萍 - 저장소 ㅁ ~ ㅇ/新 천장지구

크레용팝의 '눈물'과 공자의 '타이밍'

浮萍草 2014. 2. 5. 06:00
    知其不可而爲之者與?(시지기불가이위지자여?) 
    되지도 않을 걸 알면서도 하려고 하는 그 사람 말인가?―’논어(論語)’ 헌문(憲問)편
    ㆍ기묘한 ‘선병맛 후중독’
    지난 8월 30일 금요일, 저는 평소에 전혀 하지 않던 ‘기묘한’ 짓을 하나 했습니다. 유튜브를 통해 그날 방영한 KBS2 ‘뮤직뱅크’의 끝 장면을 시청한 것입니다. 제가 TV의 가요 순위프로그램을 본 것은 아마도 ‘가요톱텐’이 마지막이었을 겁니다. 수많은 아이돌 그룹이 우수수 쏟아져 나오는 요즘 TV에서 그들 중 누가 누군지 분간하는 것은 이미 오래전부터 관심 밖의 일이었습니다. 얼마 전 터키에 출장 가서 현지 한류 팬들과 만난 자리에선 20대 터키 여성들이 줄줄 꿰는 한국 아이돌 그룹 이름을 남의 나라 연예인 얘기인 듯 멍하니 듣고 있을 뿐 이었습니다. “걔들이 누구야?” “우리나라 애들 맞아요?” 아마 저 같은 대한민국 아저씨들, 결코 적은 수가 아닐 것입니다. 그런데 이상한 일입니다. 제가 돌연 ‘뮤직뱅크’를 보게 된 것은 어떤 특정 걸그룹 때문이었습니다. ‘직렬 5기통 춤’으로 급속하게 주가를 올리고 ‘대세돌’이라는 희한한 호칭까지 얻게 된 그 걸그룹, 크레용팝이었습니다. ‘섹시 코드를 포기하고 다 똑같은 걸그룹에 지쳐 있는 사람들의 틈새 시장을 파고들었다’부터 ‘병맛 코드로 덕후층에게 어필한다’ ‘B급 정서의 성공이다’는 말까지 성공에 대한 분석도 다양합니다.
    크레용팝 '빠빠빠'의 공식 이미지. 왼쪽부터 엘린(김민영), 소율(박혜경), 웨이(허민선), 초아(허민진), 금미(백보람). 웨이와 초아는 쌍둥이 자매다.

    사실 저는 우연한 기회에 청소년 사이의 색깔 논쟁 현상을 우려하는 기사를 썼습니다. 기사 중에 크레용팝이 ‘일베(우파 사이트인 일간베스트) 옹호자’로 몰려 부당한 공격을 받고 있다는 내용이 있었습니다. 그 과정에서“도대체 얘들이 누군데 내가 이런 기사를 쓰고 있는 거지?”란 생각이 들어 크레용팝의 과거 동영상들을 보게 됐고 이상하게도 그걸 보면서 저도 모르게 어딘가 ‘ 힐링’이 되는 느낌을 받게 됐습니다. 뭐지 이건? 한번 두번 본 비슷한 공연 영상을 또 찾아보는 일이 반복됐습니다. 나중에야 알게 됐지만, 이것은 이른바‘팝저씨(크레용팝 아저씨팬)’들이 입문 때 겪게 되는 ‘선(先)병맛 후(後)중독’의 공식이었습니다. ‘병맛’이란 원래 ‘병신 같은 말’의 준말이었지만, 지금 인터넷 공간에선 대략 ‘맥락 없고 어이없음’ 정도의 의미입니다. 물론 1970년대 말 1980년대 초에 국민학교를 다닌 제가, 이들의 안무가 모티브로 삼고 있는 것으로 추정되는 전대물(戰隊物) 그러니까 갓차맨(독수리오형제) 같은 시리즈에 친숙해서 그랬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상했습니다. 처음 보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유치하게 느낄 수 있는 안무를 이들은 너무나 자연스럽게 소화했습니다. 추리닝 위에 치마 걸치고 원색 티셔츠 입고 하얀 면장갑 끼고 오토바이 헬멧 쓴 코디는 다른 걸그룹과는 ‘무척이나’ 달랐습니다. 티셔츠 위엔 한양해서체쯤 되는 글씨로 각 멤버의 예명을 썼습니다. 솔직히 말해서 개다리춤이나 제자리뛰기 춤이 어찌 세련된 안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실로 온 국민을 열광시킨 '직렬 5기통 춤'. /스포츠조선 사진

