萍 - 저장소 ㅁ ~ ㅇ/실크로드 7000㎞ 대장정

21 서역에서 신라의 '에밀레종'을 만나다 <무위3>

浮萍草 2014. 2. 13. 11:56
    왜 이곳 서역에 신라 '에밀레종'이 있는 것일까? 만들어진 시기도 전설까지 똑같다니 필시
    전 시간도 여유로워 무위 시가지도 둘러볼 겸 길을 걷는다. 
    도시가 전반적으로 낡았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중국의 서부개발이 활기차다고 알고 있는데 이곳은 그렇지 못하다. 
    감숙성은 예로부터 발전이 가장 느리다. 
    왜일까? 
    그것은 모택동이 중심이 되어 내전을 벌이던 대장정 시절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무위 시가지

    ㆍ모택동, “감숙성은 50년간 발전시키지 말라”
    1935년에 일어난 대장정은 공산당의 홍군(紅軍)이 장개석이 이끄는 국민당 군과 전투를 해가며 서북쪽으로 피신하여 견고한 방어선을 구축하고 재기를 다진 사건 으로 중화인민공화국 탄생의 밑거름이 되었다. 이 대장정의 과정에서 감숙성은 국민당 군과 연결되어 홍군에게 많은 피해를 입혔다. 장개석을 몰아내고 정권을 잡은 모택동은 이를 좌시할 수 없어서 감숙성을 50년간 발전시키지 말라고 하였다. 60년이 지난 지금도 그의 말은 생생하게 살아있는 것일까? 위구르민족이 사는 신장성은 사막의 열기가 무색할 정도로 서부개발 열기가 한창인데 이곳은 대충 길만 형식적으로 닦아 놓은 듯하다. 시내의 중심이 그러하니 골목길은 어떠할까. 도로가 우둘투둘한 것이 비포장 길이다. 대운사(大雲寺)로 향한다. 대운사는 5호16국 시기인 363년 전량(前涼) 때 창건된 고찰로 무위뿐만 아니라 하서4군 중에서도 중요한 사찰이다. 이 절은 원래 굉장사(宏臧寺)라고 불렸는데 9대 왕 장천석(張天錫)이 현몽을 꾼 뒤에 궁성이 있던 곳에 세웠다고 한다. 한 도사가 장천석에게 나타나 절과 탑을 세우라고 조언했다는 꿈의 내용은 이렇다.
    대운사 종루

    “대운사 터는 옛날 아쇼카왕 때 불사리 탑을 세웠던 자리이니 이곳에 절과 탑을 세우면 국가를 잘 보전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왕의 꿈은 현몽이 아니었다. 그가 전량의 마지막 왕이 되었기 때문이다. 독실한 신심이 꿈에서까지 발원하였지만 결국은 사찰을 짓기 위하여 궁성을 허물었으니 국운의 기운도 스러질 수밖에 없으리라.
    ㆍ대운사의 액막이용 향불
    굉장사는 비운을 안은 채 유지되어 오다가 당나라 때 여황제 무측천이 권력을 잡았던 690년에 새로운 전기를 맞는다. 무측천은 ‘대운경(大雲經)’에 나오는“미륵불이 여황제로 환생하니 천하가 모두 복종하리라(彌勒下生作女皇 威伏天下)”라는 구절을 따라 스스로 미륵불임을 자임 하며 전국 각주에 대운사를 짓고 대운경을 암송하게 하였다. 무위의 굉장사도 이때 대운사로 개칭하게 된다. 당 현종 때에는 안사의 난이 일어나자 위구르의 도움을 받아 난을 평정한다. 그러고 나서 위구르인들이 믿던 마니교의 회당 건립을 허락하게 되는데 마니교의 사원을 대운광명사(大雲光明寺) 마니사(摩尼寺) 또는 파사사(波斯寺)라고 불렀다. 대운사는 이때 마니교의 사원으로도 활용된다. 대운사에 들어서자마자 향냄새가 코를 찌른다. 향불을 사르는 향의 연기가 사찰 안에 가득하다. 법회가 있는 것도 아니고 경축일도 아닌데 무슨 일일까? 궁금하여 이곳저곳 살펴보니 화신전(火神殿)이란 곳에서 피우는 향이 원인이다. 이곳에서는 사람들이 저마다 병을 고치거나 액막이를 하기 위해 향을 태우고 부적을 사른다.
    화신전 앞의 액막이

