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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공자의 부활 <무위 4>

浮萍草 2014. 2. 21. 09:48
    문화대혁명, "공씨네 둘째 놈(孔老二)'이라며 공자를 반동의 근원 낙인찍고 공자 유적 훼손
    성터는 간 곳 없고 옥수수만 무성 노는 유목민족이기에 성을 쌓지 않았다. 그러나 휴도왕은 성을 구축하기도 하였다. 무위시 양주구(凉州區) 사패진(四覇鎭) 삼차촌(三岔村)에 있는 개장성(蓋藏城)이 그것이다. 이 성은 무위시에 건설된 최초의 성으로 고장성(姑藏城)으로 불리기도 한다. 건축 당시는 남북 7리, 동서 3리의 크기였다. 북문이 가장 중요했는데 북문을 나서면 몽골고원과 직결되는 교통로가 있었다. 지금은 그 성터만 남아있다. 성터라도 보기 위해 길을 나선다. 동네 어귀에 이르자 길이 비좁고 공사 중이어서 자동차로는 갈 수가 없다. 삼차소학교 앞에 있다는 말에 학교를 찾는데 금방이라던 학교는 30분을 가도 보이지 않는다. 다시 길을 물어 걷기를 20분. 드디어 삼차소학교가 보인다. 삼차소학교 앞에 도착하니 ‘삼차성고지(三岔城故址)’라는 표지석만 덩그렇다. 주위 사람들에게 성의 흔적을 물었더니 학교와 밭으로 변했다고 한다. 밭은 옥수수가 빼곡하다. 옥수수 밭으로 들어가면 성의 흔적이 남아 있다는 말에 미로처럼 좁은 길을 따라 들어간다. 옥수수밭 사이로 끊어진 둔덕이 드문드문 보인다.
    학교와 옥수수밭으로 변한 삼차성터

    농민들이 비료 대신으로 밭에 뿌리는 까닭에 이 마저도 얼마 지나지 않으면 사라질 것이다. 결국 학교 앞의 표지석만 이곳이 무위시에 세워진 최초의 성터였음을 알려줄 뿐이다. 문화대혁명 전까지만 해도 이곳에 휴도왕,김일제,한무제 및 관우를 모시는 사당이 있었는데 홍위병에 의해 파괴되어 버렸다고 한다. 문화대혁명이 중국 전 지역의 역사와 문화유산을 얼마나 많이 파괴하였는지 알 수 있다.
    ㆍ5·4운동과 문화대혁명, “공씨네 둘째 놈인 孔子” 루쉰, 공자 비판 선봉
    문화대혁명은 모택동에 의해 시작되었다. 그리고 그 최대 피해자는 공자다. 중국 전 지역에서 공자를 모시는 사당이 파괴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늘날의 중국을 돌아보면 아직도 공자를 모시는 문묘는 많다. 그렇게 공자유적을 파괴했음에도 공자의 유적이 지켜지고 있으니 중국은 가히 공자의 나라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다. 공자의 고향인 산동성 곡부는 물론, 대도시마다 공자를 모시며 그의 가르침을 배우던 사당인 문묘(文廟)가 있다. 무위에도 공자의 문묘가 있다. 명나라 때인 1439년에 세워진 사당으로 중국을 통틀어 3대 문묘에 든다. 문묘는 대부분이 그러하듯이 유학원(儒學院)이다. 이곳의 문묘도 양주(凉州)지역을 대표하는 공자사상의 배움터였다.
    공자를 모신 대성전

