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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 고려와 몽골

浮萍草 2013. 10. 13. 10:32
    11. 형제맹약 전말과 고몽전역(高蒙戰役)
    동성을 함락한 후인 3552년(서1219) 2월에 몽골장수들은 김 취려?조 충 등 고려장수들과 향천회맹(向天會盟)을 갖고 두 나라를 형제국의 관계로 규정하고자 했다. 그러나 회맹에 불만을 가진 고려장수들이 소극적인 태도를 보이자 몽골장수들은 고려조정을 직접 상대하려고 황도 개경으로 향했다. 뜻하지 않은 불청객들을 맞게 된 고려측에서는 일단 조정의 문무백관이 관대(冠帶)를 갖추고 좌우로 서서 영접했으나 몽골사신들은 고려국왕이 직접 영접하지 않았다 고 불평을 터뜨리며 말을 탄 채 대궐로 들어와서 고려인들을 놀라게 했다. 다음 날 고종을 알현할 때도 몽골사신 일행은 모두 융복(戎服)에 궁시(弓矢)까지 지니고 전상(殿上)에 올라가서 왕의 손을 잡고 문서를 전달했고 고종에게 배례 (拜禮)도 하지 않고 사례(私禮)와 읍(揖)만 했다. 몽골측의 그런 오만무례한 행동에 고려인들은 크게 반발했으나 승승장구하고 있는 몽골과 대립해서 좋을 게 없다는 현실적인 판단하에 일단 몽골측의 요구대로 형제지약(兄弟之約)을 맺고 동맹관계를 맺었다. 몽골로서는 금나라와 서하 등 서쪽의 나라들을 공략하기 위해서 후방을 안정시켜 놓고자 한 조처였고 그외에 전쟁에 소요되는 물자들을 산물이 풍부한 고려로부터 일정하게 공급받으려 한 목적도 있었다. 형제맹약 후에 몽골군은 신속히 철군하여 서쪽 공략에 총력을 기울였다. 고려로서는 일단 숨을 고를 수 있는 여유를 얻었으나 맹약후 반년이 지난 3552년(서1219) 9월에 몽골이 요구한 공물은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과중했기 때문에 몽골에 대한 반감도 크게 늘어 갔다. 칭기스칸은 고려와 화친정책을 시도했으나 몽골의 사신들은 흔히 매우 거만스러웠다. 3557년(서1224)에 파견된 몽골사신 저고여는 고종황제 앞에서 몹시 불경한 태도를 보이며 거만스럽게 공물을 강요했다. 고려조정의 모든 문무백관은 이에 분개하였고 곧 이어 온갖 거만을 떨다가 귀국하던 저고여가 의주부근에서 암살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그러나 당시 중원지방과 서역침공으로 인하여 여력이 없던 몽골은 확실한 경위를 알기 힘든 이 사건에 대하여 별다른 조치를 취할 수 없었고 단지 고려와의 국교를 우선 단절하는 형식적 조치로 만족할 수밖에 없었다. 비슷한 사건이 코라즘이나 그 외의 지역에서 발생했을 때 몽골이 취했던 즉각적이고도 무자비한 보복조치들을 염두에 둘 때 칭기스칸이 얼마나 이 사건에 대하여 신중하게 대처하고 있었는가 하는 점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칭기스칸이 고려에 대한 어떠한 조치도 취하지 못하고 사망한 후 그 뒤를 이은 오고타이는 금나라 정벌이 가까워져서 다소 군사적 여력이 생기자 3564년(서1231)에 마침내 유능한 부하장수인 살례탑에게 대군을 나누어 주고 고려침공을 명했다. 그러나 순식간에 고려를 휩쓸어 버릴 것으로 기대했던 살례탑 휘하의 몽골군은 고려의 입구에서부터 힘겨운 공방전을 치루지 않을 수 없었다. 