    그런데 그 모습이 참으로 안타깝다. 무릎을 꿇은 사람에게 붉은 천을 씌우고 부채로 머리부터 발끝까지 온몸을 때린다. 부적과 향에 불을 붙여 온몸을 찜질한다. 흡사 우리의 1960~1970년대 상황을 보는 듯하다. 병마와 악귀를 쫒는 행위라지만 너무도 시대에 뒤떨어진 미신행위다. 고도문명시대임에도 이런 행위가 일어나는 것은 인간의 끝없는 나약함 때문일까? 아니면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을 이용하는 간사한 자들의 농간일까? 어찌 보면 이런 상황은 어디서나 볼 수 있다. 종교적 치유를 빙자해 탐욕을 부리는 곳이라면 방식에 차이가 있을 뿐 오늘도 비일비재하게 일어나는 것에 다름 아닌 것이다. 불교에서의 향은 부처님께 바치는 6가지 공양물 가운데 하나다. 자신을 태워 그 향기로 주변을 맑게 하는 해탈을 의미한다. 향을 피우는 것은 자신을 희생하는 공덕을 상징하는데 이 때문에 이 향을 해탈향(解脫香)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런 행위를 통해 부처님의 가르침이 세상에 널리 퍼진다는 것인데 대운사의 향불은 부처님의 가르침과는 정반대의 향내만 가득한 것 같아 보는 이의 마음은 씁쓸 하기만 하다.
    ㆍ대운사에서 신라 에밀레종의 기원을 만나다
    대운사는 옛 모습 그대로 남아 있지 않고 절을 찾은 사람들도 부처님의 가르침을 잊은 듯하다. 그래도 대운사의 위상을 한껏 높여 주는 명물이 있는데 바로 대운사 범종이다. 범종을 보기 위해 종루에 오른다. 듬직한 범종이 더운 바람을 맞으며 무위시내를 굽어보고 있다. 이 종은 당나라 때 만든 것이다. 커다란 규모에 소리도 웅장할뿐더러 소박하고 고풍스러운 멋을 자아내는데 수준 높은 문양까지 갖춘 덕에 중국 6대 명종(名鐘)의 하나로 꼽힌다.
    대운사 신종

    청나라 때 만든 ‘대운사중수비’에 이르길 “모양이 기이하고 소리가 우렁찬 것이 구리 같기도 하고, 철 같기도 하고, 돌 같기도 하고, 금 같기도 한 것이 그것들 가운데에서 만들어졌으니 진정 신물(神物)이다.”라고 하였다. 그래서일까? 이곳 사람들은 대운사종을 ‘신종(神鐘)’으로 여긴다. 범종을 주조한다는 것은 당시 최고의 합금술과 높은 예술적 감각이 바탕이 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범종은 일반인들에게 신비로운 물건으로 인식되기에 알맞은 것이다. 그런데 아무리 뛰어난 기술을 가졌다 하더라도 커다란 종을 만드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래서 주조 과정의 어려움을 반영한 여러 전설이 생겨났다. 대운사 범종에도 특별한 전설이 담겨 있다. “옛날 어느 황제가 자신의 덕을 알리고 태평성세임을 상징하고자 종을 만들어 세우라고 명을 내렸다. 이 명을 받은 양주 태수는 양주가 풍족한 고을임을 과시하고자 커다란 종을 만들기로 하고 세금과 모금을 함께 거뒀다. 가뭄에 허덕이는 주민들은 온갖 수탈에 시달리기만 하였다. 가난한 주종기술자는 아내에게 자식을 맡기고 종을 만드는 일에 열중하였다. 아내는 먹을 것이 없어 우는 아이를 달래지 못하고 있던 차에 한 시주승이 찾아와 시주를 하라고 떼를 쓰, 화가 난 김에 ‘아이라도 가져가라!’고 내뱉는다. 결국 이 말이 화근이 되어 시주승은 아이를 데려간다. 기일이 지나도 종이 완성되지 않자 주종기술자들이 차례로 죽임을 당하게 된다. 태수의 불호령은 극에 달하고 시주승의 말을 들은 태수는 곧장 아이를 노(爐)에 넣어 종을 만들라고 명한다. 드디어 종이 완성되어 타종을 하는데 그 소리가 ‘엄마(娘呀)~엄마~’ 하고 울려 퍼졌다.” 우리나라 경주에 있는 신라 성덕대왕신종인 ‘에밀레종’의 전설과 너무나도 흡사하다. 아니 똑같다. 우리만의 고유한 전설이 담긴 에밀레종이라고 들었는데 이역만리에서 이토록 동일한 전설을 듣다니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경주 에밀레종

