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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개토호태왕릉은 원래 어디에 있었을까? (4부)

浮萍草 2013. 11. 18. 00:00
    산서성 남단 황하변에 있는 영락진과 영락궁
    (원문) 遝至十七世孫國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 二九登祚號爲永樂太王 恩澤□于皇天 威武振被四海 掃除□□庶 寧其業 國富民殷 五穀豊熟 昊天不弔 ?有九宴駕棄國 以甲寅年九月甘九日乙酉 遷就山陵 於是立碑銘記勳績以示後世焉 其辭曰 [번역] 대를 이어 17세손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에 이르렀다. 왕은 18세(391)에 즉위하여 영락태왕이라 일컬었다. 은혜는 하늘에 (미치고) 무위(武威)는 사해(四海)에 떨쳐졌다. 무리를 쓸어 없애 그 왕업을 평안하게 하니 나라가 부유해지고 백성들은 번성하였으며 오곡은 풍성하게 익었다. 하늘이 돌보지 아니하시어 잔치 때 거마 위에서 나라를 버리시었다. 갑인년(414) 9월 29일 을유일에 산릉(山陵)에 옮겨 모시고 비를 세워 글을 새겨 훈적을 기록하여 후세에 알린다. 내용은 이러하다. (해설) <삼국사기>에 의하면 광개토태왕은 19대왕으로 동명성왕(고주몽)의 13세손으로 기록되어 있고<태백일사>에 추모대제는 북부여 시조 해모수의 고손자로 기록되어 있다. 비문이 정확할 것이므로 <삼국사기>는 高句麗가 북부여를 계승했다는 사실을 숨기기 위해 고의로 북부여의 선조들과 고주몽의 혈연관계를 삭제한 것으로 보인다.
    중국과 일제식민사학은 고구리의 도읍 국내성을 압록강 북쪽 길림성 집안현으로 비정했다. 거기서 광개토호태왕의 비가 발견된 것이 결정적인 이유이다.
    / 편집부

    발견 당시의 호태왕비는 대석도 없이 민가 옆에 세워졌는데 발견 때까지 그 비가 있었다는 기록이 조선과 청나라 기록에 없는 이유는 무엇일까? / 편집부

