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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개토호태왕에게 거국적으로 항복한 왜구 (6부)

浮萍草 2013. 11. 22. 00:00
    감숙성과 청해성까지 순시한 광개토호태왕
    6. 감숙성과 청해성까지 순시한 광개토호태왕
    (8년 원문)八年戊戌 敎遣偏師觀帛愼土谷 因便抄得<莫斯羅城><加太羅谷>男女三百餘人 自此以來朝貢論事 [번역] 영락 8년 무술(398) 편사를 파견하여 백신(帛愼)과 토곡(土谷)을 살피게 하교하였다. 모사라성과 가태라곡의 남녀 3백여 명을 인을 편초하니 이때 이후로부터 내조하여 조공하고 일을 아뢰었다. (해설) 광개토호태왕이 백신(帛愼)·토곡(土谷)과 전쟁을 하지 않고 순시하게 한 것으로 보아 토곡은 예전부터 조공을 바치던 속국으로 보인다. 토곡을 국어대사전에서 찾아보면 다음과 같다. “토곡혼(吐谷渾) : 4세기 초 중국의 청해(菁海) 지방에 있던 나라 이름 왕족은 선비(鮮卑)로 5호16국 시대부터 세력을 떨쳤으나 뒤에 북위 수 당의 토벌을 받아 663 년에 도번(吐藩)에게 멸망당하였다” 토(土)자가 약간 다르나 같은 것으로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삼국사기>에는 토곡혼에 대한 기록이 없으나 <고구려사초.략>에는“미천대제 30년(329) 엽연이 왕이었던 아비 토연의 이름을 성씨로 삼는 것을 예의로 여겨서 나라 이름을 토곡혼으로 하였다”라는 기록이 있으며 토곡혼에 관한 기록이 여러 번 나타난다. 즉 토곡혼과 고구리는 아주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또한 청해(靑海)를 <중국고대지명대사전>으로 찾으면, 현재 섬서성 서쪽 청해성에 있는 내륙호수인 청해를 말하는 것으로 나온다. 아래 설명에서 보듯이 서해(西海)를 중국에서 5호16국 시대부터 청해로 부른 것으로 보아 그 이전 청해의 서쪽은 고대 중국의 땅이 아니라는 말이며 그 이후 명나라 때까지도 계속 중국의 영토가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이곳을 토곡혼으로 불렀던 때는 동진 때부터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번역) 청해 : 청해는 옛날 서해 선수해 비화강해로 칭했고 5호16국 때부터 청해로 불렸다. 중국의 서부에 있으며 동북 경계는 감숙성, 동남 경계는 사천성, 서남 경계는 티베트 서북 경계는 위구르로 길이가 600리 폭이 2,000리로 우공의 4융의 땅이었다. 3대(하.은.주)를 지나 한나라 때까지 서강 동진 이후에는 토곡혼이라 했으며 당나라 초기에 토번으로 편입되었고 명나라 무종 때 몽골의 수족이 점거하기 시작했다. (원문) 青海.青海古称西海.鲜水海.卑禾羌海.自十六国时期称青海.在我国西部.东与北皆界甘肃.东南界四川.西南界西藏.西北界新疆.长六百里.广二千里.禹贡四戎地, 历三代至汉为西羌.东晋以后为吐谷浑.唐初入于吐蕃.明正德间.始为蒙古首族占据,
    청해성은 대대로 중국의 영토가 아니었다. / 편집부

