萍 - 저장소 ㅁ ~ ㅇ/실크로드 7000㎞ 대장정

19 유목민족의 기마전술과 천마사상의 전파<무위1>

浮萍草 2014. 1. 25. 06:00
    실크로드 따라 新羅까지 전파된 '天馬思想' 실크로드 종착점은 경주?
    중국 완행열차의 밤풍경 난주에서 무위(武威)로 이동하는 밤기차를 탄다. 중국은 땅이 넓어서 기차노선이 발달해 있다. 어느 역에서나 많은 사람들이 캐리어를 들고 기차를 기다리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시민들이 저렴하고 편안한, 무엇보다 안전한 철도를 선호하기 때문이다. 난주에서 무위까지는 276㎞로 중국에서는 그야말로 가까운 거리다. 시간도 여유롭다. 밤기차의 낭만도 느껴볼 요량으로 우리의 완행열차에 해당하는 보통열차를 탔다.
    무위의 사장인 마답비연상
    열차 안은 사람들로 북적인다. 기차가 얼마를 달려왔는지 바닥은 음식물을 먹고 버린 쓰레기들로 지저분하다. 3명씩 앉는 자리이건만 누워 있는 사람들로 인해 서서 가야 할 판이다. 가장 싼 표를 끊어 자면서 가려는 요량인데 본인은 좋겠지만 다른 사람에겐 피해가 아닐 수 없다. 앞에 사람이 서 있어도 모른 척 잠자는 시늉을 한다. 같이 앉자고 해도 못 들은 척한다. 흔들어 깨우면 언성을 높인다. 막무가내로 다른 곳으로 가란다. 지정 좌석이 아니니 어쩌겠는가. 몇 칸을 이동해 겨우 자리를 잡고 앉았다. 하지만 그 칸의 풍경도 비슷하다. 특히 위구르족인 듯한 일가족 4명은 3칸을 차지하고 떠든다. 이야기를 하려 들면 싸울 듯한 기세다. 목청을 돋우고 삿대질에 발길질을 연발한다. 가득이나 시끄러운 기차 안이 그야말로 난장판이다. 안하무인에 방자하기까지 하다. 한족이 지배하는 대륙에서 소수민족이 살아가는 방법인가. 아니면 그들에게 눌린 원한이 기차 안에서 드러나는 것인가. ‘ 좋은 게 좋은 것’이라고 그냥 넘기려고 하지만 쉽지 않다. 상황이 이러니 밤기차의 낭만은 산산조각이 나고 잠시 눈 붙이기도 힘들게 되었다. 4시간 거리가 10시간을 가는 것만 같다. 하지만 중국의 보통열차에서 느끼는 낭만은 이런 것이다. 나만 홀로 특쾌열차에서나 있음직한 고급스런 낭만을 상상한 것이다.
    ㆍ天馬의 도시 ‘무위’
    난주에서 황하를 넘어 서북쪽으로 길을 잡으면 해발고도 3,000미터의 붉은 산들이 늘어선 오초령(烏梢嶺)이 나타난다. 오초령을 넘으면 본격적으로 하서주랑(河西走廊)이 시작된다. 하서주랑은 이곳서부터 병풍처럼 늘어선 기련산맥(祁連山脈)을 따라 서쪽으로 옥문관(玉門關)까지 약 900㎞에 이르는데, 폭이 몇 ㎞에서 100㎞에 이르는 좁고 긴 구간이다.
    하서주랑의 기련산맥