    문묘에 들어서니 무위의 문묘임을 알리려는 듯 시의 상징인 동분마상이 가장 먼저 눈에 띈다. 문묘는 어느 곳이나 건물의 배치가 일정하다. 유학원(儒学院),공묘(孔廟),문창궁(文昌宫)이 조성되어 있고 중간에 대성전(大成殿)을 중심으로 반지(冸池) 상원교(狀元橋),영성문(欞星門) 등의 건축물이 정연 하게 잘 보존되어 있다. 공자는 제자백가 가운데 하나인 유가(儒家)의 시조다. 공자로부터 시작된 유가는 중국 역사를 관통하는 사상이자 위정자들의 통치술이었다. 뿐만 아니라 동아시아에도 많은 영향을 미쳤다. 특히 공자의 학설은 우리나라에서 더욱 견고하게 발전하였는데 명·청 교체기에 공자의 덕치와 인의를 실현할 수 있는 나라는 조선밖에 없다며 스스로‘소중화 (小中華)’를 자처할 정도였다. 하지만 공자의 명성은 1919년에 일어난 5·4운동 시기에 무너진다. 반제반봉건의 기치를 내건 이 운동은 ‘공자타도’로 이어졌다. 이 시기를 이끈 문학가 루쉰은 그의 작품 ‘광인일기(狂人日記)’를 통하여 봉건적인 가족제도 유교사회의 위선과 비인간성을 고발하며 공자를 비판하였다. 공자타도는 문화대혁명 시기에도 계속된다. 1966년부터 10년간 진행된 문화대혁명 시기의 공자는‘비림비공(批林批孔)’운동으로 타도대상이 된다. 이 운동은 정적(政敵)인 임표(林彪)와 공자의 사상을 ‘반동의 근원’으로 낙인찍어 공격한 것이다. 특히 공자의 유교문화에 대해서는‘봉건적인 종법사상과 제도’라고 규정하였다. 그리하여 중국 전 지역에서 공자의 유적은 심하게 훼손되고, 공자 역시 ‘공씨네 둘째 놈(孔老二)’으로 폄하되고 만다.
    ㆍ공자, 대국굴기를 위한 수단으로 활용되다
    30여년이 지난 지금 공자는 다시 부활하고 있다. 중국은 급속한 경제성장을 바탕으로 세계의 강대국이 되기 위한 소프트 파워 전략을 구상한다. 국제사회로부터 인정받는 대국이 되기 위해서는 군사력과 경제력이 아닌 문화와 외교력의 확장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후진타오(胡錦濤) 전 주석도 이를 반영하여 이미 2007년에“중국은 문화의 소프트 파워를 강화해야 한다.”라고 역설한 바 있다.
    공자를 칭송하는 각종 편액들

    중국의 소프트 파워 전략은 곧 공자의 부활을 의미한다. 이는 바로 중화문명의 재발견과 활용인데, 중국의 리더들은 유가사상이 서구의 시스템을 대체할 수 있다고 굳게 믿고 있다. 그리하여 문화대혁명과 경제개발 우선주의에 의해 철저히 무시되었던 공자의 유가사상이 마르크스·레닌주의를 대신하여 중국의 새로운 통치철학으로 부상하고 있다. 나아가 중국의 리더들은 이를 세계화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장쩌민의 덕치론(德治論) 후진타오의 이인위본(以人爲本) 화해사회(和諧社會) 평화발전(平和發展) 등은 바로 공자의 유가사상을 전 세계에 알리기 위한 전략인 것이다. 한편 내부적으로는 공산당의 일당지배만으로 더 이상 중국식 사회주의를 발전시킬 수 없다는 고민에 빠진 것이다. 이러한 난관을 극복하기 위해서 전통사상의 현대화와 이를 통한 새로운 가치관의 필요성을 절감한 것이다. 나아가 민족적인 자존심과 자신감의 고취 배금주의와 향락주의의 타파 사회주의시장경제의 틀 속에서 사회주의현대화 건설에 기여하는 도덕체계의 건립이 시급 해진 것이다. 그리하여 이들의 고민을 해결해줄 수 있는 인물로‘공자’가 논의되고, 공자를 통해 안으로는 개혁개방에 따른 젊은 세대의 가치관과 이념을 재정립하고 밖으로는 대국굴기를 위한 인류 정신문명의 커다란 공헌자로 ‘공자’를 부활시키려고 하는 것이다.
    ㆍ‘공자학원’, 공자사상의 전령사
    공자의 국가통치방식은 한마디로 가부장제(家父長制)의 확장이다. 즉 인의(仁義)와 덕치(德治)를 내세우며 충(忠)과 경(敬)을 요구하는 것이다. 공자가‘군군신신부부자자(君君臣臣父父子子)’라고 말했듯이 ‘통치자는 인의와 덕으로 통치해야 하며 신하는 충성으로서 보필해야 하며 아버지는 덕을 베푸는 가장 이어야 하고 자식은 공경하며 겸손해야 하는 것’이다.
    문묘의 공자상

