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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 중세 유럽의 황혼

浮萍草 2014. 1. 9. 11:28
    4. 중세유럽의 황혼
    회의 권위가 크게 신장되면서 시작된 유럽지방의 ‘중세 암흑시대’는 교회의 권위가 저하되기 시작하면서 끝나게 되었다. 
    교왕의 권위보다 국왕들의 권위가 신장되어 간 원인은 십자군광란·백년전쟁·장미전쟁 등의 대내외적 전쟁행위가 그 시작을 알렸고 흑사병의 창궐 및 대기근의 엄습도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다. 
    소위 기독교적 지상천국을 이루었다는 유럽중세를 퉁해 끊임없이 벌어졌던 크고 작은 전쟁을 통하여 봉건영주들이 수없이 소멸해 간 반면에 그들을 통제하고 장악하는 데 
    성공한 왕들은 더 이상 교왕에게 굴복하려 하지 않게 되었다. 
    도이치 지방에서만은 봉건영주들이 계속 강한 세력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들은 선거에 의하여 자신이 '돌림군주' 자리에 추대되었을 때조차도 나중에 자기가 왕위에서 
    물러날 때에 대비해서 왕의 권력을 강화하려 하지 않았다. 
    왕의 권력은 잠시 누리는 임시직에 불과한 것이었지만 봉건영주로서의 자기 가문의 권리는 영원토록 지켜 나가고 늘려 나가는 게 유리했기 때문이다. 
    교왕과 국왕들과의 반목이 깊어가면서 서기 1309년에는 마침내 교왕이 프랑스왕에 의해서 남부 프랑스지역인 아비뇽에 납치당하는 사건이 발생하여 이로부터 약 70여년간 
    교왕이 로마가 아닌 아비뇽에서 거주하게 되었다(아비뇽 유수 ; 서1309∼1378). 
    사건이 발생한 지 수년 후부터 전 유럽지방에 대기근이 닥쳐왔는데 그 원인은 무리한 농업생산량 증가로 인하여 오히려 지력이 급속히 떨어져서 전반적으로 수확이 대폭
    감소되었기 때문이다(서1315∼1316).
     전 유럽지방에는 굶주린 거지들이 넘쳐 났고 또 불결한 위생상태가 야기시킨 갖가지 질병들이 만연했으며 그러한 일반민중의 생활이라는 것은 비참하기 이를 데 없었다.
    참담한 상황이 일상 다반사로 일어나고 있는 가운데 서기 1337년에는 프랑스와 영국사이에 전면적인 전쟁이 발생했다. 
    영국왕이 상속권을 주장하고 있던 프랑스의 아퀴텐 지방을 프랑스왕이 통치하려한 데서 시작된 양국간의 분쟁은 그 후 약 백여년간이나 계속되어 후일에 '백년전쟁'으로
    더 잘 알려지게 되었다. 
    초기에 유리하던 프랑스는 서기 1346년의 대참패를 고비로 수세에 몰리게 되었다. 
    같은 해에 크리미아반도 남쪽에서 퍼지기 시작한 페스트가 여행자와 상인들을 통하여 서유럽지방으로 옮겨갔는데 서유럽지방의 불결한 위생상태는 페스트의 급속한 
    확산을 초래했다.
    주로 도시 및 수도원 등의 인구밀집지역을 강타한 페스트는 마르세이유의 프란체스코 수도사 전원을 전멸시키는 등 성직자건 거지들이건 왕족들이건 가리지 않고 덮쳐서, 
    수년사이에 프랑스 인구의 1/3과 영국섬 인구의 1/5 정도를 감소시킴으로써, 신앙심 깊던 유럽지방의 민중을 실망시켰다. 
    흑사병은 독일·스페인·스칸다나비아 등 전 유럽지방을 무차별적으로 휩쓸며 유럽인들을 공포의 도가니 속에 몰아넣었고 그로 인하여 프랑스와 영국간의 끝날 기약이 없어 
    보이던 전쟁도 당분간 휴전할 수밖에 없었다. 
    당장에라도 말세가 닥칠 듯한 극단적인 공포에 사로잡힌 유럽인들은 엉뚱한 집단적 광기를 부리기도 했는데 그 집단광기의 불행한 희생자들은 이번에도 대부분 유태인들
    이었다. 
    유태인들이 샘이나 우물 등에 독을 넣어서 페스트가 퍼졌다는 식의 근거도 알 수 없는 소문이 사실인 것으로 믿어졌고 그에 따라서 프랑스 남부나 라인강 연안의 도시 등
    에서는 유태인 학살사건이 무수하게 발생했다. 
    유태인들은 아무런 죄도 없이 억울하게 학살당했건만 아무런 법적 보호도 받을 수 없었다. 
    유태인들은 다시 한 번 광신적인 기독교도들이 설치던 유럽사회의 속죄양이 되었던 것이다. 