    무위(武威)라는 지명은 한나라 때 생긴 것이다. 이곳으로 파견된 곽거병이 흉노를 고비사막으로 몰아내자 한무제는 그에게 ‘무공군위(武功軍威)’라는 군기(軍旗)를 하사하였다. 이를 줄여 ‘무위(武威)’라고 부른 것이 현재의 지명이 되었다. 무위는 장액과 더불어 ‘금장액(金張掖), 은무위(銀武威)’로 불린다. 두 도시 모두 지리적으로 중요한 곳이기에 붙여진 별칭이다. 무위는 서역으로 나가는 실크로드 교역의 첫 도시이자 장액 주천 돈황을 연결하는 군사적 요충지이다. 즉 장안에서 출발한 실크로드 상인들이나 흉노 토벌을 위해 출정하는 병사와 군마가 휴식과 전열을 가다듬는 도시다. 또한, 서역을 왕래하는 승려들과 기련산맥 일대에 살고 있는 소수민족들이 함께 어울리는 오아시스 도시이기도 하다. 무위 시내로 들어서니 도시를 상징하는 천마상(天馬像)이 날아오를 듯한 기세다. 중국이 관광 상품으로까지 사용하고 있는 ‘마답비연상(馬踏飛燕像)’이다. 마답비연상이 출토된 뇌대한묘(雷臺漢墓)를 찾았다. 뇌대라는 이름은 명나라 때 건설된 뇌조관(雷祖觀)이라는 도교사원에서 비롯되었다. 그런데 이 사원은 옛날부터 내려온 고묘(古墓)의 봉토를 기초로 하여 만들어졌다. 이 봉토 밑에서 한나라 때의 장군묘가 발견되었는데 묘 발굴과정에서 중국이 자랑하는 최고의 보물인 동분마상(銅奔馬像)이 출토된 것이다. 그런데 공식적인 발굴이 아닌 특별한 사업을 진행하던 와중에 발굴되었으니 그 과정 또한 국보급이라 할 수 있다.
    동분마가 발견된 뇌대한묘

    ㆍ중국의 관광로고 ‘마답비연(馬踏飛燕)’의 탄생
    1969년 9월 중국공산당은 전쟁이나 흉년 등의 재해를 미리 준비하고 인민을 이롭게 하자는‘비전(備戰) 비황(備荒) 위인민(爲人民)’의 구호 아래 전쟁에 대비한 지하도 파기 운동이 벌어졌다. 때문에 많은 유적이 파괴되었지만 역사적으로 오래된 무덤들이 이 운동을 통해 발굴되었다. 유명한 장사의 마왕퇴한묘도 이때 발견된 것이다. 뇌대한묘도 농민공이 호미로 땅을 파다가 발견한 것인데 동분마를 비롯하여 231건의 문화재가 세상에 알려졌다. 뇌대한묘도 대부분의 오래된 무덤들과 마찬가지로 공식적으로 알려지기 전에 이미 두 번이나 도굴을 당하였다. 그래도 동분마는 도굴되지 않았는데 이는 금으로 만들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뇌대한묘의 동분마