    의도적으로 선택한 촌스런 코드 ‘예쁜 척 하지 않는’ 컨셉트(여기에 대해서는 후술하겠습니다)는 숱한 ‘팝저씨’들에게 동네 아는 동생이나 조카 같은 감정을 느끼게 했을 것 입니다. 실제로 이들의 공연 동영상을 보면 노래 전주곡에서부터 누군가 ‘오옷 이것은 우정의 무대 이래 처음으로 들어보는 중후장대한 남성 떼창이 아닌가’라고 감동어린 목소리로 털어놓았을 정도로 그야말로 모뉴먼트 밸리가 배경으로 등장하는 존 포드 서부극을 연상케 할 정도로 우렁찬 목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합니다. “백보람! 김민영! 허민진! 허민선! 박혜경! 크레용팝 빠빠빠!” 박자에 맞춰 위풍당당한 중저음의 발성법으로 크레용팝 멤버들의 본명을 외치는 것입니다. 과연 대한민국 아저씨들답게 이 순서는 철저히 장유유서(長幼有序)의 원칙을 따릅니다. 크레용팝의 노래 네 곡에 모두 이런 응원법이 있습니다.
    ㆍ“길거리에서부터 시작했는데···”
    다시 8월 30일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이미 수 차례 1위 후보까지 올라갔던 ‘빠빠빠’가 2NE1이나 엑소 같은 ‘거물급’ 아이돌에 밀려 번번이 고배를 마신 뒤였습니다. 마지막 발표에서 마침내 ‘팝저씨’들을 감동의 도가니로 몰아넣을 순간이 왔습니다. “이번주 1위는 크레용팝! 축하합니다.” 사실 그것은 올해 가요계의 기적이었습니다. 음원 발표 때 순위 100위권에도 못 들던 곡이 두 달만에 듣도보도못한 ‘역주행 차트’의 기세를 몰고 올라와 1위를 했습니다. 듣도보도못한 영세 기획사의 신생 걸그룹이 소녀시대와 한솥밥을 먹으며 오빠부대 백만대군을 거느린 엑소를 제쳤던 것입니다.
    2013년 8월 30일 KBS2 '뮤직뱅크'에서 1위를 하며 기뻐하는 크레용팝. /KBS 화면 캡처

    잠시 실감을 못한 표정으로 서 있던 다섯 명 크레용팝 멤버들은 서로 껴안았습니다. 어쩔줄 몰라 하면서, 눈물을 펑펑 흘리면서 마이크를 잡은 것은 가장 연장자인 금미(백보람)였습니다. “진짜… 우리 팬 여러분들 정말 사랑하고… 저희가 길거리에서부터 시작했는데 이 자리까지 팬심 주신 것 정말 너무너무 감사드립니다…”
    저희가 길거리에서부터 시작했는데..." 눈물어린 소감을 말하는 크레용팝의 리더 금미. /KBS 화면 캡처

    요즘들어 아이돌이 가요순위프로그램에서 1위를 하더라도 이렇게 눈물을 흘리는 일은 좀처럼 없습니다. 심지어 심드렁한 표정을 보인다고 입방아에 오르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런데 금미는 마치 그동안의 설움을 한꺼번에 쏟아내듯 눈이 충혈되도록 펑펑 울고 있습니다. 여기서 곰곰이 되새겨 볼 말이 있습니다. ‘길거리에서부터 시작했는데.’ 그렇습니다. 이들은 밑바닥부터 시작해서 차곡차곡 올라와 ‘역주행 신화’를 만들어낸 주인공이었습니다. 겉보기에는 그저 개구쟁이 소녀로만 보이는 이들은 사실 모두 굴곡 많은 길을 걸어왔습니다. 부친의 병환 때문에 연예계의 꿈을 접고 모낭분리사라는 희귀 직업에 종사하거나(금미) 쇼핑몰 피팅 모델을 하거나(엘린) 뮤지컬 배우 지망생이었거나(초아),인디밴드에서 보컬을 하면서 실용음악학원 강사를 하거나(웨이) 촉망받는 2인조 걸그룹의 일원으로 활동하려다 무산됐던(소율) 전력이 있습니다. 누군가는 말했습니다. ‘다들 사회의 쓴맛을 경험했던 을(乙)이었다.’ 이들은 1988~1991년생입니다. 걸그룹치고는 나이가 많은 것도 이유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한 가지 점에서 확실한 공통점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어찌보면 우리가 지금껏 참으로 많이 그런 얘기를 듣고 살아왔다는 점에서는 대단히 진부한 말이긴 하지만 이들에게 있어서는 분명한 사실인 그런 문장으로 표현될 수 있습니다. 그 문장은 다음과 같습니다. 그들은 모두 꿈을 잃지 않고 계속 도전해 왔다는 것입니다.
    ㆍ데뷔와 시련의 나날들
    5인조 걸그룹 크레용팝이 공식 데뷔한 것은 2012년 7월의 일이었습니다. 그해 초 ‘허리케인 팝’이라는 이름으로 주로 중국에서 활동하다 멤버 한 명이 교체되면서‘크레용팝’으로 이름을 바꿨습니다. 화려한 배경이나 경력도 대규모 소속사도 없었지만 이들은 피나는 연습을 거쳐 천신만고 끝에 데뷔했습니다. 데뷔곡은 ‘새러데이 나잇’이었습니다.
    크레용팝 데뷔곡 '새러데이 나잇'의 뮤직비디오. 지금의 '헬멧 소녀'와는 무척 다른 컨셉트다

