萍 - 저장소 ㅁ ~ ㅇ/실크로드 7000㎞ 대장정

23 중국의 로마인 마을을 가다 <장액 1 >

浮萍草 2014. 3. 6. 10:18
    2000년 전부터 로마인이 중국에서 살게 된 까닭은? 로마인 후예를 만나다
    위 대운사의 종소리를 들으며 장액(張掖)으로 향한다. 
    그저 무덤덤하게 들을 때면 그것은 단지 음파에 지나지 않았는데 이제 그 내력을 알고 들으니 애틋한 사연이 가슴에 절절하게 메아리친다. 
    하긴 사연 없는 만물이 어디 있으며 저마다 한 편의 대하소설을 품지 않은 인간이 어디 있으랴. 
    여행이 인생의 스승인 것은 스스로를 깨우쳐 따뜻한 마음을 갖게 하기 때문일 것이다. 
    여행은 차가운 세상사에 물드는 스스로를 다잡아 다시금 따뜻한 마음을 쌓고, 따뜻한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게 하는 소중한 시간이기 때문이다.
    무위에서 장액까지는 대략 240㎞다. 
    자동차로 서너 시간은 달려야 하는 거리다. 
    무위 시내를 벗어나서 한참을 달리니 남쪽으로는 기련산맥이 휘달리고 북쪽으로는 용수산(龍首山) 봉우리가 멀리 보인다. 
    한 시간 정도를 달리니 금창시(金昌市) 영창현(永昌縣)이다. 
    여간촌(驪靬村)에 있는 고성(古城)을 찾아가자고 했더니, 장액을 향하던 후배가 의아해 한다.
    “그곳에도 실크로드 유적이 있나요?"
    “그럼. 엄청난 실크로드의 역사가 지금도 살아있는 곳이지.”
    “살아있는 곳이라고요?”
    “그렇다니까. 가서 직접 느껴보자고.”
    여간촌 입구에 있는 석상

    여간촌의 원래 이름은 자래채(者來寨)다. 이곳에는 30여m 길이에 3m 정도 높이의 성벽이 남아있는데 1970년대만 해도 1㎞의 길이에 3층 높이 성벽이 장성처럼 이어져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곳 사람들이 성벽의 흙을 파다가 집을 짓거나 농사짓는 데 비료로 사용하면서 훼손시켜 지금의 모습만 남은 것이다. 이곳에서 한나라 때의 무덤이 발굴되었는데 무덤의 주인은 동양인이 아니었다. 하얀 피부에 빨간 머리털, 긴 얼굴과 오뚝한 코를 가진 유럽인종인 코카서스인이었다. 어찌된 일일까? 참으로 신기하고 궁금해 도저히 그냥 지나칠 수 없는 곳이다. 마을에 도착하니 이 마을의 내력을 알려주는 듯 세명의 동상이 반긴다. “동상의 모양이 어때?” “어? 오른쪽의 남자는 서양인 같은데요?” “그렇지. 로마시대를 다룬 영화에서 보던 그 인물들이지?” “그러고 보니 이곳 마을 사람들의 모습이 서양인과 비슷하네요.”
    ㆍ로마 三頭정치 크라수스군, 파르티아에 패배하고 감숙성에 안착 기원전 54년. 로마제국의 집정관인 크라수스가 폼페이우스 카이사르와 함께 삼두정치(三頭政治)를 펼칠 때다. 시리아를 포함한 동방총독인 크라수스는 자신만이 공을 세우지 못하자 이들과의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 지금의 이란 지역인 파르티아(Parthia) 원정을 단행한다. 그런데 욕심이 앞선 크라수스군은 파르티아군의 전술에 걸려들어 대패하고 이때 크라수스도 목이 베이고 몸에 쇳물이 부어지는 참형을 당한다. 그 싸움에서 로마는 2만여명이 전사하고 1만여명이 포로로 잡혀 노예가 되었다. 오직 크라수스의 아들이 이끄는 6000여 명의 군사들만이 포위망을 뚫고 도망쳤다. 하지만 그들의 행방은 찾을 수 없었다. 33년이 지난 후 로마제국과 파르티아는 종전협정을 맺고 포로교환을 하였지만 6000여 명의 병사들은 끝내 찾을 수 없었다. 그 많은 사람들은 과연 어디로 사라진 것일까?
    관광용으로 개발중인 여간성