특히 자주·구주·서경에서의 저항은 완강했는데 박 서 장군이 지키던 구주를 공략하던 몽골의 역전노장(아마 살례탑 자신이거나 그의 측근 지휘관인 듯 함)은, "이처럼 맹렬한 공격을 받고도 끝내 항복않는 예를 일찌기 보지 못하였다." 고 탄식을 발하였다. 전황이 장기화됨에 따라서 어렵지 않게 막아낼 수 있을 것으로 얕보았던 몽골이 생각보다 막강한 것을 알게 된 고려조정의 최 이가 3군을 보내어 몽골침략군의 지휘 부가 있는 안주를 공략했으나 오히려 몽골침략군에게 격파당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몽골침략군들은 이 승리를 전화위복의 기회로 삼아서 드디어 대거 남하하기 시작하여 부분적으로는 청주까지도 밀고 들어왔다. 그러나 특히 노비들이 자신들의 면천(免賤)을 위한 구국투쟁의 좋은 기회로 알고 맹렬히 싸웠던 고려의 저항은 몽골침략군들로서도 더 이상 감당하기 힘든 지경에 이르렀고 이 때 고려가 기회를 놓치지 않고 제의한 화친을 받아들여서 몇가지 공물들을 받기로 하고 돌아가기로 했다. 이 전쟁 당시에 충주에서 용감하게 싸웠던 노비들의 공로를 몇몇 얼빠진 상급관리들이 가로채려 했던 데서 불만이 폭발하여 노비반란이 일어났다. 노비들은 큰 공을 세워서 노비신분에서 해방되고자 했는데 그 희망이 수포로 돌아가게 되자 절망적인 반란을 시도했던 것이었다. 이 사건은 결국 이자성에 의한 평정으로 끝을 맺었으나 고려사회의 내부 모순이 이미 상당히 심화되어 가고 있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 준 사건이었다. 예상했던 것 보다 별 소득이 없었던 몽골침략자들은 고려에 대하여 점점 더 과중한 공물을 요구해 왔으므로 그에 대한 고려의 대답은 대몽항전밖에는 있을 수 없었다. 고종 19년(3565년,서1232) 1월에 몽골은 고려 경내에 72인의 다루하치를 두고 철군했으나, 고려측은 8월에 그들을 모두 살해하고 결사항쟁 태세로 돌입했다. 고려조정은 장기적인 전쟁수행을 위하여 같은 해에 강화도로 임시 천도할 것을 결정하고 전 국민에게 피난할 것과 항전태세를 갖추도록 통보하였다. 예상치 못한 고려의 강경한 대응조치에 놀란 몽골은 살례탑에게 다시 명하여 회군한지 7개월 만에 재차 침입해 왔는데 이 때 몽골침략군이 손쉽게 침입할 수 있었던 것은 서경의 역적 홍복원이 몽골침략군들에게 길안내를 해 준 때문이었다. 일단 서경이 함락되자 몽골침략군들은 다시 노도와 같이 남하했으나 대부분의 민가는 이미 피난 떠난 후였다. 남쪽으로 처인성(용인)까지 침략해 온 괴수 살례탑이 승려신분이던 김윤후의 화살에 맞아 죽자 몽골침략군은 간담히 서늘해져서 황급히 퇴각해 갔다. 이러한 패배는 몽골군이 대륙에서의 침략전쟁을 시작한 이래 일찌기 어느 곳에서도 별로 경험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러나 홍복원은 계속 서경을 장악하고 고려에 대들었으므로 고려 무신정권은 이들 반역자무리들을 토평해 버렸는데 반역자 홍복원은 몽골로 도망가서 몽골의 벼슬을 받고 요동에 부임하여 다시 몽골군을 고려침공에 끌어들이려는 매국노다운 추태를 연출하였다. 오고타이는 그러한 고려의 강경대응에 놀랐으나 우선 총력을 기울여서 금나라부터 마무리짓고 봐야 했으므로 아무런 즉각적인 대응도 할 수 없었다. 