    이것은 복고풍의 디스코 음악이었습니다. 강렬하고 경쾌한 퍼커션 사운드도 인상적이지만 무엇보다도 대단히 다채롭고 복잡한 안무가 눈길을 끄는 곡이었습니다. 의상도 80년대 나이트를 연상시키는 화려한 복고풍이었습니다. 하지만 바로 그것이 발목을 잡았으니 처음 보는 신인이 누가 누군지도 모르는데 백댄서와 잘 구분되지도 않을 지경이었으니… 대중의 뇌리에 각인되기가 어려운 상황이었습니다. 만약 지금의 크레용팝이 이 노래를 신곡으로 들고 나온다면 얘기는 달라질 수 있었을 겁니다. 그러나 ‘새러데이 나잇’은 공중파 음방 딱 두 번 타고 한 달도 안 돼 묻혀버립니다. 크레용팝 멤버들은 이 때가 가장 어려운 상황이었다고 회고합니다. “정말 음악을 계속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를 고민했다고 합니다. 소속사인 크롬엔터테인먼트의 황현창(35) 대표는 이렇게 ‘한 차례 말아먹은’ 뒤에야 ‘그저 예쁜 걸그룹 컨셉트’로는 다른 아이돌과 차별화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컨셉트를 바꾸자!” 그런데 어떻게? 처음에는 이렇게 ‘트로트 컨셉트 의상’도 준비했었다고 합니다.
    소속사가 '흑역사'라고 털어놓는 크레용팝의 '트로트 컨셉트 의상'. 한때 진짜로 채택할 것을 고려했다고 한다. /크레용팝 팬사이트

    ㆍ아주 독특한’ 컨셉트의 등장
    ‘ 이 컨셉트를 포기한 크롬측은 마침내 그 다음 컨셉을 내놓습니다. 그것은… 아아, 그것은… 지금까지도 크레용팝의 이미지를 형성하는 불멸의 컨셉트이자 수많은 ‘팝저씨’들의 의상으로 자리잡은 바로 그 컨셉. 그것은 바로,추리닝이었습니다.

    추리닝이라니! 걸그룹에게 추리닝이라니! 더구나 대한민국 국군이 내무반에서 입는 생활복을 연상케 하는 저 주황색… 네, 어쩌면 그걸 노린 것인지도 몰랐습니다. 때로는 위로 교복, 아래로 추리닝을 입는 이른바 ‘교리닝’ 패션으로 등장하기도 했습니다. 어쨌든 저 주황색 추리닝을 갖춰입고 컴백한 것이 2012년 10월 26일, 노래는 ‘댄싱 퀸’이었습니다. 저는 모든 노래의 장르마다 ‘고독한 개인의 결단과 성찰을 담은 곡’이 하나씩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만화영화 주제가 중에서는 ‘원탁의 기사’였고 가요 중에는 김민기의 ‘아침이슬’이었으며 팝송 중에는 비틀스의 ‘길고도 험한 길(The Long and Winding Road)’ 이었으며(마피아와의 유착으로 점철된 한평생을 턱없이 미화하는 노래방분위기킬러 ‘마이 웨이’는 여기서 제외) 군가 중에선 ‘행군의 아침’이 될 것이며, 걸그룹 노래 중 에서는… 바로 크레용팝의 ‘댄싱 퀸’이 되겠습니다. ‘밤은 깊어 가는데 나 어쩌나 나 지금 격하게 우울해 …댄싱 인 더 문라잇 쏟아지는 별빛 아래…’
    라는 고독한 자아의 정서가 투영된 이 노래의 안무 중에는 심지어 ‘고독 춤’마저 있습니다 (훗날 크레용팝은 그 어렵고 힘든 시기에 이 춤이야말로 자신들의 마음을 아주 잘 표현한 춤이라고 회고합니다).
    크레용팝 '댄싱 퀸' 중의 '고독 춤'. 크레용팝은 아무도 알아주지 않던 시절 자신들의 마음을 가장 잘 표현한 춤이라고 말한다.