    백신(帛愼)을 숙신(肅愼)으로 보는 견해도 있는데 어디를 말하는 지명인지는 현재 알 길이 없다. 숙신은 읍루(挹婁)와 거의 같은 지역으로 중국사서에 기록되어 있다. “<후한서 동이전>에 부여국 북쪽에 약수가 있다. <진서 사이전> 읍루국 동쪽 변에 대해가 있고 북쪽 끝이 약수이다. (《后汉书东夷传》夫余国北有弱水《晋书四夷传》挹娄国东滨大海.北极弱水)”라는 기록이 있듯이 내몽골 서남단에서 발원해 감숙성을 흐르는 약수 남쪽에 부여국 과 읍루가 있었다는 설명인데 그곳은 바로 지금의 청해성(靑海省) 일대를 말하는 것으로 이 일대는 대대로 조선대연방(朝鮮大聯邦)의 일원으로 서쪽 제후가 다스리던 땅이었다. 약수 남쪽에 위치했던 부여(夫餘)의 기원에 대해 북애자 노인이 쓴<규원사화 단군기>에 의하면 국조 단군왕검에게는 네 아들이 있었는데 장남인 부루(夫婁)는 태자로 책봉되었고 나머지 세 아들인 부소(夫蘇) 부우(夫虞) 부여(夫餘)에게는 서쪽 땅을 주어 다스렸다고 한다. 부여라는 이름은 왕검의 4째 아들로부터 온 것으로 부여는 대대로 조선연방의 일원으로 지금의 감숙성과 청해성 일대에 있던 제후였던 것이다. 특히 ‘백신과 토곡을 살피게 했다’는 비문의 기록은 고구리의 도읍을 한반도에 놓고서는 거리적으로 성립되기 어려운 점이 있다. 따라서 일제식민사학인 지금의 반도사관은 대단히 잘못된 역사이론인 것이다. 결론적으로 말해 고구리의 핵심강역(도읍)은 산서성이었으며 흉노로 대변되는 감숙성과 청해성과 티베트가 모두 고구리의 연방이었기 때문에 위 기록들이 성립될 수 있는 것이다. 그 결정적 근거의 하나가 바로 티베트와 위구르에서 일어나고 있는 민족분쟁인 것이다. 티베트 망명정부를 이끌고 있는 달라이라마는“티베트와 한국은 형제국”이라 하며 한국 방문을 추진하려 했다가 중국의 방해로 무산된 적이 있는데 그 이유가 이러한 역사적 사실을 대변해준다 하겠다.
    감숙성 돈황석굴에 고구려 벽화가 그려진 이유는 그곳까지 고구려가 지배하고 있었기 때문 / 편집부
    7. 왜구(倭寇)와의 전쟁
    (9~10년 원문) 九年己亥 百殘違誓 與倭□通 王巡下平壤 而新羅遣使白王云 倭人滿其國境 潰破城池 以奴客爲民 歸王請命 太王恩□□其忠誠 特遣使還告以□□ 十年庚子 敎遣步騎五萬往救新羅 從男居城至新羅城 倭□其中 官軍方至 倭賊退 [번역] 영락 9년 기해년(399)에 백제가 맹세를 어기고 왜와 통하였다. 왕이 순행하여 하평양에 이르니 신라에서 사신을 보내어 왕에게 아뢰기를 왜인이 나라의 국경에 가득하여 성과 못을 파괴하니 노객(=신라왕)이 백성을 위하여 왕 에게 와서 명을 청합니다." 하였다. 태왕은 은혜를 베풀어 그 충성을 칭찬하고 특별히 사신을 파견하여 함께 보내어 (출병을) 알리게 하였다. 영락 10년 경자(400)에 하교하여 보병과 기병 5만을 파견하여 신라를 구원하게 하였다. 남거성에서 신라성 사이에 왜인이 가득하더니 관병이 이르자 왜적이 물러갔다. (해설) 이후 문구는 왜와 관련이 되어 있는 내용이라 일제가 조작하여 깨어진 글자와 결자가 많고 문구가 많이 조작되었다. 아래는 한단고기를 엮은 운초 계연수선생이 광개토태왕 비를 보고 직접 글로 적어 전한 것이다. 이름하여 비문징실(碑文徵實)이라한다. 아래의 청색 글자가 일제가 조작하거나 없애버린 글자로 보인다. (원문 第2面9行) 官兵 跡而越來攻來背 急追至任那 加羅從拔城 城卽歸服 安羅人戍兵拔 新羅城口城 倭滿倭潰城六 (第2面10行) 被我攻口滅 無遺倭遂擧 國降死者十之八九 盡臣率來 安羅人戌兵滿假口 口倭欲敢戰與喙己呑卓淳 (번역) 병이 왜의 자취를 밟고 넘어 급히 쫓아 임나가라에 이르러 성을 치니 성은 귀복 하였다. 아라인 수병이 신라성을 쳐서 빼앗았다. 0성에 왜가 가득 있었으나 왜가 무너졌고 6성이 우리의 공격을 받아 궤멸되어 남은 것이 없었다. 왜가 드디어 거국으로 항복하니 죽은 자가 십중팔구나 되었으며 신하를 모두 데리고 왔다. 아라인 수병이 가00에 가득 차 있었다. 왜가 훼기탄, 탁순의 여러 적들과 더불어 감히 싸우고자 하여 00을 꾀하였으나 관병이 먼저 이들을 제압하여 바로 탁순을 빼앗았다. (원문 第3面1行) 諸賊謀口口 官兵制先直 取卓淳而佐 軍由淡路島 到但馬右軍經難波至武藏王直到竺 斯諸賊悉自潰 (第3面2行) 遂分爲郡 安羅人戌兵昔 新羅寐錦未 有身來口口口國岡上廣開土境好太 王口口新羅寐錦口口僕勾 (번역) 이어 좌군은 담로도를 경유하여 단마에 이르고 우군은 난파를 경유하여 무장에 이르고, 왕은 바로 축사에 도착하니 여러 적들이 스스로 무너졌다. 드디어 이를 평정해 군으로 나누었다. 아라인술병 예전에는 신라 매금(임금)이 스스로 와서 조공하는 법이 없었는데 이제 국강상광개토경호태왕 때에 이르러 신라 매금이 스스로 와서 조공하고 복속 하였다. (해설) 위 비문징실 내용을 보면 왜 일제가 광개토태왕 비문을 조작하여 역사를 왜곡하려 했는지 그 이유를 알 수 있다. 일제의 조상인 왜가 식민지 조선의 조상인 광개토태왕에게 결국 항복하고 십중팔구는 죽었다는 기록을 가만히 내버려둘 리가 없었던 것이다. 일제에 의한 광개토태왕의 비문 조작은 이러한 이유로 행하여졌던 것이다.
    드라마 태왕사신기에서 아신왕이 광개토태왕에게 항복하는 장면 / 편집부