    그러면 21세기 지구촌도 평화와 조화로운 사회를 건설할 수 있다는 것이다. 중국은 이런 공자의 사상을 전파하기 위해 전 세계에 공자학원(孔子學院)을 설립하고 있다. 공자학원은 세계적인 중국어 학습 열기에 부응하여 지구촌 모든 국가에 중화문명을 전파하는 문화센터다. 2004년부터 시작된 공자학원 건설은 그해 11월 서울을 필두로 2013년 현재 전 세계에 400여개를 건설하고 매년 240억원의 예산을 지원하고 있다. 실로 무서운 속도다.
    ㆍ공자, 아바타에 길을 내주다
    2010년 벽두. 중국은 드디어 그들이 만세사표(萬歲師表)라며 자랑하는 공자를 부활시킨다. 공자의 삶과 사상을 영화로 제작, 인민들에게 공자의 화려한 부활을 알리기로 한 것이다. 나아가 공자를 문화콘텐츠로 만들어 전 세계인에게 관심을 갖게 하려고 하였다. 하지만 생각지도 않았던 암초를 만난다. 세계적인 화제를 불러일으킨 영화 ‘아바타’가 중국에서도 선풍적인 반응을 일으키며 대작 ‘공자’를 찬밥으로 만든 것이다.
    영화 아바타 포스터

    공자의 화려한 부활을 기대했던 중국정부는 당황했다. 언론통제나 2D가 아닌 3D만의 상영을 허락하는 등 여러 수단으로 아바타의 상영을 억제하였지만 소용없었다. 급기야는 행정명령으로 아바타를 강제 종영시키고 공자를 상영키로 한다. 이러한 사실이 인터넷을 통해 알려지자 네티즌들은 국가의 부당한 행정조치에 항의하여 공자관람거부 운동을 펼친다. 공자 역을 맡은 배우 주윤발은 자신이 맡은 공자를 보면서도 울지 않으면 사람이 아니라는 실언까지 한다. 중국정부의 기대와는 다르게 영화 공자는 연일 최저기록을 갱신하며 씁쓸하게 주저앉고 말았다. 이처럼 중국정부가 문화콘텐츠의 대표 격인 영화를 통해 공자의 화려한 부활을 고대하였지만 정반대의 결과를 가져온 이유는 무엇일까. “공자는 중국의 문화이므로 무엇과 비교하더라도 뒤지게 하지 못할 것”이라는 자만심과 영화 곳곳에서 비춰지는 다큐멘터리식의 애국주의 때문이다. 하지만 이는 중국 영화의 근본적인 문제점이기도 하다.
    영화 공자 포스터