    이 기막힌 노래 역시 공중파 음방 딱 세 번으로 묻혀버립니다. 2012년 11월 16일 KBS2 뮤직뱅크에선 갑자기 마지막 부분에서 웬 CD를 들고 나와 옛 DJ들이 췄다는 전설의 ‘판춤’을 췄는데 자세히 보니 그건 바로 자기들 음반! 얼마나 사람들에게 자신을 알리고 싶어서 그랬을까마는 이 방송사고에 가까운 ‘레전드 거사’ 이후 몇 달 동안 크레용팝의 모습을 TV에서 찾아보기는 힘들게 됐습니다.
    이것이 바로 2012년 11월 16일 전설의 '판춤'! '댄싱 퀸'은 이것이 막방이 됐다. /KBS 화면 캡처

    ㆍ한겨울에 길거리로 뛰어들다
    그러나 이미 ‘댄싱 퀸’으로 컴백할 때부터 이들은 새로운 행동에 들어가게 됩니다. 10월 말부터 다음 해 2월까지,그 추운 한겨울 동안 이들이 선택한 것은“밑바닥에서부터 다시 시작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얇은 주황색 추리닝을 위아래 걸치고 길거리로 뛰어나가 ‘게릴라 공연’을 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게 얼마나 무모한 짓인지는, 군 생활 도중 내무반에서 입던 생활복 차림으로 깔깔이 없이 한겨울에 막사 밖으로 뛰쳐나갔다고 생각하면 됩니다. 이들은 ‘걸그룹 크레용팝’ ‘크레용팝 댄싱퀸’이란 팻말과 확성기를 들고 명동 신촌 대학로 강남역 잠실 홍대앞을 종횡무진 돌아다니며 길거리 공연을 합니다.
    크레용팝이 길거리에서 공연을 하는데 스마트폰을 보거나 등을 돌리는 것은 지금으로선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다.

    그들의 표현대로 ‘얼굴에 철판을 깔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반응은 신통치 않았습니다. 지나가다 공연을 본 사람들 상당수는 “쟤들 뭐냐” “춤이 웃긴다”는 심드렁한 반응을 보이기 일쑤였습니다. 도대체 당시에 크레용팝이 얼마나 게릴라 공연을 많이 했는지에 대해서는, 이들의 2012년 12월 스케줄표가 짐작할 수 있게 해 줍니다.
    빈칸도 휴일도 없다. 2012년 12월의 크레용팝 스케줄. 길거리, 길거리, 길거리... 이것이 바로 "저희가 길거리에서부터 시작했는데"라는 눈물의 1위 소감이 나온 사연
    이었다. 크레용팝 남성팬인 '팝저씨'들이 형성되기 시작한 것도 이때였다. /크레용팝 팬사이트

