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타/구리ㆍ조선

광개토호태왕 비문의 염수(鹽水)는 어디인가? (5부)

浮萍草 2013. 11. 20. 00:00
    백제 아신왕이 고구리 광개토호태왕에게 항복한 곳은?
    (5년 원문) 永樂五年歲在乙未 王以□麗不□□□躬率往討 過富山負山至鹽水上破其□部□六七百營 牛馬群羊不可稱數 於是旋駕因過襄平道 東來□城 力城 北豊 □備□ 遊觀土境田獵而 [번역] 영락 5년 을미년(395)에 비려(碑麗)가 조공을 하지 않으므로 왕이 몸소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토벌하였다. 부산(富山)과 부산(負山)을 지나 염수(鹽水) 위에 이르러 그곳의 부족과 6~7백 군영을 깨뜨리니 소·말·양 떼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얻었다. 이곳에서 어가를 돌려 양평도(襄平道)를 지나 동래□성, 역성, 북풍성에서 땅의 경계를 보고 즐기면서 사냥을 했다. (해설) 비문에 있는 위 기록은 <삼국사기>에 없다보니 학계에서는 외면하고 있으나, <고구려사초.략>에는 “비리(卑離)가 점차 왕의 가르침을 어기기에 친히 파산(叵山) 부산(富山) 부산(負山)을 정벌하고 염수까지 이르면서 그들의 부락 700여 곳을 깨뜨렸고 소·말·돼지를 노획한 것이 만으로 셈이 되었다.”라고 기록 되어 있다. 비문의 비려(碑麗) 또는 <고구려사초.략>의 비리(卑離)는 <한서지리지>에 기록된 유주의 요서군에 속한 비여(肥如)현과 같은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비여현은 중국기록에 노룡(盧龍)현과 동일하다고 나타난다. 즉 비여는 비려나 비리의 이두식 문자 표기로 보아야 할 것이다. 아래 <한서지리지>에서 보듯이 요서군에 속한 고죽성이 있는 영지(令支)현은 현 산서성 운성시 영제(永齊)시 황하굴곡 지점이므로 그 근처에서 비여(=노룡)현을 찾아야 할 것이다. (辽西郡 요서군) 秦置。有小水四十八,并行三千四十六里。属幽州。户七万二千六百五十四,口三十五万二千三百二十五。县十四:且虑,有高庙。莽曰鉏虑。 海阳,龙鲜水东入封大水。封大水,缓虚水皆南入海。有盐官。新安平。夷水东入塞外。柳城,马首山在西南。参柳水北入海。西部都尉治。令支有孤竹城(고죽성이 있는 영지현)。莽曰令氏亭。肥如(비여=노룡),玄水东入濡水。濡水南入海阳。又有卢水,南入玄。莽曰肥而。宾从,莽曰勉武。交黎,渝水首受塞外, 南入海。东部都尉治。莽曰禽虏。阳乐,狐苏,唐就水至徒河入海。徒河,莽曰河福。文成,莽曰言虏。临渝,渝水首受白狼,东入塞外,又有侯水, 北入渝。莽曰冯德。絫。下官水南入海。又有揭石水、宾水,皆南入官。莽曰选武。 