    ㆍ‘실크로드’ 동서양 문명 소통의 길
    무위는 실크로드 통로인 하서주랑의 요충지다. 각종 교역과 문물의 교류가 이곳에서 집결되었는데 서역불교의 전래에 있어서도 무위는 주요 거점이었다. 대운사종은 무측천(684~704년)시기에 제작되었고 에밀레종은 771년에 만들어졌다. 두 종이 만들어진 70~80년 간의 시기는 당과 신라의 불교 교류가 활발하던 때이다. 특히, 인도의 승려들을 통해 체계를 갖춘 밀교가 중국에 직접 전해지면서 빠르게 확산되어 가던 시기다. 하서주랑의 거점도시 무위에는 밀교사원들이 세워지고 성황리에 전파되었는데 인도 고승으로 중국에 밀교의 황금시대를 연 불공(不空)도 무위의 개원사(開元寺)에 머물면서 밀교의 전파에 힘을 쏟았다. 신라는 경덕왕 때인 8세기 후반에 당나라의 문물과 제도를 받아들이는 데 매우 적극적이었는데 이때 신라의 승려들이 대거 당으로 유학길에 올랐다. 불공의 제자인 혜초(慧超)외에도 의림(義林) 현초(玄超) 혜일(惠日) 등 많은 학승들이 이곳에서 밀교를 배우고 귀국하였는데 이때 대운사종의 전설도 함께 전해졌을 가능성이 높다. 특히, 신라의 성덕왕부터 경덕왕 때에는 전제왕권의 강화로 인해 권력에서 소외된 진골세력의 저항이 지속되어 정치적으로 불안정한 시기였다. 그러다가 8세의 어린 혜공왕이 즉위한 765년을 기점으로 무열왕계의 권력은 서서히 무너지기 시작하여 767년 김양상의 반란으로 무열왕계의 정권은 끝이 난다. 이 같은 정치적 혼란기와 민심의 동요가 전설로 녹아들어가 한국적인 것으로 토착화된 것이다. 신기하고 기이한 마음으로 대운사종을 둘러본다. 고색창연함을 드러낸 채 비바람에는 아랑곳없이 그 자리 그대로 의젓하다. 하지만 이 종은 1400여 년 전 동쪽의 작은 나라 신라에까지 문물을 전해준 실크로드의 보물이다. 대운사종을 어루만지며 경주의 에밀레종을 떠올린다. 그리고 1000년이 넘는 기간 이역만리 떨어져 있던 두 종이 만나는 날을 상상해 본다. 실크로드가 과거의 길만이 아니고 현재와 미래를 움직이는 살아있는 길이라는 게 느껴진다. 순간, 대운사 범종의 당좌(撞座)를 향해 심목(心木)을 힘차게 휘두른다. 에밀레종이 듣고 화답할 수 있도록 말이다. 청나라 때의 학자인 단영은(段永恩)도 이곳 종루에 올라 신종을 보았다. 그는 어떤 생각을 했을까. 대운사 동쪽의 위태로운 종루 白尺危樓巨刹東 매서운 칼바람소리 텅 빈 하늘로 흩뿌리는데 高歌倚劍嘯長空. 삼봉탑의 기세는 하늘까지 솟아오르고 三峰塔势聳天表 한밤을 알리는 종소리만 낭랑히 울려 퍼지네. 午夜鐘聲出梵宮. 설산 남쪽은 예부터 흰 눈이 내려앉았고 雪積山南終古白 북쪽의 사막에는 석양이 붉게 지네. 沙流漠北夕陽紅. 친구와 술 마시는 이 밤이 좋으니 與君把酒酬佳節 이 또한 당대의 영웅이 아니런가. 到此誰爲一世雄
    인간의 역사만큼 무수히 많은 영웅호걸들이 세상을 호령하였건만 그들 역시 시대를 뛰어넘지는 못했으니 대운사의 종소리만 못한 것인가. 시인이 노래한 것처럼 인생이란 그저 저무는 석양을 바라보며 막걸리 한 잔으로 시름을 달래는 것인가. 사막 너머 만년설산으로 울려 퍼지는 종소리를 들으며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가는 인생의 의미를 깨우쳐야 하는 것이리라.
    Premium Chosun     허우범 역사기행 전문가(인하대 홍보팀장) appolo21@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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