교동은 어떤 장소일까. 무엇을 하는 곳일까. 일 없이 친구를 만나 시간을 죽이는 곳으로 그녀와 데이트하는 최종 기착지로 비즈니스 미팅차 그곳을 찾은 일이 까마득 하다. 어느새 그곳은 지나쳐 가는 길이 되고 말았다. 마치 용답동이나 불광동에서 데이트 약속을 정하지 않는 것처럼 그러나 지난날 그곳은 요즘의 홍익대 앞이나 강남역처럼 사람들이 모여들어 놀고 먹고 술 취하는 다운타운이었다. ‘주다야싸(주간 다방 야간 싸롱의 줄임말)’도 많았고 음악다방도 넘쳐났던 곳이 종로 무교동 광화문의 1960∼1970년대 였다. 그곳에 가면 수많은 다방이 있었다. 학생 수가 매우 적었던 시절에 대학을 다녔다. 때로 대학 다닌다는 ‘특권’을 감춰야 하는 경우가 있었다. 동두천 보산리 미군 2사단 앞 지아이(GI·미군병사) 클럽을 출입할 때 그랬다. 양공주라 불리는 클럽 아가씨들을 통해서야 어렵사리 원반(오리지널 LP음반)을 구할 수 있었는데 나는 미미와 유독 친했다. 워낙 키가 작고 워낙 토속적으로 생겨 늘 시간이 많았던 그녀였다. 숙소로 데려가 푹 삶은 통닭을 죽죽 찢어주며 그녀는 내게 물었다. “너 대학생이지?” “아뇨, 아아뇨, 무교동 연다방 디제이예요!” 왠지 대학생이라고 하면 안 될 것 같은 자의식이 발동해서였다. 그런데 왜 하필 연다방을 들먹였을까. 특별한 인연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인상적인 디제이가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기억이 가물가물한 게 어쩌면 뮤직박스와 디제이가 없었을지도 모른다.) 음악이라면 연다방 근처 금강다방이나 금수강산이 화끈했다. 지금은 사라진 서린호텔 건너편 희다방 무아다방도 알아주는 명소였다. 하지만 마음의 고향처럼 지어낸 내 일자리는 연다방이었고 직업은 디제이였다. 그게 멋지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1970년대 초 선데이서울의 한 기사에서 연다방 탐방기를 찾아냈다. “무교동 연다방 식탁을 갖다 놓은 듯 높다란 ‘티.테이블’의 1층이나 수선스럽도록 액자를 걸어 놓은 2층이나 별다른 매력 없는 실내장식 음악 역시‘볼륨’만 약간 높을 뿐, 그렇다고 아가씨들이 기가 막히게 늘씬하지도 않다. 그런데도 젊은이들로 와글와글이다. ‘동창들 소식을 알려거든 연다방으로 가라’는 말이 있다던가. ‘테이블’마다 무리를 져 앉은 젊은이들이 연방 악수다….” 그저 왠지 그곳이 편안한 그래서 언제나 찾아가게 되는 단골 다방이 사람들마다 있었던 시절의 이야기다. 이 ‘왠지’의 느낌이 지나놓고 보면 참 특별한 것이다. 약속을 잡거나 하루 일과를 마치고 좋은 시간을 보내고 싶을 때 그 ‘왠지’의 기분이 다수에게 통용돼 중심지가 형성되는 것이니까. 광화문에서 시작하거나 광화문 근처에서 끝내야 ‘왠지’ 하루가 꽉 차는 기분이 들던 시절이 있었다는 얘기다. 다방의 구성원은 마담 정확히는 얼굴을 뜻하는‘가오’를 붙여 가오마담을 필두로 레지(레이디의 한국식 발음) 하코비(레지 보조원) 그리고 주방장 또는 쿡으로 불리는 (둘 다 부적절한 호칭 같다) 커피 끓이는‘남자’가 필수인력이다. 자주 출입하면 이들 중 누군가와는 안면을 트게 되고 소소한 신상문제까지 나누게 마련이다. 뭐랄까 시골 느티나무 정자의 분위기를 옮겨 놓은 꼴이랄까. 지난해 맥도날드 할머니로 유명한 권하자 씨가 햄버거집을 전전하다 여생을 마친 것은 광화문 일대에 마땅한 다방이 사라져 버린 탓이리라. 다방 전성기에 주 고객은 대략 세 종류로 분류된다. 물론 다수는 ‘아베크족’이라 부르던 젊은 데이트족. 그 점은 요즘의 전문 커피숍이나 카페와 다를 바 없을 것 같다. 또 한 부류는 다방을 아예 거처로 삼는 실업자군 직업 없고 미래 없는 군상이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하루 종일 버틴다. 만년 백수가 다방 말고 대체 어디를 갈 수 있겠는가. 그리고 또 하나 무시할 수 없는 다방 손님으로 ‘브로커’들을 들 수 있다. 일본식 발음으로 ‘뿌로까’라 불리는 1인 회사 사장님들이 다방마다 진을 치고 앉아있다. 사기를 치던 흥정을 하던 협박을 하던 브로커들은 다방을 사무실 삼아 온갖 종류의 비즈니스를 한다. 다방 종업원들은 회사직원이나 여비서처럼 브로커들의 전화를 받아주고 물건을 전달해주고 이런저런 동정을 알려주는 역할을 했다. 