    페스트의 창궐이 오래감에 따라서 전 유럽지방의 민심은 흉흉하게 들끓었고 그에 따라서 프랑스에서의 자께리(Jacquerie)반란 영국의 워트 타일러(Wat Tyler) 반란 등 
    숱한 농민봉기가 발생했으나 모두 다 잔인하게 진압되었다. 
    프랑스와 영국간의 전쟁은 다시 계속되었고 프랑스는 내부분열까지 생겨 고전한 끝에 서기 1428년에는 프랑스중부의 요충지인 오를레앙이 영국군에게 함락되었다. 
    이로써 프랑스의 장래는 절망적으로 보였으나 다음 해에 신의 계시를 받았다는 소녀 쟌다크(Jeanne d'Arc)가 출현하여 프랑스군의 사기를 북돋우었으므로 프랑스군은 
    갑자기 힘을 얻어 영국군을 격파할 수 있었다. 
    그러나 신비한 마력을 풍기면서 종횡무진 활약하던 쟌다크는 프랑스인들의 바램과는 달리 전투  에 체포되었고 다음 해인 서기 1430년에는 영국군으로부터 갖은 고문을 
    받은 끝에 마녀로 '심판'받고 화형당하고 말았다. 
    쟌다크의 죽음은 프랑스인들을 분발시켜서 얼마후인 서기1453년에 영국군을 몰아내는 데 성공했다. 
    프랑스는 백년전쟁을 계기로 왕권이 대폭 강화되었고 국가의식이 투철해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영국은 이 전쟁을 흐지부지 끝낸 데 대한 불만이 쌓여 있다가 2년 후 영국섬 내에서 내란으로 폭발하게 되었다. 
    요크셔가와 랭카스터가가 각각 흰장미와 붉은 장미를 자기들의 상징으로 삼고 싸웠기 때문에 일명 '장미전쟁'이라고도 불리운 삼십여년간에 걸친 살벌한 내란에 의해 
    많은 영주들과 기사들이 죽거나 다쳤다. 
    그로 인하여 영국섬 내에서 왕권을 강화하는 데에는 도움을 주는 결과로 끝난 이 전쟁도 최종적으로는 영국인들의 국가의식을 고취시켜 주었다. 
    백년전쟁을 통하여 서유럽사회가 안고 있던 여러가지 문제점들이 드러났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심각했던 것은 낭인무사들로 구성되었던 용병들에 관한 문제였다. 
    각 봉건영주들은 전쟁에 필요한 군대를 조직하고자 대대적으로 용병을 고용했으나 그들은 휴전기간에는 직장(?)을 잃게 되는 수가 많았기 때문에 전쟁이 없을 때는 
    엉뚱하게도 민간인들에 대한 약탈을 일삼았다. 
    일반 민중은 전쟁보다도 그들 무장강도떼나 다름없는 용병들때문에 더욱 큰 피해를 입었고 그들의 존재는 서유럽사회의 큰 불안요인이 되었다. 
    그들은 말하자면 돈만 주면 어떠한 살상이라도 서슴치 않는 살인청부업자나 마찬가지였으므로 인간으로서 갖추어야 할 어떠한 기본적 양심도 이미 바랄 수 없는 인간
    쓰레기들의 집단에 불과했던 것이다(비슷한 시기에 벌어진 왜열도의 전국시대적 상황에서도 그와 비슷한 낭인무사들의 문제가 대두되는 등 이 시기부터 유럽지방과 
    왜열도는 묘한 유사성을 보이기 시작한다). 
    명색이라도 '기사도정신'을 내세웠던 유럽사회는 이로써 스스로의 도덕성에 대한 파탄을 선언한 셈이 되었다. 
    자기들끼리 싸울 때 이외에는 그 공격심리를 외부로 돌리기 일쑤였던 유럽인들의 전통적인 성향은 스페인·프랑스·영국 등이 차례로 안정된 국가로 성장하기 시작하자 다시 
    발휘되었다. 그 발단은 스페인에서 시작되었다. 
    장미전쟁이 끝난 지 7년 후인 서기 1492년에 이베리아 반도의 사라센 세력을 몰아냄과 동시에 사라센인들과 깊은 관계를 가졌던 것으로 인식된 유태인들에 대한 대숙청이 
    '종교재판'이라는 요식행위에 의하여 단행된 사실과 때를 같이 하여 유태인 항해사 컬럼버스가 유럽지방의 숨통을 터 주는 새 항로를 발견한 것이다. 
    중세유럽이 끝나감과 함께 그동안 잠자고 있던 유럽인들의 탐욕이 폭발하는 해외약탈시대가 열리고 있었다. 
    그것은 유럽지방의 인류역사가 또 다른 야만을 향하여 퇴보해 가는 큰 재앙의 시작이기도 했다. 
    
    Pluskorea   안재세 역사전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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