이윽고 남송과 동맹을 맺고 마침내 금을 함락시키는 데 성공함으로써 여력이 생긴 몽골는 즉시 그때까지의 동맹국이었던 남송을 총공격하기 시작하면서 다른 한 편 으로는 고려에 대해서도 대대적인 공략에 착수했다. 남송은 마치 '늑대가 물러가자 호랑이가 덮쳐온 꼴'이 되어 후회했으나 이미 때는 늦어 버렸다. 3568년(서1235), 드디어 몽골의 대군은 다시 고려에 침노해 들어왔다. 침략군의 괴수는 당올태였는데 매국노 홍복원은 이번에도 솔선해서 침략자들을 안내하였다. 그러나 고려는 정규전 대신 유격전술을 택했고 국민들은 대부분 산성이나 섬 등으로 피난한 후였으므로 몽골침략군은 전투다운 전투도 없이 가는 곳마다 방화와 약탈,저항자들에 대한 학살만행을 일삼으며 삼·사년간 무인지경인 양 설치고 다녔다. 환·단 이래로 계승되어 오던 인류의 귀중한 문화적 업적들이 이 때에 이르러서는 거의 남아나는 게 없을 지경이 되었다. 강화도에 천도까지 단행한 고려는 끝내 굴복하지 않고 끊임없이 끈질긴 유격전을 펼쳤으므로 몽골침략자들도 고전하기는 마찬가지여서 그 자신도 점차 피폐해져 갔다. 그러한 실정을 파악한 고려는 사신 김 보정을 몽골에 보내어 철병할 것을 요구하였다(고종 25년 겨울). 고려군의 끈질긴 유격전에 지쳐 있던 몽골로서도 더 이상 버티기 힘들었으므로 결국 고려황제가 몽골의 도읍으로 입조하라는 조건을 내걸고 철병했다. 고려는 몽골 을 무마하기 위해 다소간의 공물을 보내는 정도로 전쟁을 그치고 평화를 되찾았으나 수년간의 노략질에 의하여 국력은 많이 약해질 수밖에 없었다. 이 무렵 몽골 내부에서도 왕위계승문제를 둘러싸고 다소간의 내분상태가 야기되었으므로 대외정책에 있어서 효과적으로 대처하기가 힘들었다. 12. 몽골제국과 고려의 강화(講和)
    칭기스칸 사후인 3562년(서1229) 8월에 열린 마지막 쿠릴타이에 의하여 오고타이가 두번째의 가한(可汗:카칸)이 되었다. 오고타이의 정복전략은 크게 세 방향으로 나뉘었는데 무엇보다도 중원지방 정복 및 고려정복에 가장 역점을 두었으며 이미 점령한 페르시아 지역에 대해서는 공고한 지배권을 유지하고 마지막으로는 러시아 및 동유럽에 대한 정복완수가 목표였다. 유럽지방으로 진격한 몽골군은 3574년(서1241) 4월에 폴란드와 게르만의 연합기사단을 격파하고 다시 헝가리군까지 격파했으나 동유럽의 박토지대와 삼림지대에는 별로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 그에 따라서 몽골은 더 이상의 쓸 데 없는 영토확장보다는 점령지역에 대한 확고한 지배력 구축에 주력했다. 무엇보다도 몽골이 최우선적으로 탐낸 것은 중원지방이었으나 그에 못지 않게 총력을 기울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 고려에 대한 대책이었다. 고려는 당시 비록 외견상으로는 금나라의 우위를 인정하는 저자세 외교정책을 취하고 있었다고는 하지만 고려의 국력 특히 거란대군을 격파하고 여진을 정벌했던 고려 강군의 위력은 이미 주위 모든 나라들에 잘 알려져 있었다. 그러므로 칭기스칸은 고려를 섣불리 건드리는 것은 이로울 게 없다는 판단 하에, 가까운 고려보다도 서쪽의 공략하기 쉬운 목표들로부터 먼저 정복했던 것이다. 지역적으로는 광범위하게 자리 잡고 있었으나 대초원이나 중원지방의 여러 국가들은 군사력에 있어서 고려에 비할 바가 못되었다. 3584년(서1251) 몽골왕위에 오른 헌종왕(멍게 칸)은 혼란해졌던 왕실을 정리한 후 다시 대내적인 안정과 대외적인 확장정책을 강력히 추구해 갔다. 