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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몽인과 옥사와 시

浮萍草 2013. 12. 13. 09:59
    조참판 유몽인은 거듭되는 옥사(獄事)에 불만이었다. 
    “대단한 것도 없이 100명이나 연루되는 옥사를 일으키다니 도대체 어떤 자의 농간이란 말인가?” 
    광해군 시대, 대북파의 편협한 정국 운영으로 옥사가 끊이지 않았다. 
    서자로서 어렵게 왕위에 오른 광해군이 역변(逆變)에 과민했던 탓도 있었다.
    그날은 마침 술병을 들고 찾아온 벗이 있어 봄놀이를 즐기고 있었다. 
    기녀가 <시경> ‘백주’ 편을 노래하여 한창 분위기가 무르익었다. 
    이때 하인이 달려와 얼른 추국(推鞫)에 참여하라는 명을 전했다. 헛된 옥사로 이 좋은 술자리를 망치다니.
    유몽인은 추국청에 들어서 시를 읊었다.
     
    “꽃과 버들이 성안 가득해 봄놀이 즐기는데
    미인이 술잔 놓고 백주 시를 읊네.
    장사가 홀연 칼을 들고 일어서니
    취중에 늙은 간신 머리를 찍어야 마땅하리.”
    옥사는 무고로 판명되었지만 옥사를 야유한 유몽인은 파직되었다. 유몽인은 임진왜란 때 세자인 광해군을 모시고 전장을 누비며 민초들의 고통을 겪기도 했다. 모호한 역모사건이 잇따른 끝에 인목대비 폐비론이 대두되었을 때 그는 반대했다. 사직 상소를 올렸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러던 차에 파직된 것이다. 재야에서 지내던 유몽인이 64세에 금강산에 들어갔다. 인조반정이 일어나 다시 서울로 가는 길에 보개산사(寶蓋山寺)에 묵게 되었다. “지난해 금강산에 거처한 것은 고상함이요 올해 야산(野山)에 머무는 것은 속됨이라. 진흙탕에 굴러도 더러워지지 않는 것은 결백함이요 먹을 것이 있어 좇는 것은 비루함이라. 내가 어디에 처하겠소? 재(才)와 부재(不才) 현(賢)과 불현(不賢), 지혜로움과 어리석음 귀함과 천함 사이인가 보다.” 고민하던 유몽인은 자신의 마음을 결정했다. 이를 ‘상부시(孀婦詩)’에 담았다. “칠십 먹은 늙은 과부 홀로 빈방 지키는데 주위사람 시집가라 권하며 남자 얼굴 무궁화 같다 하네. 여사(女史)의 시(詩)를 익히 읊고 어진 여인 가르침도 제법 아는데 흰머리에 젊게 화장한다면 분가루가 부끄럽지 않겠나!”
    유몽인은 광해군 정권에 밉보여 물러났지만 그 정권을 뒤엎은 쿠데타 세력에 동조하지도 않았다. 역모 혐의로 체포돼 상부시가 빌미가 되어 처형되었다. 그는 먼 훗날 정조에 의해 지조가 인정되고 관작이 회복되었다. 무리를 짓고 세를 이루며 권력을 좇던 세상에서 유몽인은 오히려 “나는 혼자”라고 말했다. “오직 내 마음이 가는 대로 간다. 내 마음이 돌아가는 곳이 오직 한 사람일 따름이니 그 거취가 어찌 여유롭지 않겠는가?”
    Khan         김태희 실학21네트워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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