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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녕대군 탄핵" 시끄러운 政局, 여진<1433년 파저강 토벌> 토벌로 잠재우다

浮萍草 2013. 10. 27. 18:33
    세종 재위 중반부 맞은 조정
    조말생 재등용 논란에 후끈 明사신의 무리한 요구도 겹쳐
    마침 터진 여진의 국경 약탈 신료들에게 "토벌" 강력주장
    세종의 '프런티어 리더십'
    골치아픈 국내싸움 잠재우고 明 향해서도 나라 위신 세워
    국내문제 대외이슈로 전환한 제왕의 탁월한 리더십 돋보여
    박현모 세종리더십연구소 연구실장
    "세종실록 중에서 단 한 권만 고르라면 어떤 책이 좋을까요?" 몇 년 전 어느 분이 내게 한 말이다. 국역된 세종실록이 무려 28권이나 되어서 다 읽을 수는 없으니 한 권만이라도 자세히 읽고 싶다는 얘기였다. 나는 잠시 생각한 후에 자신 있게 세종실록 제9권을 내밀었다. 국역 세종실록 제9권은 세종 재위 14년째인 1432년 7월부터 그다음 해인 1433년 9월까지 치세를 기록한 책이다. 470여쪽에 이르는 이 책에는 세종 리더십의 정수(精髓)가 집약되어 있다. 도덕적 약점이 있지만 역법(曆法) 분야에 정통한 남계영을 발탁한'기단녹장(棄短錄長)의 인재 쓰기'를 비롯해서 경연(經筵)에서'말'과 '일'을 엮어가는 창의적 회의법 그리고"노인을 공경해야 나라 인심이 부드러워지고 안정된다"고 하여 경복궁 뜰에서 경로잔치를 베푸는 모습 등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정작 이 책을 세종실록의 압권(壓卷)으로 추천한 진짜 이유는 다른 데 있다. 그것은 재위 중반부에 들어서 정치적 관심이 인재 검증과 양녕대군 탄핵 등 국내 문제로 쏠리는 것을 북방 영토 개척이라는 대외 이슈로 전환해 내는 세종의'프런티어 리더십'을 읽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책의 초반부에 등장하는 대사헌 신개의'생대구 사건'은 그런 점에서 관심을 가져볼 부분이다. 강원도 고성의 최치라는 사람이 요즘의 검찰총장 격인 대사헌 신개에게 생대구 두 마리를 준 것이 뇌물이냐 아니냐를 둘러싸고 논란이 벌어지는데 신개는 "받은 일이 없다"며 강력히 부인했고, 이를 정치적 이슈로 확대했다.
    논란을 못마땅하게 본 세종은 그의 혐의 여부에 대해 일절 언급하지 않고 다만 "자리에 나아가 일을 보라"고 대응했다. 그런 소소한 문제로 국정의 에너지를 소모하는 게 옳지 않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세종은 신개 등 당시 새로 부상하는 신진 관료들의 인재관에 문제가 있다는 생각도 갖고 있었다. 신개는 그 당시 5품 이하 관리에게만 적용되는 서경(署經), 즉 사헌부와 사간원의 임명 동의 절차를 모든 관리로 확대하자는 운동을 펼치고 있었다. 하지만 세종이 보기에, 서경 범위를 그렇게 확대해 놓으면 국왕의 재량권이 크게 위축될뿐더러 오로지 도덕적 흠결 유무만으로 인재를 평가하게 되어 '유능하지만 깨끗하지 못한' 많은 인재를 못 쓰게 될 우려가 있었다.
    일러스트= 김성규 기자
    br> 그해(1432년) 연말 정국을 후끈 달아오르게 한 조말생 재등용 찬반 논란이 그 예다. 조말생은 병조판서로 재직하면서 노비 24명을 뇌물로 받고 인사 청탁을 들어준 죄로 파직되고 유배까지 갔다. 그런 그를 세종은 연말 인사에서 종2품 재상 격인 동지중추원사에 임명했다. 태종 때부터 외교 및 국방 문제를 맡아온 조말생이 '소 1만마리 요구 사건' 등 명나라를 상대로 한 예민한 외교 사안 및 여진족과 벌어진 국경 갈등을 풀어나갈 것으로 기대했다. 하지만 대사헌 신개는 "조말생은 장리(贓吏)의 대표 인물인데 개국 이래로 장물죄를 범한 자를 다시 썼다는 말을 듣지 못했다"면서 결사반대하고 나섰다. 그러자 세종은 "조말생이야말로 논어에 나오는 공자 제자 중에서 자로의 과감성과 자공의 달변을 겸한 인재"라면서 여러 가지 일이 복합적으로 얽혀 있는 함경도에는 "충성심과 성실함에서 뛰어나 능수능란하게 일 처리를 잘하는 조말생을 보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처럼 국가적 관심이'신상털기'에 쏠리고 중국 사신 윤봉의 무리한 요구와 온갖 추태로 온 나라가 짜증으로 넘치는 시점에서 여진족의 약탈 소식이 들려왔다. 보고를 들은 세종은 의정부 대신들과 병조판서를 긴급 소집했다. 세종은 '심히 노(怒)한 모습'으로 이번 기회에 여진족을 토벌해야 하지 않겠느냐고 물었다. 하지만 황희 등 신하 거의 대부분은 토벌을 반대했다. 압록강을 건너 중국 경내로 들어가야 하는데 자칫 심각한 외교적 문제가 발생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다음 날 세종은 다시 회의를 열어 여진족 토벌 문제를 의제로 상정했다. 이러한 세종의 모습은 그의 대외 정책 기조인 '조용한 외교'와는 다른 입장이었다. 세종은 "적국과 외환이 없으면 나라가 망한다"고 하여 재위 초반의 대마도 정벌처럼 대의(大義)로 결단하고 토벌해 적들로 하여금 두려워하는 마음을 갖게 하자고 강력히 주장했다. 결국 황희 정승의 생각도"치욕을 당하고 잠자코 있는 것은 불가하다"는 쪽으로 바뀌었고, 세종은 북정(北征)을 결정했다.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최윤덕이 지휘하는 총 1만5000여 토벌군은 그해 4월 19일 새벽에 일곱 방향으로 기습 공격해 9일간 전투 끝에 여진족 183명을 참살하고 248명을 생포했다. 책을 덮으면서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만약 세종이 이때 여진족 토벌을 하지 않았더라면 어떻게 됐을까? 여진족의 국경 침입과 약탈이 계속되었을 것이다. 명나라 사신이 우리를 얕잡아 보는 태도 역시 이어졌을 것이다. 무엇보다 양녕대군을 처단하고 조말생을 파직해야 한다는 민생과는 무관한 탄핵 정국으로 온 나라가 달궈졌을 것이다. 세종은 파저강 토벌로 이슈를 전환했고, 결과적으로 4군 6진 개척의 토대를 마련했다.
    Chosun Biz     박현모 세종리더십연구소 연구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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