    이 문제에 대해서 처음으로 해답을 제시한 사람은 영국의 학자 호머 더브스(Homer H. Dubs)다. 호머는 미국의 컬럼비아 대학 교수로 제2차 세계대전 전후 미 국무부에 소속되어 일본을 연구한 학자다. 그는 이곳 여간촌이 로마의 투항자들로 이루어진 마을이라고 주장했다. 한나라 때 ‘여간’이란 말은 곧 로마제국을 지칭하던 말이기 때문이다. 중국의 역사지리학자인 사념해(思念海)도 그의 저서 ‘하산집(河山集)’에서 이렇게 정리했다. “여간은 현의 명칭으로 여간으로 투항한 자들로 이루어진 곳이다. 성 밖 투항자들이 설치한 현으로는 어상군(於上郡)의 구자현(龜玆縣)이 있는데 그곳도 구자국 투항자들로 이루어진 곳이다. 이는 한나라 때 통례로 여겨지던 일이다.” 그 뒤 많은 사람들이 흥미와 관심을 가지고 이곳을 방문하여 이 마을의 수수께끼를 풀고자 하였다. ‘한서 진탕전’에 보면, 중앙아시아를 차지한 서흉노 질지 선우의 부하들 가운데는 토성 밖에 목책을 3층으로 겹쳐 쌓고 원형의 방패를 물고기의 비늘 모양으로 진을 쳐서 공격하는 ‘어린진(魚鱗陣)’을 펼쳤다는 내용이 있다. 이는 로마군이 전투에 자주 활용하는 전술이다. 질지 선우가 이끄는 군대에 로마식 전술을 사용하는 부하들이 있는 것은 어쩐 일일까? 크라수스의 아들이 이끄는 6000여 명의 로마 병사들이 로마로 돌아가지 못하고 질지 선우에게 의탁했기 때문이다. 질지 선우는 세력을 키우기 위해 자신의 딸을 주며 이들을 아꼈다. 세력을 키운 질지는 주변의 작은 나라들을 정복하고 한나라와 대적하게 된다. 이에 서역도호부의 감연수(甘延壽)와 진탕(陳湯)이 화공으로 질지군을 섬멸한다. 질지 마저 잃은 로마 병사들은 갈 곳이 없었다. 이제 와서 더더욱 로마로 돌아갈 수도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살아남은 병사들은 한나라에 투항의사를 밝힌다. 이에 한나라는 흉노 절란왕(折蘭王)의 유목지였던 기련산 기슭의 장액군 번화현(番和縣)에 로마를 지칭하는 ‘여간성’을 쌓고 거주지를 마련해 준다. 그 후 절란(折蘭)의 음이 변하여 비슷한 ‘자래채’가 된 것이다. 그리고 근래에 문화자원을 개발한다는 의미에서 여간촌으로 다시 바뀐 것이다.
    ㆍ여간촌 로마식 정자에 ‘옛 로마군단 중국 귀향 기념비’ 여간촌은 시내에서 뚝 떨어진 곳에 있다. 근방에 도착하니 성이 보인다. 그런데 옛 성이 아니라 최근에 지은 것이다. 살펴보니 이곳을 관광지로 만들기 위해 성을 건설하고 있는 것이다. 갑자기 하늘이 흐려지더니 소나기가 쏟아진다. 한두 명에게 물어보지만 타지에서 온 일꾼들이라 알지 못한다. 날씨는 안 좋고 마음은 급하니 직접 찾아보는 수밖에 없다. 마을이 있을 법한 곳으로 차를 몰아간다. 비포장도로를 20여분 달리자 마을이 보인다.
    마을 어귀에 있는 로마식 정자

    “이곳이 맞을까요?” “산 아래 마을은 이곳뿐이니까 아마도 맞지 않을까?” 마을로 들어서자 빗발을 더 세지고 사람들은 보이지 않는다. 확인할 길이 없으니 직접 마을 여기저기를 찾아다닐 수밖에 없다. “로마식 정자가 있을 거야. 그것을 찾으면 이 마을이 맞는 거야.” 마을 어귀 벌판을 바라보니 흙 둔덕 위에 로마식 정자가 보인다. “찾았다! 이 마을이 여간촌이 확실해.” 거센 소낙비를 뚫고 둔덕에 오른다. 이곳이 옛날 여간성이었을 텐데 이를 알려주는 팻말조차 없다. 대신 로마식 정자인 ‘여간정’만 홀로 비를 맞고 있다. 정자 안에는 2012년 10월에 다시 세운 ‘옛 로마군단의 동쪽 귀향기념비’가 있다. 비석의 뒷면에는 이곳 마을의 역사를 기록해 놓았다.
    여간촌이 로마인 마을임을 알려주는 설명문

    이 마을에는 약 400여명이 살고 있는데 그중 200여명은 훤칠한 키,푸른색 눈,갈색머리 등 서구인의 특징을 갖추고 있다. 여간촌을 일명 ‘황모부락(黃毛部落)’이라고도 부르는데 이는 이들의 머리색을 빗대어 부르는 말이다. 그래서 이곳 사람들은 마을을 벗어나지 않고 살았다. 어쩔 수 없이 외부에 나갈 일이 있을 때에는 머리를 검은색으로 염색했다고 한다.
    ㆍ로마인 후예를 만나다 마을로 들어오니 비가 그친다. 그 사이에 양떼를 몰고 오는 마을 사람들이 보인다. 그런데 모습이 영락없는 서구인의 형상이다. 그중 한 사람을 찾아가서 확인하니 2000년전 로마인이 자신의 조상이라고 한다. 그 역시 이 마을의 유래를 잘 알고 있었다.
    여간촌에서 만난 로마인 후손

    “예전엔 밖에도 나가지 않고 숨어서 살았지요. 이제는 우리 마을의 특징을 널리 알려 많은 사람들이 찾아오도록 정부에서도 지원해 주고 있어요.” 환하게 웃는 그의 모습에서 2000년의 시름은 사라지고 융합과 소통의 시대를 새롭게 열어가려는 희망찬 의지를 본다. 실크로드는 교역이 주류였지만 물류만 오간 길은 아니었다. 종교와 사상이 소통하고 지식이 융합하는 길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것들을 주도한 것은 바로 ‘사람들’이었다. 실크로드는 자의든 타의든 동서의 사람들이 오가고 머물며 서로 사귀고 사랑하는 길이다. 이를 통해 새로운 세상을 창조하는 에너지를 만들어내는 통로다. 인적 교류와 정착은 실크로드 최고의 목적이다. 인류의 지속적인 발전을 위해서도 꼭 필요한 것이다. 실크로드가 과거의 길이 아니라 현재의 길이요, 미래를 향한 길이 되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Premium Chosun ☜    허우범 역사기행 전문가(인하대 홍보팀장) appolo21@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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