    ㆍ‘땀’은 ‘꿈’을 배신하지 않는다.
    관심있게 지켜보는 관객 한 명 보이지 않는 그 당시의 쓸쓸한 게릴라 공연 동영상이 남아있습니다. 사람들이 무심히 지나치는 역사 한 귀퉁이에서 그들은 열심히 춤을 춥니다. 신도림역에서 촬영됐다는 이 동영상을 지금 보는 팬 중에는 눈물을 감추지 못하는 사람도 많다고 합니다. 한 팬은 이렇게 회고합니다. 그들의 얼굴에는 마치 이렇게 써 있는 것 같았다고 말입니다. 아무리 추워도 노래할 수 있어 행복해요. 아무도 알아주지 않아도 춤출 수 있어 행복해요… 당시 서울의 한 주부는 지하철 2호선을 타고 가던 중 갑자기 객차 안에 들어와서 게릴라 공연을 펼치는 생소한 걸그룹 크레용팝을 목격합니다. 훌륭한 어머니임이 분명한 이 블로거는 이렇게 기록합니다. “전 아이들에게 말해 줬어요. 유명한 걸그룹이 된다는 것은 하루아침에 이뤄지는 것이 아니란 사실. 그녀들을 24시간 지켜보지 못한 우리 눈에는 어느날 갑자기 스타가 된 것 같지만 사실은 저렇게 자신이 스타가 되기 위한 노력을 열심히 했던 결과라고… 오늘 지하철에서 만난 크레용팝도 어느날 팬들의 열광에 감사할 줄 아는 톱스타의 걸그룹이 되기를 저도 바래본답니다.” 지금 이 블로그 포스트는 크레용팝 팬들이 반드시 들어가서 한번씩 울고 나오는 성지(聖地)가 됐습니다. 그들은 꿈을 포기하지 않았고, 항상 밝게 웃었습니다. 쉬는 날도 없이 연습에 몰두했고, 나이어린 다른 걸그룹을 만나도 항상 깍듯이 인사하고 선배 대접을 했습니다. 하나둘씩 늘어나는 팬들을 늘 소중하게 여겼습니다. 소속사의 황현창 대표는 직접 이들의 일상을 재미있게 동영상에 담아 ‘크레용팝 TV’라는 이름으로 열심히 유튜브에 올렸습니다. 2013년 1월의 ‘빙빙’을 거쳐, 6월의 ‘빠빠빠’에선 아무도 시도하지 않았던 과감한 컨셉트로 승부를 걸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들의 땀은 그들의 꿈을 배신하지 않았습니다. 크레용팝은 이제 ‘대세돌’을 넘어서 ‘국민돌’로까지 불리고 있습니다. 마침내 지난달 10월 30일에는 소녀시대·카라·씨스타 같은 대형 아이돌이나 한다는 단독 콘서트를 열어 팬들의 열광적인 반응을 얻었습니다.
    이제 누가 봐도 국민돌!

    도대체 어느 걸그룹이 국군의 날에 행진하는 군인들에게 화환을 걸어주고 KBS ‘전국노래자랑’에 출연해서 어르신들을 펄쩍펄쩍 뛰게 할까요? 어느 걸그룹 노래가 전국의 초등학교 가을 운동회마다 반복적으로 울려퍼질까요? 지난 9월 10일 성균관대 자연과학캠퍼스 축제에서는 비가 퍼붓자 당당히 “제대로 즐기시려면 천막을 걷어주세요!”라고 외친 뒤 비를 맞은 채 공연합니다. 멤버 한 명(엘린)은 공연 도중 빗물에 미끄러져 넘어졌지만 웃으면서 일어나 공연을 계속합니다. 게릴라 공연을 통해 밑바닥에서부터 탄탄히 쌓아 올린 공력을 보여주는 모습이었습니다. 여기서 한 가지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많은 사람들이 크레용팝에 대해서 막연히 가지는 아주 잘못된 오해에 관한 것입니다. 저는 지금 ‘일베 논란’ 같은 것을 언급하는 게 아닙니다. ‘외모가 안 되니까 헬멧을 쓰고 나온다’는 오해에 관한 것입니다. ‘예쁜 척 하지 않는 컨셉트’라는 것은 ‘실제로 예쁘지 않다’는 것을 의미하는 게 결코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것에 대해서는 사진 두 장으로 설명을 대신하겠습니다.
    크레용팝 조선일보 추석특집 한복 사진. /이명원 기자

