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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 카타리파 절멸

浮萍草 2013. 12. 7. 12:44
    화형당하는 카타리파 © 편집부

    ㆍ6. 유럽지방의 암흑시대 1. 서유럽 중심부에서의 십자군광란 - 카타리파의 수난 자군광란이 한 차례의 고비를 넘겨가던 서기 12, 3세기경에 프랑스 남부의 알비죠아에서 소위 '이단자 탄압'이 시작되었다. 그로 인하여 이단으로 몰린 알비죠아파 신자 2만여명이 학살되었고 그 재산은 전부 몰수되었는데 이단자 사냥은 학살을 담당했던 자들에게는 매우 좋은 벌이가 되기도 했다. 약 30여년 간에 걸쳐서 알비겐스파의 혐의를 받은 100여만명 이상의 프랑스인이 광신적인 십자군에 의하여 학살당했는데 200여년 간에 걸쳤던 십자군광란 중에 살해된 유태인의 합계가 가장 많이 잡아도 10만여명 안팎이었던 데 비하여 이러한 기독교도들간의 대학살극에 의한 희생자 수는 매우 대조적인 숫자였다. 알비겐스파 기독교도들은 비국교도파(非國敎徒派) 프랑스 귀족들의 보호 하에 공개집회를 가지기도 했고 그들 자체의 성직자도 가졌던 독립적인 교회조직으로서 급격히 세력을 넓혀 갔으므로 이에 놀란 인노겐티우스 교왕이 남프랑스를 계속 자신이 관할하려고 성전을 선포했다. 기독교세계 내부의 십자군 소동에는 옥시타니아 이외의 거의 모든 프랑스 지역 영주들이나 기사들이 참여했음은 물론 흉악범들을 포함한 죄수들로 구성된 십자군도 있었는데 그들에게는 일정한 약탈행위도 허용되었고 40일간 동원된 후에는 모든 채무와 죄까지 사해주었으므로 아무런 양심의 가책도 받지 않고 악랄한 학살과 약탈을 자행하는 데 앞장섰다. 즉, 허가받은 학살극이었던 것이다. 카타리파는 십자군에 의하여 동방문화가 유럽지방으로 유입되고 고대 지식의 재발견이 이루어지던 시기에 개화(開花)했다. 카타리파는 카톨릭과 마찬가지로 예수를 존중했으나 육신으로서가 아니라'육신이 된 말씀'이자 '순수한 성령'으로 인식했다. 따라서 예수의 육신은 선신(善神)의 환영(幻影)이라고 보고 예수의 십자가 처형도 환영이었을 뿐이라고 하여 십자가 숭배를 우상숭배라고 거부하는 등 정통 카톨릭 과는 매우 다른 신앙체계를 가지고 있었다. 세상을 지선(至善)한 유일신의 창조물이 아닌 선신과 악신의 대립현장으로 파악하기도 했는데 선신은 정신적 영역으로서 인간의 영혼이 유래한 근원이면서 빛으로 충만해 있고 그노시스(gnosis;靈智)로써 인류를 구원해 주는 존재이며 악신은 물질적 영역으로서 육체적 생활을 지배하며 암흑과 재앙으로 가득 차서 육체적 재생을 (생식행위를 통하여) 거듭하게 한다고 믿었다. 카타리파의 창조론에서는 물질세계의 창조주이자 지배자인 악신이 진흙과 물로 인간의 육신을 만든 것으롤 보고 카톨릭은 악신인 창조주에 대한 숭배에 빠졌다고 비판했다. 카타리파는 옥시타니아의 일반 주민 중 다수를 개종시켰고 남서부 유럽지방 일대의 가장 강력한 귀족가문들로부터도 암묵적 지지를 받았다. 심지어 카타리파의 지도자들인 '완덕자'의 30%가 귀족 출신으로 알려져 있고 다른 신앙체계를 가진 카톨릭계 귀족들도 카타리파에 동정적이어서 서로 조화롭게 생활했다. 카타리파에는 숙련된 전문직 종사자들도 많이 참여했는데 국제적 조직을 가진 의류업자와 직조업자들도 다수 참여하여 신분을 위장한 채 대규모적인 선교활동을 하기도 했다. 그처럼 카타리파의 세력범위가 빠르게 확산되자 로마 카톨릭교회는 더 이상 방치하지 못하게 되어 카타리파 타도를 꾀하게 되었다. 카타리파를 제거하기 위한 유럽내부 십자군 운동의 발단은 옥시타니아에 파견된 교왕의 특사가 툴루즈 백작 레몽 6세를 파문한 데 반발한 레몽의 수하 기사가 서기 1208년 1월에 특사를 창으로 찔러 암살한 데서 시작되었다. 교왕은 그 해 3월 10일에 십자군 파견을 선언했는데 카톨릭교도들은 부와 지위와 면죄부를 얻으려고 대거 참여했다. 1년 후인 서기 1209년 6월 24일에는 십자군 2만명이 옥시타니아에 인접한 리용에 집결했고 시토 대수도원장 아르날이 총사령관에 임명되었다. 십자군에는 열렬한 카톨릭교도 이외엗 난폭한 유랑민들로 구성된 루티에(routier)라는 용병부대와 급료조차 받지 못하고 오로지 약탈만 노리는 리보드(ribaud)라는 집단도 있었다. 그들은 전리품 획득과 약탈을 주목적으로 그들은 대규모 살인강도단이나 마찬가지였고, 인정이나 양심같은 것은 애초에 없는 무시무시한 악마와 같은 무리들이었다. 이렇게 구성된 알비십자군은 가는 곳마다 대규모 학살·방화·파괴·약탈을 일삼고 옥시타니아 전 지역을 생지옥으로 만들어 갔는데 그런 만행은 지구를 악신이 창조한 지옥이라고 믿고 있던 카타리파의 신념에 정당성을 부여하기에 부족하지 않았다. 사로 잡혀 화형을 선고받은 카타리파 신도들은 그러한 지옥에서 벗어나게 된 것을 다행으로 여기며 기꺼이 자진해서 불붙은 장작더미속으로 자진해서 뛰어 들었다. 그리하여 서기 1209년부터 서기 1244년에 걸친 35년 간의 알비십자군에 의한 대규모 학살과 파괴행위로 인하여 카타리파는 유럽지방에서 종적을 감추게 되었다. 이 때 예루살렘에서 돌아 와 있던 성전기사단도 일부 동원되었으나 카타리파의 교리에 어느 정도 공감하고 있던 그들은 적극적 활동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로부터 수십년 후에 프랑스왕 필립 4세와 교왕 클레멘스 5세로부터의 탄압 구실을 주게 되었다.
    Pluskorea     안재세 역사전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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