    비문의 글자를 변조한 곳에서 횟물이 흘러나오고 있다. / 편집부

    (14년 원문) 十四年 甲辰 而倭□□侵入帶方界 □□□□□石城□連船□□□ □□率□□□平穰□□□鋒相遇 王幢要截?刺倭寇潰敗 斬殺無數 (17년 원문) 十七年 丁未 敎遣步騎五萬□□□□□□□□□師□□合戰斬殺 蕩盡所 穫기鉀一萬餘領軍資器械不可稱數 還破<沙溝城><婁城><□□城><□城> <□□□□那□城> [번역] 영락 14년 갑진(404)에 왜가 대방(帶方)의 지경에 침입하였다. 왜는 석성에 배를 연결하여 (해독 불능) 왕은 친히 군사를 거느리고 나아가 이를 토벌하니 평양에서 예봉이 서로 마주쳤다. 왕의 군사가 들이쳐서 무찌르니 왜구가 무너져 패하였는데 목 베고 죽인 적이 헤아릴 수가 없었다. 영락 17년 정미(407)에 하교하여 보병과 기병 5만 명을 보내 (중간 해독 불능) 사방에서 합전하여 목 베고 죽여서 다 쓸어 없애니 노획한 투구와 갑옷이 1만여 벌이요 군수물자와 기계는 이루 헤아릴 수가 없었다. 군사를 돌이켜 다시 사구성, 누성, □□성, □□□□나□성을 쳐부수었다. (해설) 영락 10년(400) 광개토태왕에게 거국적으로 항복하면서 식민지가 되었던 왜구(倭寇)가 4년 후 14년(404) 다시 대방(帶方)에 침입하는 것으로 보인다. 위 비문에 기록된 대방은 유주(幽州)의 낙랑군(樂浪郡)에 속한 대방현으로 그 위치는 황하북부 하남성 제원시 부근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乐浪郡 낙랑군) 武帝元封三年开.莽曰乐鲜.属幽州(속유주).户六万二千八百一十二.口四十万六千七百四十八.有云鄣。县二十五:朝鲜(조선).讑邯.浿水(패수), 水西至增地入海。莽曰乐鲜亭。含资,带水西至带方入海。黏蝉,遂成(수성),增地,莽曰增土。带方(대방),驷望,海冥,莽曰海桓,列口,长岑,屯有,昭明, 高部都尉治。镂方,提奚,浑弥,吞列,分黎山,列水所出。西至黏蝉入海,行八百二十里。东暆,不而,东部都尉治。蚕台,华丽,邪头昧,前莫,夫租。
    패수는 황하북부 하남성 제원시를 흐르는 강. 이 부근에서 대방을 찾아야 한다. © 편집부

    Greatcorea     성훈 컬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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