부산(富山)과 부산(負山)은 현재로서는 어디인지 정확하게 알 수는 없으나 같이 언급된 비여 염수 양평 등으로 미루어 보아 산서성 중남부 임분시 동쪽에 부산(浮山) 이라는 지명일 가능성이 크다고 하겠다. 위 비문에 언급된 염수(鹽水)는 산서성 남부 운성시에 있는 운성염지(運城鹽池)임이 100% 확실하다. 이곳은 동이족인 순임금의 무덤이 있는 곳이며 탁록(涿鹿)현이 있는 상곡군(上谷郡) 지역으로 치우천왕이 황제헌원과 싸워 항복을 받은 곳이기도 하다. 단재 신채호선생은“부산을 감숙성 서북쪽의 아랍선산(阿拉善山)이라 하였고 염수는 몽고지지에 의하면 소금기가 있는 호수나 강이 허다한데 아랍선산 아래에 길란태 (吉蘭泰)라는 염수가 있어 물가에 늘 2자 이상 6자 이하의 소금덩이가 응결된다고 하였으니 이로 미루어 보면 대개 광개토태왕의 발자취가 감숙성 서북에까지 미쳤음 을 알 수 있으니 이는 고구려 역사상의 유일한 원정이 될 것이다.”라고 <조선상고사>에 기고하였는데 잘못 비정한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고구려사초.략>의 기록에 따르면 5년 을미년(395년) 광개토태왕이 친히 염수까지 이른 때가 2월이며 비문에는 없으나 백제의 진무가 쳐들어와 태왕께서 직접 기병 7천을 몰아 패수의 북에서 8천여 급을 노획한 때가 8월이다. 불과 6개월 사이에 태왕의 친정이 두 번 있었다면 이 두 지역은 서로 가까운 곳에 위치하고 있었다고 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대규모 전쟁 그것도 황제가 친정하는 군대가 2월에 감숙성 서부에서 전투를 치루고 6개월 만인 8월에 하남성에서 전쟁을 치른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 이기 때문이다. 결론을 내리자면 산서성 남부에 있던 염수(운성염지)와 비여(노룡)는 원래는 번조선의 땅으로 조선오군(=한사군)의 땅이었다가 대무신태왕과 태조대왕 때 수복한 高句麗의 강역이었으나 고국원태왕 때 잃어버린 남쪽 영토였는데 광개토태왕이 이를 다시 회복한다는 말인 것이다. 그리고는 요동군에 있는 아래 양평을 거쳐 사냥하면서 돌아온다는 기록인 것이다. (辽东郡 요동군) 秦置。属幽州。户五万五千九百七十二,口二十七万二千五百三十九。县十八:襄平(양평)。有牧师官。莽曰昌平。新昌,无虑,西部都尉治。 望平,大辽水出塞外,南至安市入海。行千二百五十里。莽曰长说。房,候城,中部都尉治。辽队,莽曰顺睦。辽阳,大梁水西南至辽阳入辽。莽曰辽阴。险渎,居就, 室伪山,室伪水所出,北至襄平入梁也。高显,安市(안시),武次,东部都尉治。莽曰桓次。平郭,有铁官、盐官。西安平(서안평),莽曰北安平。文,莽曰文亭。 番汗,沛,水出塞外,西南入海。沓氏。
    <대청광여도> 산서성 남부에 그려진 광개토태왕의 염지 일대는 우리 고대사의 주 무대.