아예 브로커 전용을 자처하는지 비서실다방, 응접실다방 같은 상호도 꽤 있었다. 사무실 차릴 형편이 안 돼서 다방을 이용하겠지만 과연 얼마나 많은 사기 협잡 밀거래가 다방 안에서 벌어지고 있었을까. 그런데 그때 마시던 커피란 어떤 국물을 뜻했을까. 원래는 전부 원두커피였다. 큼직한 자루에 원두가루를 묶어 담아 펄펄 끓이고 우려냈다. 그러다 사고가 터진다. 부족한 원두함량을 채우기 위해 그리고 어떻게 가능한지는 모르겠으나 커피맛을 더 강하게 내기 위해 손님들이 버리고 간 담배꽁초를 섞어 만든 일명‘꽁피’가 적발돼 대형 스캔들로 번진 것이다. 여론을 크게 흔든 이 사건 이후로 일명 ‘맥심가루’라고도 부르던 인스턴트 커피가 다방을 점령하기 시작한다. 인스턴트가 더 고급으로 취급되는 희한한 사태인데 다방 측에서는 꼭 커피를 젓지 않고 내왔다. 녹지 않은 인스턴트 커피 과립을 잔에 동동 뜨게 만들어 속이지 않았다고 시위하는 것이다. 그때부터 다방 커피란 지금 우리가 마시는 믹스커피와 같은 것을 의미하게 됐다. 흔하고 흔한 다방이지만 좀 특별한 곳도 있게 마련이다. 귀거래다방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있을까. 그곳은 일제강점기부터 광화문에 있었다고 한다. 내가 찾아가던 1970년대 귀거래다방은 무교동으로 이주해 있었다. (마지막에 공평동으로 한 차례 더 이사한다.) 귀거래다방은 이름처럼 고풍스러운 곳으로 이른바 수준 높은 사람들이 찾는다고 유명했다. 거기엔 별나게도 두 가지가 없었다. 첫째, 음악이 없고 둘째, 전화가 없다는 것. 아늑한 쉼터를 위해 소리 나는 장치를 다 제거했으니 얼마나 고즈넉했을까. 천만에. 당연히 조용해야 마땅할 귀거래는 언제나 장바닥처럼 왁자지껄했다. 음악소리나 전화벨 울림과는 비교도 안 되게 단골손님들의 꽥꽥대는 목청이 더 컸던 것이다. 거의 전부가 노인 고객인 탓에 청력이 떨어진 그들의 목소리 데시벨이 높은 건 당연한 일인데 20대의 나는 그 사실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런데도 왜 귀거래를 꾸준히 찾았을까. 목소리 소음 속에서도 어떤 아취가 느껴지는 분위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번성한 과거를 뒤로 하고 이제는 추억만 남은 장소가 도처에 있다. 광화문 일대가 대표적이다. 아마도 그 시절의 다방 이름들을 추적해 나열한다면 아 하고 반가운 탄성을 올릴 사람이 많을 것이다. 대뜸 양지다방, 금잔디다방, 여왕봉다방이 무럭무럭 뇌리에 피어오른다. (그러고 보니 이름들 참 촌스럽네.) 도무지 본명이 기억나지 않는 내가 친구들에게 ‘이해심다방’이라고 부르던 곳도 생각난다. 언젠가 엄청나게 취해 좌석에서 웩웩 토하는데 다방마담 아줌마가 조금도 화내지 않고 치워주고 닦아주며 내 몸상태만 염려해 주었다. 그때부터 이해심 또는 줄여서 해심다방이라고 그곳을 불렀다. 세종문화회관 뒤편 골목의 콧구멍만 한 밀알찻집도 그립다. 지금도 그 2층 건물은 그대로 있는데 얼굴 동그란 밀알의 여주인은 어떻게 되었을까. 그녀는 내 연애의 메신저였다. 거길 들르면 내 연인이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하는지, 언제 밀알에 올 것인지 알 수 있었다. 대신 책을 전해주거나 편지를 전해주는 것도 밀알 여주인이었다. 스타벅스나 카페베네라면 상상이나 할 수 있겠는가. 간혹 방송 스케줄이 애매하게 짜여 길거리에서 두어 시간을 보내야 할 때가 있다. 물론 아무 커피숍이나 찾아들어가 스마트폰으로 인터넷 검색이나 하면서 시간을 때우지만 광화문 시절 단골 다방의 정겨움을 느낄 수 있는 장소는 어디에도 없다. 성냥개비로 탑을 쌓던 청년들, 껌을 사라고 조르던 조직의 아이들 금붕어처럼 엽차만 마셔대던 군상들은 연기처럼 사라져 버렸다. 뭐 꼭 그립기만 한 것은 아니다. 어차피 세월은 가고 옛날만 남는 법이니까. 그저 아주 간혹 광화문을 스쳐 지나갈 때 찌르르한 감회가 흉중을 뚫고 간다. 홍익대 카페촌 청년들의 삼십 년 후 흉중에도 마찬가지 바람이 지나가겠지?
    Munhwa         김갑수 시인·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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