    누구나 예쁘게 보이고 싶을 20대 여성 연예인들이 추리닝과 헬멧과 직렬 5기통춤을 선택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수많은 ‘삼촌팬’들의 크레용팝에 대한 중독은 물론 친숙한 복고풍과 B급 정서라는 면도 있겠지만 그들이 이 자리에 올라오기까지 흘렸던 그 ‘땀’의 밀도를 진심으로 이해하고 동화되기 때문이라는 점이 훨씬 클 것입니다. 팬들은 끊임없는 노력을 통해 한 발씩 올라오는 크레용팝의 모습에서 ‘을(乙)이 갑(甲)을 이기는’ 환희와 감격을 맛보는 것입니다.
    ㆍ“되지도 않을 걸 알면서 왜….”
    만약 이들이, 어느 한 순간 ‘도저히 이건 안 되는 일이다’라고 정말 심각하게 생각했다면 그리고 그 길을 포기하려 했다면 ‘다른 길도 있겠지’라고 생각했다면 과연 지금처럼 되는 것이 가능한 일이었을까요? ‘논어(論語)’ 헌문(憲問)편에 이런 말이 나옵니다. 공자의 제자 자로(子路)가 석문(石門)이란 곳에서 유숙했습니다.(子路宿於石門·자로숙어석문) 새벽에 성문을 열어주는 일을 맡은 사람이 “어디에서 왔소?”라고 물었습니다.(晨門曰 奚自·신문왈 해자) 자로는 “공씨(孔氏·공자)로부터 왔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子路曰 自孔氏·자로왈 자공씨) 그러자 이 사람, 새벽에 성문을 열어주는 일을 맡은 하급 공무원 그러나 주자(朱子)는, 감히 이런 사람이 우리 공자님에게 이렇게 함부로 말했을 리가 없다, 이런 생각에, 아마도 현자로서 관문을 지키는 일에 은둔한 자일 것(蓋賢人隱於抱關·개현인은어포관)이라고 짐작했던 바로 이 사람은 이렇게 말합니다. 是知其不可而爲之者與? (시지기불가이위지자여?) 자, 어떻게 번역해야 할까요? 아니, 이것은 칭찬일까요, 욕일까요? 일단 말 그대로 풀어 보겠습니다. “되지도 않을 걸 알면서도 하려고 하는 그 사람 말인가?” 일단 이 사람이 다혈질인 자로에게서 해코지를 당하지 않았을까 하는 우려는 생략하겠습니다. 성균관대 신정근 교수의 말처럼, 여기에선 언뜻 안타까워하면서도 격려하는 어감이 비치기도 합니다. ‘다른 사람 같으면 진작에 포기했을텐데 공자는 무슨 힘으로 저렇게 버틸 수 있을까’라는 어감 말입니다. 제가 보기엔 이 말에는 두 가지 어감이 모두 담겨 있습니다. 비난인 동시에 안타까움인 것입니다. 수천년 전 춘추시대 사람들의 말은 이렇듯 함축적이었습니다. 그런데. 주자(朱子) 주(註)에서 송나라 학자 호인(胡寅)은 이렇게 말합니다. “ 신문(晨門·새벽에 문 열어주는 사람)은 세상의 불가함을 알고 하지 않은 자다. 그러므로 이 말로써 공자를 조롱한 것이다. 그러나 성인(聖人)이 천하를 볼 적에는 할 수 없는 때가 없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ㆍ“내가 타이밍 맞춰야 되는 거냐?”
    이것은 마치, 류승완 감독 영화 ‘베를린’의 한 장면을 떠올리게 합니다. 한석규의 후배이자 상사인 국정원 부장은 작전의 진짜 목적이 다른 데 있었음을 한석규가 알게 되자 “내가 진작에 얘기했어야 하는데… 말할 타이밍을 놓쳤어”라고 변명 합니다. 그러자 한석규는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타이밍 맞춰서 얘기 들어야 되는 사람이냐?”
    야~ 내가 타이밍 맞춰서 얘기 들어야 되는 사람이냐? /영화 '베를린' 캡처