몽골의 판도확장은 너무나 단시일내에 이루어 졌으므로 그 확장된 판도를 몽골족의 자체 인원만으로 효과적으로 지배하기에는 몽골족의 인력이 절대적으로 부족 했다. 따라서 몽골은 각 점령지의 기존체제를 거의 대부분 그대로 유지시키면서 그 각 지방의 책임자만을 몽골족으로 임명하는 유목민제국들의 전통적인 방식을 채택했다. 광범위한 판도확장에 의해 효과적인 중앙통제가 사실상 불가능해 졌으므로 실제로 변경을 공략했던 책임자들은 거의 독자적인 판단과 지휘체제에 의하여 관할구역을 지배하게 되었다. 몽골헌종왕은 고려와 남송 정복을 가장 큰 과제로 삼았고 아울러서 서남아시아 지역에 대한 마무리 작업도 진행해 갔다. 몽골헌종왕은 우선 고려부터 복속시키고자 하여 즉위하자마자 고려 고종황제의 입조와 고려조정의 개경환도를 강요하였다. 그러나 거국적인 대몽항쟁을 필사적으로 수행하기로 한 고려가 그에 대하여 별 반응을 보이지 않았으므로 2년 후에 몽골장수 야굴과 반역자 홍복원이 대군을 이끌고 침노해 왔다. 고려국민들은 침략에 대비하여 이미 대부분 피난해 버렸기 때문에 몽골침략군들은 철원·양평·양양까지 노도와 같이 휩쓸고 남쪽으로 향했다. 그러나 충주성을 재차 공략하여 이전의 패배를 설욕하려던 몽골침략군들은 70여일에 걸친 대공격을 퍼부었으나 충주의 모든 고려인들이 용맹과 단합된 힘으로 죽음 을 각오하고 굳세게 버티었으므로 보급에 애로를 느끼게 된 야굴은 병까지 겹쳐서 총퇴각을 할 수밖에 없었다. 별다른 전과도 올리지 못하고 퇴각하던 야굴은 회군의 명분이라도 얻기 위하여 고려조정과의 회담을 제의했는데 고려에서는 강화도 맞은 편 해안에서 야굴의 사자를 접견하고 화의(和議)를 시작했다. 그 화의에서 몽골은 계속 고려황제의 입조를 주장했으나 고려는 황태자를 보내기로 하였으므로 몽골은 다시 침략해 왔다. 그러나 몽골장수 차라대와 반역자 홍복원이 이끌고 온 침략군은 5,000여명에 불과했으므로 충주와 상주에서 고려군에게 패하여 다시 퇴각해 갔다. 세번에 걸친 몽골 침략자들의 퇴각은 그 자체가 몽골군 전사상 전례가 드문 기록적인 것일 뿐만 아니라 고려로부터 아무런 굴복을 얻어내지 못했다는 점에 있어서도 세계적으로 유례를 찾을 수 없는 것이었다. 말하자면 몽골로서는 고려에 의하여 몹시 체면을 깎이는 창피를 당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따라서 다음 해인 고종 42년에 몽골침략군은 총력을 기울인 대침공을 다시 한 번 감행했다. 그처럼 대·소 7차례에 걸치는 야수적인 몽골침략자들의 노략질로 인하여 고려의 국토는 피폐화하였고 20여만 명에 달하는 고려의 청춘남녀들이 납치되어 가는 큰 손실까지 감수해야만 했다. 몽골침략자들은 어차피 잃어버릴 것은 목숨밖에 없었던 반면에 고려에는 수천년 전래되어 온 인류문명의 정수인 문화유산들이 역사상 처음으로 이 당시에 대부분 유실되는 비운을 맞게 되었다. 당나라 오랑캐들의 노략질 때에는 그래도 신라지방의 문화유산만큼은 보전될 수 있었지만 무지하기 한량없는 몽골침략자들의 분탕질에 의하여 수많은 위대한 인류 의 보물들이 잿더미로 변해 버렸던 것이다. 무려 30여년에 걸쳐 아구대륙(亞歐大陸)의 대정복자인 명실상부한 세계 최강대국 몽골에 굴복하지 않고 싸웠던 나라는 전 세계를 통털어서도 고려와 남송밖에 없었다. 