    왜냐하면 대부분의 영화는 ‘주선율(主旋律)’에 충실해야 하기 때문이다. 주선율이란 덩샤오핑이 제시한 이후 중국정부의 문화지침과도 같은 것으로‘애국주의 전체주의 사회주의 정신의 고양 등을 통해 중국 공산당의 정책과 사회주의 윤리의식을 강조하며 국가와 가족 등 집단주의의 고취’에 일조하는 것을 의미한다. 영화 공자는 중국정부가 21세기 대국굴기의 목적으로 내세우는 인물이니 더더욱 주선율에 충실해야하는 것이다.
    ㆍ진정한 공자의 가르침을 깨달아야
    중국정부는 ‘공자’라는 인물을 통하여 사회주의국가라는 이미지를 벗고 21세기의 문화대국의 이미지 창출에 노력하지만 이러한 제도적 사상적 관념에 얽매여 실패 하는 것이다. 이는 중국이 중화주의적 사고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증표이기도 하다. 오직 공산당과 지도부를 위한 이론적 토대 구축과 정치경제, 문화사상적인 충돌 발생 시 애국심의 고취를 통한 민족적인 단결 그리고 이러한‘중국적’ 정치체계의 세계화에 공자를 활용하고 있는 것이니 공자가 어찌 부활하고 싶겠는가. 춘추전국시대보다 더 복잡하고 정신없는 21세기에 깨어나서 지배이데올로기의 정착과 확장에 기여하느니 차라리 조용히 잠자는 것이 백번 나을 것이다. 하지만 중국정부는 반드시 공자를 깨워 일으킬 것이다. 국제사회에서의 위상이 높아질수록 더욱 재촉할 것이다. 공자의 인의(仁義)와 덕치(德治)사상을 내세워 세계의 통치이념을 중화에서 배우도록 할 것이다. 그리고 이는 전 세계에 퍼져있는 공자학원의 파워와 정치경제적인 역학관계에 의해 부분적으로 수용될 것이다. 그때가 되면 중국은 7세기 당나라가 이뤄낸 문명대국의 영광을 다시 한 번 구현하는 ‘중화제국의 전성기’를 맞이할 것이다.
    ㆍ공자의 부활, 唯我獨尊과 黃帝觀을 버려야 가능
    그렇지만 중국도 잊어서는 안 될 것이 있다. 공자의 통치술이 세계적으로 활용될지라도 가부장적 유아독존(唯我獨尊)에서 벗어나야 한다. 즉 천자(天子)로 지칭되어 온 황제관(皇帝觀)을 버려야만 한다. 21세기 지구촌은 군림하려는 천자를 원하지 않는다. 우리 시대에는 각자가 자신의 몫을 담당하면서 화해와 협력을 위해 노력하고 이를 달성하는 것을 미덕(美德)으로 삼기 때문이다. 그것이 또한 공자가 오랜 세월을 주유(周遊)하며 설파한 진정한 정치가 아니겠는가. 이런 까닭에 공자의 부활은 몇 가지 사항이 전제되어야만 통할 수 있다. 국가적인 이데올로기이어서는 안 되고 봉건적 사고방식에 얽매인 통치자의 전유물이어서도 안 되며 가부장적인 억압도 있을 수 없다. 공자의 부활은 ‘순수한’ 공자의 사상에서 시작되어야 한다. 문명사적 전환기의 새로운 가치를 창출하고 모두가 공감하는 개념으로 승화될 때 공자는 부활할 수 있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정치 이데올로기나 통치 권력의 유지를 위한 카드로 활용된다면 오히려 아바타에 주저앉은 것처럼 전 세계인들에게 혼쭐이 날 것이다. 문묘를 돌아 나오면서 우뚝 선 공자상을 돌아본다. 양손을 포갠 채 무슨 이야기를 하려는 듯한 표정이다. 공자도 노나라에서 대사구(大司寇)의 직책을 맡으며 삼환씨(三桓氏)를 제거하기 위한 정치를 한 적이 있다. 비록 삼환씨의 제거는 실패로 끝나고 공자도 정치에서 밀려났지만 이를 통해 공자는 정치의 단맛과 쓴맛을 알았으리라. 그리고 쓴맛이 아닌 단맛만을 누리기 위한 권력자들의 권모술수와 암투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런 공자에게 묻고 싶은 말이 있다. “당신의 사상과는 거리가 먼 정치적인 부활이라도 진정 기쁜가요?” “내 수천 번을 죽었다가 살아나고 살았다가 죽었는데 다 무엇 때문에 그랬겠는가? 인간은 천성적으로 모두가 정치적일세. 내 사상도 결국 정치적인 것이고. 허허허.”
    Premium Chosun     허우범 역사기행 전문가(인하대 홍보팀장) appolo21@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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