    그리고 대한민국 국민 대부분은 현 길림성 집안에서 호태왕비가 발견되었다는 이유로 있는 근처에 있는 돌무덤을 광개토태왕의 태왕릉으로 알고 있는데 위 비문에 “산릉에 옮겨 모시고 비석을 세웠다”고 되어 있어 비석은 다른 곳에서 옮겨오고 태왕릉은 광개토태왕의 무덤이 아니라는 의혹이 든다. 왜냐하면 현재 비석과 태왕릉의 위치는 산릉이 아니고 평지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원래 있던 곳은 어디일까? ㆍ 1) 중국대륙 한복판에 있는 지명 ‘영락진’
    중국대륙 한가운데인 산서성 최남단 황하변 예성현(芮城縣)에 영락진(永樂鎭)이라는 지명이 있고 원래 이곳에는 영락궁(永樂宮)이 있었다. 영락진이란 지명이 언제 생겼는지 그 연혁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겠다. <중국고대지명대사전>에서의 설명은 다음과 같다. (번역) 영락현 : 후위에서 설치했다. 북주 때 북평고현으로 옮겨 다스렸기에 폐했다. 북주에서 설치했다. 황성현에 속했다. 당나라 때 황성현 동북 2리의 영고보를 영락현으로 설치했다. 송나라 때 진으로 했다. 산서성 영제현 동남 120리에 있다. <원화지> <환우기>에 모두 주나라가 영락현을 설치했고, 군으로 되지 않았다. <수지>에 영락군으로 된 것은 오기이다. (원문) 永乐县 : 后魏置,北周移治北平故县,而此城废,北周置,寻省,以地属黄城县,唐分黄城于县东北二里永固堡重置永乐县,宋省为镇,故城在今山西永济县东南一百 二十里,按《元和志》《寰宇记》皆云后周置永乐县,不去置郡,隋志作永乐郡,盖字之误也。 <중국고금지명대사전>에서의 영락현(永樂縣)에 대한 설명은 다음과 같다. (번역) 북주 때 치소로 황성현에 속했다. 당나라가 황성현의 동북 2리에 있는 영고보를 영락현으로 나누었다. 송 때 진으로 되고 고성은 산서성 영제현 동남 일백이십리에 있다. <환우기> 주 때 영락현이 되었고, 군으로 가진 않았다. 수지에 영락군으로 만들어졌고 盖자는 오기다. 한나라 때 북평현이라 했으며, 북위 때 (=장수태왕 때) 영락현으로 불렀다. 당 천보 원년(742년) 만성현으로 개칭했다. (원문) 后魏置,故城在今河北省满城县西北鱼条山下,北周移治北平故县,而此城废。后魏置,故治在今河北省徐水县西,后魏置,故治在今山西祁县东 辽置,为锦州治, 元省入州,即今辽宁省锦县治。 北周置,寻省,以地属黄城县,唐分黄城于县东北二里永固堡重置永乐县,宋省为镇,故城在今山西永济县东南一百二十里,按《元和志》 또한 <중국백과사전>에서는 영락현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번역) 동위 540년 북평현 서북 땅을 쪼개 영락현을 설치해 낙랑군에 속하게 해 치소로 했다. 북주 때 영락현을 창려군으로 했다가, 북주 때 북평고성으로 옮겨 다스렸다. 수 문제 3년(583) 창려군을 파하고 영락현을 이역주로 변경했다가 수양제 3년(607) 주를 파하고 상곡군으로 하고 영락현으로 거듭 다스렸다. 당 고조 4년(621) 영락현을 역주에 바꿔 속하게 했다. 천보 원년(742) 영락현을 만성현으로 처음 변경했다. (원문) 东魏兴和二年(540年)析北平县西北境,增置永乐县,属乐良郡,同时为郡治,北齐时,永乐县为昌黎郡郡治,北周时永乐县徙治于北平故城,隋开皇三年(583年) 罢昌黎郡,永乐县更隶易州,大业三年(607年)罢州为上谷郡,仍辖永乐县,唐武德四年(621年)永乐县改属易州,天宝元年(742年)永乐县始更名满城县。 위 중국자료에서 알 수 있듯이 영락현이란 지명은 북위(386~534) 때 최초로 설치했는데 이때가 바로 광개토태왕의 아들인 장수왕이 다스리던 시절이었다. 따라서 영락진이라는 지명은 고구리 광개토태왕과 관련이 있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또한 <중국고대지명대사전>에서의 “당나라 때 황성현 동북 2리의 영고보를 영락현으로 설치했다”는 문구에서 영락현은 광개토태왕의 능과 깊은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삼국사기>에는 광개토태왕을 어디에 모셨는지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고구리사초.략>에는 황산(黃山)에 조성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 황산(黃山)과 위 황성현(黃城縣)이 깊은 관련이 있을 것으로 보인다. 참고로 고국원제 13년(343년) 도읍을 동황성(東黃城)으로 옮겼는데 그곳이 영락현과 접한 황성(黃城)과도 관련이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산서성 서남단 황하변에 있는 영락진이라는 지명에 영락궁이 있었다. / 편집부
    ㆍ2) 영락궁(永樂宮)은 누구를 위한 건축물인가?
    산서성 운성시 예성현에 있는 영락궁(永樂宮)은 최초 예성현 서남쪽 황하변 영락진(永樂鎭)에 있었던 것을 현재 예성현으로 옮긴 것이다. 영락진은 한나라 때는 포판현(蒲坂縣), 당나라 때 영락현(永樂縣)이라고 한다. 이후 북송 때부터 현재의 지명으로 아직도 그대로 전해지고 있다. 과연 이 영락진이란 지명과 영락궁이란 건축물은 누구를 위한 것인가? 필자의 견해로는 광개토태왕의 능과 비석이 있던 곳으로 확정할 수는 없으나 아마 광개토태왕과 깊은 관련이 있는 건축물로 보인다. 고구려의 대막리지 연개소문의 무덤도 산서성 영락진 뒷산인 구봉산(九峰山)에 있다. * 광개토호태왕비가 옮겨졌다는 결정적인 문헌적 증거가 비문의 수묘인연호(守墓人煙戶)에 언급된 지명을 추적하다 보면 어느 지역인지가 나온다. 워낙 장문이라 그 때 다시 언급하기로 한다.
    원래 영락진에 있었던 영락궁은 분명 광개토호태왕과 깊은 관련이 있다. / 편집부

    영락궁 모형도 맨 뒤 본전 건물 뒤에 있는 무덤 / 편집부


    Greatcorea     성훈 컬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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