    산서성 남부 염지에서 소금을 생산하고 있는 모습 / 편집부

    (6년 원문) 百殘新羅舊是屬民 由來朝貢 而倭以辛卯年 不□□ 破百殘□□新羅以爲臣民. 以六年丙申 王躬率還軍討□殘 國軍□□首攻取, <壹八城><臼模盧城> <各模盧城><幹?利城><□□城><閣彌城><牟盧城><彌沙城><古舍?城><阿旦城 아단성><古利城><□利城><雜珍城><奧利城><勾牟城><古模耶羅城><莫鄒城> <□□城><□而耶羅城><於利城><農賣城><豆奴城><沸城><比利城><彌鄒城><也利城><大山韓城><掃加城><敦拔城><□□□城><婁賣城><散那城> <那旦城><細城><牟婁城><于婁城><蘇灰城><燕婁城><析支利城><巖門□城><林城><□□城><□□城><□利城><就鄒城><□拔城><古牟婁城><閏奴城><貫奴城> <□(曾)□(拔)城><□(宗)□(古)盧城><仇天城><□□□><□□> [번역] 백잔과 신라는 예전에는 속민으로 조공을 바쳐왔다. (선왕께서는) 신묘년(391)에 왜가 바다를 건너오자 쳐부수고 백제와 신라를 신민으로 삼았다. 영락 6년 병신년(396)에 왕이 다시 몸소 군사를 거느리고 백제의 잔적을 토벌하였다. 왕의 군사가 들이쳐 공격하여 다음의 성을 탈취하였다. 일팔성, 구모로성, 각모로성, 간저리성, □□성, 각미성, 모로성, 미사성, 고사조성, 아단성(阿旦城), 고리성, □리성, 잡진성, 오리성, 구모성, 고모야라성, 모추성, □□성, □이야라성, 탁성, 어리성, 농매성, 두노성, 비성, 비리성, 미추성, 야리성, 대산한성), 소가성, 돈발성, □□성, 누매성, 산나성, 나단성, 세성, 모루성, 우루성, 소회성, 연루성, 석지리성, 암문□성, 임성, □□성, □□성, □리성, 취추성, □발성, 고모루성, 윤노성, 관노성, 삼양성, 증발성, 종고로성, 구천성, □□성, □성 (원문) 其國城殘不服義敢出□戰 王威赫怒渡 阿利水遣刺迫城 橫兵□□□便國城 而殘王因逼獻□男女生口一千人細布千匹 □王自誓從今以後永爲奴客 太王恩赦先迷之愆錄其後順之誠 於是□五十八城村七百 將殘王弟幷大臣十人旋師還都 [번역] 그 도성의 백잔이 의에 굴복하지 아니하고 감히 나와서 싸웠다. 왕께서 대노하여 아리수(阿利水)를 건너 군사를 보내어 성을 들이쳤으며 일부 군사를 좌우로 보내 백제의 도읍을 (포위하니), 백제의 임금이 곤핍하여 남녀 포로 1천인과 세포 1천 필을 내어 바치었다. 또한 백제왕 스스로 복종을 맹세하여 “지금 이후로는 영원히 왕의 노객(永爲奴客)이 되겠습니다."고 하였다. 태왕이 앞서의 어리석은 과실을 용서하고, 나중에 귀순해온 정성을 녹훈하였다. 이리하여 58성과 촌락 7백 개를 얻었다. 그리고 백제왕의 동생과 대신 10인을 인질로 보낼 것을 약속 받고 군사를 돌이켜 돌아왔다. (해설) 위 비문에 기록된 모든 지명을 정확히 알 수는 없다. 그러나 <고구려사초.략>에는 “영락 5년 을미년(395) 8월 백제의 진무가 쳐들어와 태왕께서 직접 기병 7천을 몰아 패수의 북에서 8천여 급을 노획하였다.”는 기록과 “6년 병신(396년) 상이 몸소 수군을 이끌고 대방과 백제를 토벌하여 10여성을 함락시키고 그 동생을 인질로 잡아서 돌아왔다.”라고 기록이 대략적으로 어느 지역 에서 일어난 전쟁인지 알 수 있다. 유주의 낙랑군에 속한 패수(浿水)와 대방(帶方)이 나오는 것으로 보아 황하북부 하남성 일대임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아단성과 아리수는 당연히 그 부근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아단성(阿旦城)이 지금의 아차산(峨嵯山)이고 아리수(阿利水)가 한강이라는 강단사학계의 논리는 일고의 가치도 없는 이론이라 하겠다. (乐浪郡 낙랑군) 武帝元封三年开。莽曰乐鲜。属幽州(유주)。户六万二千八百一十二,口四十万六千七百四十八。有云鄣。县二十五:朝鲜(조선),讑邯,浿水 (패수),水西至增地入海。莽曰乐鲜亭。含资,带水西至带方入海。黏蝉,遂成(수성),增地,莽曰增土。带方(대방),驷望,海冥,莽曰海桓,列口,长岑,屯有, 昭明,高部都尉治。镂方,提奚,浑弥,吞列,分黎山,列水所出。西至黏蝉入海,行八百二十里。东暆,不而,东部都尉治。蚕台,华丽,邪头昧,前莫,夫租。
    낙랑군은 유주에 속하고, 패수현과 대방현은 낙랑군에 속한다. 패수는 황하와 심수 사이를 흐르는 강으로 취수라고도 불렸다. / 편집부

    고구리의 남쪽 경계 패수는 황하북부 하남성 제원시를 흐르는 강 / 편집부

    Greatcorea     성훈 컬럼니스트

     草浮
    印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