고려에 대한 몽골의 마지막 대거 침략 5년 후인 3591년(서1258)에 몽골의 대병력은 바그다드와 시리아를 전면적으로 공격했다. 칼리프를 위시하여 바그다드에서 저항하던 수십만명의 이슬람교도들은 전원 학살당하는 비운에 처해졌고 일주일간에 걸친 대약탈이 지나간 후 바그다드에 남아 있는 것은 타다 남은 빈 껍데기 건물들 뿐이었다. 바그다드의 대학살을 전해 들은 시리아의 다마스커스에서는 무조건 항복을 하기로 하고 목숨을 건졌는데 그로 인하여 몽골군은 무혈입성의 기록을 한 번 더 보탤 수가 있었다. 아프리카와의 경계인 가자지구까지 일시 장악했던 몽골군은 이집트 지방으로 전진하려 했으나 더위에 익숙치 못한 몽골군은 작전을 수행하기가 어려웠다. 게다가 맘룩이 이끄는 투르크(터어키)계의 이슬람 대군이 몽골군을 공격해 오는 바람에 몽골군은 더 이상의 전진을 포기하고 시리아 이동의 페르시아지방으로 철수 해 갔다. 다윗왕의 부활이라고 굳게 믿었던 동방의 대왕(칭기스칸)이 이끄는 몽골군이 동유럽지방에서 기독교도 군사들을 참패시킨 것을 잘 알게 된 십자군은 자신들이 먼저 적으로 삼았었던 상대방이 이슬람교도들이었던 것을 잊어버리고 맘룩을 지원하기도 하였으나 맘룩은 몽골군을 저지했던 실력을 그대로 십자군에게도 발휘하여 십자군은 궁지에 빠지기도 했다. 서방변경이 이처럼 몽골군의 대학살과 약탈로 초토화되고 있을 무렵에 고려에서는 대몽항쟁의 주역이었던 무신정권의 마지막 집권자 최 의가 별장 김인준에 의하여 암살당하는 사건이 발생하여 60여년 간에 걸친 무신정권이 막을 내리게 되었다. 고종황제는 30여년간이나 계속된 대몽항쟁으로 고려국의 위신은 충분히 섰다고 판단함과 동시에 아구대륙의 대부분을 장악한 세계 최강대국 몽골의 세력과 무한정 다툰다는 것은 곧 세계를 상대로 싸우는 것 만큼이나 무모한 일이라고 판단하여 아쉬운대로 몽골과 강화를 맺기로 하였다. 그리하여 일단 몽골의 우위를 인정하여 몽골의 체면을 살려주면서도 국토와 인민을 보전하고 나중에 기회를 보아서 종주권을 완전히 되찾고자 하였다. 그 방법은 몽골의 종주권을 일단 인정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에 따라서 고려에서는 황태자와 사신 40여명을 몽골헌종왕에게 파견하여 형식상으로는 몽골을 종주국으로 대우해 주기로 하였으나 그 사이에 그렇게도 고려를 정복하려고 애를 태우던 몽골헌종왕은 고려의 사신들을 만나보지도 못한 채 사망하였다. 몽골왕실에서는 다시 왕위계승을 둘러싼 내분의 조짐이 보이게 되었다. 천하를 제패한 몽골로서도 끈질기게 항쟁하는 고려국을 손쉽게 정복할 가망이 없어 보이자 우선 (고려보다는) 비교적 손쉬울 것으로 생각된 남송부터 정벌해 버리기로 하여 쿠빌라이가 이끄는 몽골군의 주력은 양자강을 사이에 두고 남송군과 치열한 공방전을 벌이고 있었다. 쿠빌라이도 헌종왕이 죽자 자신이 몽골왕실을 장악하기 위하여 잠시 북쪽을 향하여 몽골도읍지 카라코룸으로 떠났는데 고려의 사신들은 마침 연경에 머무르고 있다가 상경하는 쿠빌라이를 만나게 되었다. 그리고 가장 유력한 몽골의 왕위계승자인 쿠빌라이에게 고려조정의 뜻을 전했다. 쿠빌라이는 이러한 뜻밖의 행운에 크게 놀라는 한 편"고려는 만리의 나라로서 당태종왕도 굴복시키지 못했는데 지금 고려황태자가 찾아 오니 이것은 하늘의 뜻이다‥ 지금 넓은 하늘 아래에서 몽골의 신하가 되지 않은 나라는 오직 그대들의 나라뿐이다." 하며 대단히 기뻐하였다. 