萍 - 저장소 ㅁ ~ ㅇ/세종의 리더십

신하의 개혁案 받아들인 세종, 깔아뭉갠 선조

浮萍草 2013. 10. 27. 19:24
    인재 귀하게 쓴 세종
    허물이 있더라도 공적이 있으면 덮어주며 인재들을 끌어들여
    우유부단했던 선조 당파 중재자 역할한 이이, 선조의 냉담함 속에 政敵의 공격 와중 돌연 사망
    개혁안 실행됐더라면… 선조때 쏟아졌던 개혁안들 임금이 받아들였다면 임진왜란은 어떻게 됐을까
    박현모·한국형리더십개발원
    대표
    위 전반기의 선조실록 즉 선조(宣祖)가 왕위에 오른 1567년부터 임진왜란이 발발하기 전인 1591년까지 25년간의 기록은 가을 밤하늘 별처럼 화려하다. 길고도 변덕스러웠던 윤원형 척족 정권의 짜증 나는 정치를 지나 책 읽기를 좋아하고 신하들의 말에 귀 기울이는 16세의 젊은 군주 선조에게 사람들은 선망의 눈빛을 보냈다. 갓 즉위한 선조가 과거에 조광조를 제거하는 데 앞장섰던 남곤의 관작을 삭탈하자 조야(朝野)의 사림들은 드디어 역사를 바로 세울 때가 되었다며 궁궐을 올려다보았다. 권위주의 정권 시절 권력을 농단했던 자들에 대한 추상(秋霜) 같은 처벌 명령이 언제쯤 들려올지를 다들 발꿈치를 들고 기다렸다. 이 시기는 어둡고 안타까운 시절이었다. 세곡(稅穀) 운반선을 만드는 기술자들이 돈을 빼돌려 허술하게 만든 배가 파손되는 일이 반복됐다. '서해평 전투'에서 큰 공로를 세운 군졸에 대한 포상이 적시에 이뤄지지 않았으며 조정 재상까지 망라된 현직 관리의 뇌물 리스트가 발각되기도 했다. 무엇보다 사람들을 안타깝게 만든 것은 동인과 서인이라는 우리 역사 최초의 붕당이 출현했지만 민생을 외면한 채 상대방에 대한 공격을 일삼고 있다는 점이었다. 선조실록에서 새롭게 발견한 사실은, 붕당이 출현하는 데 정치 이념이나 정치적 이권 문제가 그리 크게 작용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나중에 우암 송시열은 동인과 서인 사이의 '군자-소인 논변'과 같은 정치 이념 요인을 강조했고, 성호 이익은 '밥그릇 싸움'에 비유하며 두 붕당 간의 관료 임명권 다툼을 강조했지만 선조실록은 그렇게 기록하고 있지 않다. 즉 나중에 서인의 대표 인물이 된 심의겸과 역시 나중에 동인의 대표 인물이 된 김효원의 갈등은 그 이전에도 흔히 찾아볼 수 있는 개인적 감정에 불과했고 따라서 붕당 내 구성원 사이의 결합력도 그리 강하지 않았다. 두 붕당의 관계를 악화시킨 것은 뜻밖에도 국왕 선조였다. 선조는 자신이 선왕의 적자가 아니라는 열등감 때문인지 언관들의 비판에 유독 예민하게 반응하고 대결적인 자세를 취했다. 그는 한번 결심한 사안에 대해서는 아무리 언관의 반대가 거세더라도 꺾지 않았다. 좌의정 박순을 체직하는 것이 잘못되었다고 사간원이 간언했지만 선조는 "이미 내가 결정했으니 번복할 수 없다"고 말했다. 명종 비 인순왕후가 사망했을 때도 자기만의 예법을 고수했다. 이러다 보니 선조와 언관들은 번번이 대립할 수밖에 없었다. 특히 동인 쪽 언관들은 왕 대신 왕의 총애를 받는 율곡을 맹공격했는데 이 와중에 곤경에 처한 율곡 이이가 갑작스럽게 사망하고 말았다. 49세 젊은 나이의 그를 죽게 만든 것은 아마도 '정치적 화병'이었던 듯하다.

    세종이 황희 등 인재들을 보호하고'허물이 있더라도 공적을 세우면 허물을 덮어주는' 방식으로 인재들을 끌어들인 것과 달리 선조는 인재를 귀하게 여길 줄 몰랐다. 선조는 이이, 기대승, 유성룡, 유희춘 같은 인재를 어전으로 불러서 대화하기를 즐겼다. 하지만 대화 자체로 끝났을 뿐 인재들의 말을 채택하는 데까지 나아가지 않았다. 지방 수령을 내보낼 때 반드시 친견(親見)하여 수령의 의미와 역할을 일러준 세종과 달리 선조가 직접 수령을 만나는 일은 없었다. 그리고 '파리 목숨 날리듯' 수령을 파직하곤 했다. 선조와 세종을 결정적으로 다르게 만든 것은 실행력 차이였다. 세종은 재위 초반 이른바'상왕 통치기'를 빼면 농업 생산력 증대, 과학기술 발전 북방 영토 개척 그리고 훈민정음 창제 등 여러 분야의 국가사업을'숙의(熟議) 이후에 전장(專掌)시키는 방식'(충분히 의논하고 난 다음에는 전적으로 맡기는)으로 뛰어난 실행력을 발휘했다. 이에 비해 선조는 신하들과 토론을 자주 벌였으나 거기서 나온 정책 아이디어들을 그냥 흘려버리곤 했다. 무너진 사회 기강을 바로잡을 방안으로 제시된 향약(鄕約)에 대해 선조는"주자도 어렵게 여겼다"면서 중지시켰고 이이가 민생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범정부 차원의 태스크포스인 경제사(經濟司)를 설치하자고 제안하자"폐단이 생길 수 있다"면서 거절했다. 관리들의 급여와 관청 유지비를 줄여 민생에 보탬이 되도록 인근 고을들을 병합하자는 의견에 대해 처음에는 찬성의 뜻을 밝혔지만 마지막에는 채택하지 않은 것도 선조의 우유부단함을 보여주는 예다. 동인과 서인의 팽팽한 대결 구도 속에서 중재자를 자처하던 율곡이 정적들의 파상 공격과 국왕 선조의 냉담함 속에서 정치적 희생양이 되어 죽는 모습은 마치 고대 그리스의 비극을 보는 듯한 느낌을 준다. 만약 그때 선조가 편파적 태도를 보이지 않고 신민의 기대와 젊은 선비들의 정치 에너지를 결집해 국가 개혁의 방향으로 이끌어 갔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나오지 않은 정책 제언이 없었다"고 평가받을 정도로 쏟아져 나온 개혁안을 제대로 실행했더라면 임진왜란은 또 어떻게 전개되었을까. 우리 역사 최고의 성군 세종과 최악의 왕 선조를 비교해 보면서, 지금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를 곰곰이 생각해 본다.
    Chosun Biz     박현모 세종리더십연구소 연구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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