    동분마는 높이 34.5㎝, 길이 45㎝의 조그마한 동상이다. 그런데 그 형상은 가히 예술적이다. 말이 날아가는 제비의 등에 오른쪽 뒷발을 딛고 고개는 왼쪽으로 약간 돌린 것이 최고의 속도로 달리는 모습이다. 빠르기로 자신 있는 제비 역시 놀란 듯 고개를 돌려 말의 모습을 보고 있다. 하늘을 빠르게 나는 제비를 올라탄 말은 곧 하늘을 나는 천마(天馬)를 의미한다. 중국 근대의 저명한 사학자인 곽말약(郭沫若)은 이 말의 형상을 보고 ‘마답비연’이라는 이름을 붙여 준다. 이후 동분마는 마답비연으로 불리게 된다.
    ㆍ유목민 기마전술의 중국 도입
    중국인들은 고대부터 말을 숭상했다. 어디 중국뿐이겠는가. 동서양을 막론하고 산업혁명 이전까지 말은 군사․경제․문화의 척도로서 국가의 번영과 직결되는 핵심이었다. 우수한 말의 소유 여부가 곧 제국의 건설과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주기 때문이다. 중국도 일찌감치 주나라 때부터 말의 중요성을 깨닫고 말의 확보와 유지관리를 위해 많은 직책을 두었다. 중국에 기마전술이 도입된 것은 전국(戰國)시대 조(趙)나라 무령왕(武靈王) 때인 기원전 295년경이다. 조나라는 인접한 유목민족들로부터 기마전술을 배웠다. 기마전술의 도입은 전국시대의 군사작전은 물론 외교에도 중요한 변화를 가져온다. 소진(蘇秦)과 장의(張儀) 같은 유세가(遊說家)가 밀려나고 명장(名將)들이 전면에 나서게 된다. ‘전국책(戰國策)’을 보면 무령왕은 호적(胡狄)의 이점인 승마전술과 호복을 도입하여 국방을 튼튼히 하려고 하였다. 하지만 숙부를 비롯한 신하들의 반대에 부딪친다. 천하의 중심인 중화가 오랑캐인 이적(夷狄)의 습속을 따를 수 없다는 이유다. 이에 무령왕은 기마의 필요성과 호복의 실용성을 도입해야 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한다. “무릇 하은주(夏殷周) 삼대를 살펴보면 시대마다 의복이 달랐어도 천하를 평정하였고 춘추시대 오패(五覇)의 나라들이 그 법도가 달랐어도 정치가 잘 이루어졌소. 지식이 있는 자들은 가르침을 항상 새롭게 하나 무지한 자들은 하나의 가르침에 매이고 현명한 자들은 풍속을 이용할 줄 아는 반면 어리석은 자들은 풍속에 구속당하는 법 이오. (중략) 의복이 기이하면 마음이 음란해진다고 하는데 그러면 이상한 옷을 입는 오(吳)나 월(越)같은 나라에서는 성인군자가 나올 수 없단 말이요? 속담에도 이르길, 책에 쓰인 대로만 수레를 몰면 말의 능력을 완전히 알 수 없고 옛 법만 따르다가는 시대의 변천에 효과적으로 대응할 수 없다고 하였소.” 이때부터 중국은 기마전술을 도입하고 말을 타게 된다. 기마전술을 도입한 중국은 승마와 사육기술을 발전시켜 “종묘에는 털이 같은 것을 쓰고 군대에는 힘이 강한 것을 쓰며 사냥에는 빠른 것을 쓴다.”라는 기록을 남겼다. 이로 미루어볼 때 빠르면 진한 시기에 승마기술이 도입되었음을 알 수 있다. 기마전술은 부국강병을 위한 초석이기도 하였지만, 황제 개인의 신적인 능력을 보여주는 수단으로도 필요하였다. 즉 천자의 아들인 황제가 하늘의 명에 따라 백성을 교화시키면 하늘은 이를 잊지 않고 신마(神馬)나 천마(天馬)와 같은 상스러운 징조를 보여 준다는 것이다. 이러한 징조는 왕권강화를 위한 필수조건이었다.
    ㆍ동서양의 천마사상
    중국인들에게 신마는 어떤 존재인가? 중국인들에게 말은 곧 용(龍)이며 수신(水神)과 관련된 것이다. 그것은 신마의 출발이 “황하에서 도(圖)가 나오고 낙수에서 서(書)가 나왔다.”라는 하도낙서(河圖洛書)의 고사에서 비롯되었기 때문이다. 서한시대 학자이자 공자의 11대손인 공안국(孔安國)은 하도(河圖)에 대해 설명하기를‘복희씨가 천하를 다스릴 때 용마(龍馬)가 황하에서 나왔는데 그 문양을 따라서 팔괘를 그렸다'고 하였다. 이때 용마는 신비로운 동물인 신마를 의미하는 것인데 천하가 평안하게 다스려질 때 하늘이 감응하여 내려주는 동물이다. 이러한 동물의 출현은 곧 왕권강화에 커다란 역할을 하였다.
    하도낙서