몽골이 비록 초강대국이었으나 30여년간이나 굴복하지 않고 버티고 있던 고려를 내심 매우 두려워하고 골치를 앓고 있던 증거라고 볼 수 있다. 고려황태자 일행이 몽골로 떠난 지 2개월만에 대몽항쟁을 성공적으로 수행하여 배달민족의 정기를 만방에 크게 빛낸 고종의 붕어소식을 들은 황태자는 서둘러 귀국하여 즉위하였으니 이가 곧 원종황제였다. 같은 시간에 몽골의 쿠빌라이도 왕위에 올라 국호를 원(元)으로 고침과 함께 몽골의 도읍을 카라코룸에서 북경으로 천도코저 하였다. 그러나 몽골본토의 실력자들은 장성 남쪽으로의 천도를 달갑게 여기지 않았으므로 이 조치는 약 삼십여년간이나 쿠빌라이에 대한 반란을 발생하게 하는 큰 원인이 되었다. 몽골과 고려가 우호관계를 맺게 되자 쿠빌라이의 몽골군은 후방에 대한 우려를 덜고 대거 남송공격에 돌입했다. 고려와 남송은 그 당시까지 별 실효성도 없는 국교를 유지하고 있었으나 몽골로서는 두나라 사이의 관계가 가장 큰 위협이 되어 있었다. 내정의 문란까지 겹친 남송은 3608년(서1275) 3월 9일 정가주(丁家州)의 전투에서 백만대군으로도 몽골군의 공격을 당해내지 못하고 2,000여척의 병선이 궤멸당한 끝에 마침내 굴욕적인 숙질(叔姪)관계를 맺고, 몽골을 아저씨뻘되는 나라로 모시게 되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뿐으로, 몽골은 후환을 없애기 위하여 다시 대거 공세를 취함으로써 4년 후에 남송은 완전히 멸망해 버리고 말았다. 이로써 문명 인류세계의 중심부에서 온전하게 국민과 국권을 보존할 수 있었던 것은 오직 고려뿐이었다. 몽골군이 점령한 지역에서는 전적으로 몽골인이 우두머리로 임명되어 점령지를 통치했던 점을 보더라도 고려에 대한 몽골의 조처가 매우 파격적인 것임에는 틀림 없다. 비록 다소 불만스러운 조건하에서이긴 했지만 고려와 몽골과의 우호관계가 확실해지자 고려조정은 원종 11년 5월 23일에 개경으로 되돌아가기로 결정을 보았다. 그러나 몽골에 굴욕적인 대우를 받기를 거부한 고려의 일부저항 세력은 환도를 반대하고 최후까지 대몽항전을 수행하기 위하여 궐기했다. 삼별초의 반란으로 알려진 이 대대적인 귈기로 강화도를 장악한 용맹스러운 구국결사대 삼별초는 그러나 절대적인 병력부족으로 인한 중과부적으로 인하여 작전상 수차례에 걸쳐서 이동할 수밖에 없었다. 진도로 옮겨 간 삼별초는 몽골에 항거하는 남부지방의 민중들에게 호응을 얻어 전라도·경상도의 남부해안지대를 일시적으로 장악하는 위력을 과시했으나 다시 제주도로 옮겨 가서 최후의 항전을 시도한끝에 대부분의 용사들은 두려움없이 장렬한 최후를 마쳤다. 고려가 세계적 초강대세력 앞에 일시적으로 굴복하는 치욕을 당하기는 하였으나 삼별초의 궐기는 유구한 배달의 정의로운 투혼만은 엄연히 빛나고 있음을 과시한 일대 쾌거였다. 그리하여 고려의 모든 사람들에게는 그러한 삼별초의 장렬한 저항정신이 잊혀지지 않고 전해져 내려가게 되었다. 특히 몽골은 고려의 강성을 두려워 한 나머지 터무니없는 공물들과 처녀공출 등을 요구하는 무리한 약탈정책을 쉴 새 없이 강요했으므로 고려국민들은 몽골에 대하여 골수에 사무치는 한을 품고 와신상담하면서 설욕의 날만을 고대하며 속으로는 칼을 갈고 있었다.
    Pluskorea     안재세 역사전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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