    그러니까 ‘무엇을 하기에 아주 기가 막히게 적당한 때’라는 건 좀처럼 찾아오지 않습니다. 그런 건 애당초 없는지도 모릅니다. 공자는 패도(霸道)와 악육강식의 천하에서, 세상에 도(道)를 세우려 했습니다. 어려운 상황이었다는 사실은 ‘공자’도 ‘신문’도 알았습니다. 그러나 공자는 ‘타이밍 따윈 없다’고 생각했기에 그가 세상을 떠난 뒤에도 그의 제자와 그의 제자의 제자와 그의 제자의 제자의 제자들을 통해 자신의 뜻을 세상에 전파할 수 있었습니다. 아주 재치있는 어떤 사람이 ‘마흔 넘어서서 하지 말아야 할 것’이란 말을 한 잡지에 올렸습니다. 그 중에서 “자신의 한계를 무시하지 마라. 가능과 불가능이 정해진다. 가능한 일에 집중해야 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누군가는 이렇게 반박했습니다. “한계를 미리 정한다면 그건 정말 한계가 되는 것이 아닌가?” 예전에 저는 늘 저보다 한참 연세가 많은 사회 각 방면의 분들로부터 직간접적으로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어쩌면 거의 유일한 기자 직업의 장점은 바로 거기에 있을 겁니다. 하지만 이제는 저보다 한참 나이 어린 크레용팝의 눈물을 보면서 자신의 앞길에 ‘되지도 않을 것(其不可)’이란 플래카드를 선험적으로 걸어놓는 것이야말로 위험천만한 일이라는 걸 새삼 깨닫게 됐습니다. 크레용팝은 ‘새벽에 성문 열어주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 사람은, 실제로 정말 새벽에 일찍 일어나 문 열어주는 정도의 능력 밖에는 스스로를 개발(開發)하지도 계발(啓發)하지도 못했던 것이 아닌지이제는 그런 생각마저 듭니다.
    ☞ ‘유석재의 新천장지구는’?
    10여년 전 저는 인터넷상의 조선일보 기자클럽에서‘유석재의 천장지구’란 홈페이지를 운영했습니다. 당시 편집부 초년 기자였던 저는“고전(古典)에 담긴 지혜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해 보겠다”는 취지로 그 기자클럽을 시작했었습니다. 당시의 소개문은 이러했습니다. <천장지구(天長地久). 수수께끼와도 같은 영화제목으로 우리에게 친숙한 이 어구는 사실 <노자(老子)> 7장에 나오는 우주론적인 금언입니다. '천지(天地)는 장구(長久)하다.'- 하늘은 넓고 땅은 오래간다. 이 어구의 다음 문장은 이렇게 이어집니다. ' 하늘과 땅이 장구할 수 있는 것은 자기만 살려고 하지 않기 때문이다.(天地所以能長且久者, 以其不自生) ' 우리가 21세기 초의 세상에서 지금과 같은 삶을 영위하고 있다고 해서'나는 나'라고 강변하며'이렇게 살고 있는 내 삶은 나만의 삶일 뿐이다'라고만 주장하며 살 수는 없습니다.
    우리의 삶이란 자연과 역사가 만들어내는 시공간적 콘텍스트 위에 놓여진 하나의 좌표점일 뿐입니다. 자연이 이루어놓은 거대하고 견고한 대지(大地) 위에 인간의 문명이 이루어졌고, 문명은 끊임없는 변주(變奏)를 수행합니다. (중략) '천장지구'는 디지털이 지배하는 우리의 일상에 보다 새로운 모습으로 다가올 수 있는 선현(先賢)의 사변들을 되새기고자 합니다. 동양고전의 새로운 향기를 맡는 자리가 되고자 합니다. 고전을 통해 권위를 내세우거나 고전을 붙잡고 남을 비방하는 자리가 아니라 어떠한 해석의 지평도 허용하면서 그것을 통해 내 삶의 좌표와 방향을 세우는 데 일조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드는 장소가 되고자 합니다.> 지금 돌이켜보면 터무니없이 중후장대한 허장성세에 얼굴이 화끈거릴 지경입니다. 그 후로 10년이 넘는 세월이 흘렀습니다. 세상은 하루가 길게 느껴질 정도로 순식간에 융·복합적으로 변화하고 있습니다. 그나마 우리의 삶을 지탱하던 가치관들이 곳곳에서 무너지는 소리가 계속해서 들렸습니다. 당장 지하철만 타도 스마트폰에 고개를 파묻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에서 알 수 있듯 IT기술의 발달이 오히려 사람들의 아날로그적 소통을 방해하고 ‘인간(人間)’이란 존재 에서 ‘간(間)’의 의미를 희미하게 하고 있습니다. 이제 다시 ‘고전과의 소통’이란 오래된 주제를 꺼내놓으려고 합니다. 폼을 잡지도, 겉멋을 부리지도 않겠습니다. 밑바닥에서부터 다시 ‘어딘가 있을 무언가를’ 찾겠습니다. 처음 ‘천장지구’를 시작한 이후 10여 년 동안 문화부·기획취재부·사회정책부·오피니언부 등에서 묵묵히 쌓았던 취재 경험을 그 속에 녹아내겠습니다. 그저 낮은 자세로 말입니다.

    Premium Chosun      유석재·문화부 기자 karma@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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