    이러한 신마사상은 한나라 때 강화되는데 그 이면에는 무엇보다 흉노와의 싸움에서 승리하기 위해 그들이 타는 말보다 더 강하고 빠른 말이 절실히 필요하였기 때문이다. 당시 우수한 말은 최신병기였다. 장건이 한무제의 명을 받고 대원국을 향한 것도 그곳에서 생산되는 한혈마를 구하고자 한 것이니 당시 명마에 대한 애착은 가히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다. 천마 사상은 중국에서 시작된 것은 아니다. 고대 그리스 바빌로니아 페르시아 인디아 아르메니아 등 유라시아 대륙 전체에 걸쳐 널리 분포한다. 우리가 익히 들어 알고 있는 그리스 신화의 날개달린 말인 페가수스는 천마의 전형과도 같다. 바빌로니아 신화에 따르면 태양은 두 마리의 준마가 끄는 마차에 이끌려 동문에서 서문으로 움직인다고 한다. 태양은 쉼 없이 빠르게 달리는 백마에 의한 것이라는 페르시아 신화도 있고 태양의 신 수야(Surya)는 7마리의 황금빛 말이 끄는 수레를 타고 천공(天空)을 날아다닌다는 인디아의 신화도 있다. 이로 미뤄볼 때, 천마 사상은 서역에서 동방으로 전래된 것이다. 그리고 이는 동쪽의 끝인 신라에까지 전해진다. “이에 높은 곳에 올라 남쪽을 바라보니 양산 밑 계정(鷄井) 곁에 이상한 기운이 전광처럼 땅에 비치는데 흰 말 한 마리가 꿇어앉아 절하는 형상을 하고 있었다. 그곳을 찾아가 살펴보니 붉은 알 한 개가 있는데 말이 사람을 보고는 길게 울다가 하늘로 올라가 버렸다. 그 알을 깨어보니 사내아이가 나왔는데 모양이 단정하고 아름다웠다. 놀랍고 기이하게 여겨 그 아이를 동천(東泉)에서 목욕시켰다. 몸에서 광채가 나고 새와 짐승이 따라 춤추며 천지가 진동하고 해와 달이 청명해지므로 그 일로 인하여 그를 혁거세왕(赫居世王)이라고 하였다.”
    ㆍ‘天馬行空’, 유목민족 천마사상의 新羅 전파
    일연의 ‘삼국유사’에 기록된 위의 내용은 신라인들도 천마사상을 가지고 있었음을 알게 해준다. 고려 때 이색(李穡)의 ‘증보동국문헌비교’에 의하면 우리나라에 자생하는 말은 국마(國馬) 또는 향마(鄕馬)라고 부르는 3척(尺)이하의 말과 북쪽에서 들여온 호마(胡馬)의 두 종류가 있었다. 그런데 국마는 나귀와 같아서 양마(良馬)로는 사용할 수 없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 호마를 들여온 것이다. 만주지역을 장악한 고조선은 유목기마민족과 접촉이 빈번했던 까닭에 양마를 수입하여 기마군단을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기마군단은 한무제가 5만 대군으로 침략했을 때에도 1년간 대항하며 선전하는 발판이 되기도 하였다. 한나라와의 휴전을 위해 5,000필의 말을 주었다는 기록을 보더라도 당시 고조선은 이미 우수한 양마를 많이 사육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부여와 고구려도 거란이나 말갈 등의 유목민족들을 통해 양마를 수입하여 강력한 기마군단을 거느렸다.
    경주 천마총에서 발견된 천마도장니

    서역으로부터 전래된 양마인 한혈마는 목숙(苜蓿)을 먹는다. 이 목초는 한혈마와 함께 대완국으로부터 전해졌는데 중국과 고구려를 통해 신라에도 전해져 중앙부서인 내성(內省) 밑에 이를 관장하는 부서를 4곳이나 둘 정도로 국가적 으로 관리하였다. 신라도 고구려의 도움으로 북방의 초원민족과 교류하면서 천마인 한혈마를 수입하여 사육에 심혈을 기울였던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우리 민족도 일찌감치 한혈마 같은 양마를 수입하여 이민족으로부터 국가를 지키기 위해 노력하였다. 1973년, 경주 황남동의 신라 고분에서 천마도장니(天馬圖障泥)가 발견되었다. 일명 천마도라고 부르는 이 유물은 자작나무 껍질에 하얀 천마가 하늘을 향해 날아오르는 그림이 그려진 것이다. 신라의 유물은 회화자료가 희귀한데 이 유물이 5세기의 신라 미술품인 까닭에 국보(207호)로까지 지정되었다. 구름 위로 힘차게 내달리는 천마도를 일컬어 ‘천마행공(天馬行空)’이라고 하는데 이곳 무위에서 발견된 동분마나 신라의 천마총에서 발견된 천마도나 모두 같은 형태다. 좋은 말이 국가의 군사력과 경제력을 좌우하는 시대였기에 당시에는 나라마다 양마의 수입과 사육에 혈안이 되었으리라. 동분마나 천마도는 이처럼 고대 민족들이 중요시했던 천마숭배사상을 잘 보여 준다. 적석목곽분인 천마총은 신라 22대 지증왕의 능묘로 추정되는데 금관(金冠)과 금모(金帽) 등 황금 유물이 많이 나왔다. 적석목곽분이나 황금은 모두 기마 유목민족의 문화다. 특히 천마도가 그려진 자작나무껍질은 기마민족들이 숭상하는 것으로 그곳에 천마를 그린 것은 유목민족의 오랜 문화적 습성이 반영된 것이다. 더구나 천마의 몸에 그려진 초승달 무늬는 북방의 스키타이 유목민족이 주로 사용한 문양이다. 황금 역시 마찬가지다. 이로 미루어볼 때, 신라의 왕족은 기마 유목민족의 혈통을 가졌다고 할 수 있다. 이처럼 기마전술은 실크로드를 따라 천마사상을 잉태하며 중국을 거쳐 한반도의 신라에까지 전래된 것이다.
    Premium Chosun      허우범 역사기행 전문가(인하대 홍보팀장) appolo21@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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