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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 거란의 부흥운동

浮萍草 2013. 10. 7. 09:33
    10. 거란의 부흥운동
    진족의 영웅 아골타가 건립한 대금국과의 쟁패전에서 패한 후 대금국에 복속된 거란족은 점차 금의 지배층으로도 진출한 바 있었다. 
    그런데 뜻밖에도 몽골이 발흥하고 금의 세력이 약화되자 금나라 북쪽 변경의 천호(千戶)였던 야율유가(耶律留哥)가 거란국 재건을 추진했다. 
    그리고 그는 마침내 몽골태조 6년인 3544년(서1211)에 거란인들을 규합해서 금나라에 대해 반란을 일으켰다. 
    그는 다음 해인 3545년(서1212)에 몽골측에게 투항의사를 표시하고 원조를 구했는데, 몽골도 금과 서하를 상대로 전쟁중이었으므로 거란족의 반란을 환영하고 후원
    에도 열의를 보였다. 
    이에 힘을 얻은 야율유가는 지나지방 북부일대를 점거하고 대요수국(大遼收國)을 선포한 후 몽골태조 8년(3546년,서1213)에 자립하여 대요수국왕이 되었다.
    다음 해인 3547년(서1214)에는 몽골군에게 몰린 금나라가 도읍을 변경(卞京)으로 옮겼는데, 이 때부터 고려와는 연락이 두절되고 말았다. 
    거란족은 3548년(서1215)에 만주지방에 포선만노가 세운 대진국(大眞國) 군을 격파한 후 대진국 수도인 동경(요양부)을 함락했다. 
    그러나 거란족 내부적으로는 야율유가의 지도력 약화로 내분이 발생했고 반란군에 의하여 유명무실하게 된 야율유가는 바로 그 해 11월에 자신을 따르는 부하들과 
    함께 칭기스 칸에게 투항해버렸다. 
    이에 칭기스 칸은 다음해(3549년, 서1216) 여름에 투항한 거란병력에다가 몽골병력을 합세시켜서 거란반군을 공격하도록 했다. 
    칭기스 칸의 명령을 받은 몽골장수 무카리(木華黎)는 걸노(乞奴)가 이끄는 거란반군을 정벌하면서 요동지방까지 쳐들어갔다. 칭기스 칸은 점령지역을 둘로 나누어 
    요서지방은 무카리에게 요동지방은 야율유가에게 다스리도록 했다.
    막강한 몽골군에 밀린 거란잔당 수만명은 같은 해 8월 이후에는 고려의 변경에까지 몰려 왔는데 거란잔당의 수령인 금산은 고려측에 자신들이 머물 수 있는 땅과 
    식량을 요구했으나 거절당했다. 
    그러자 궁지에 몰린 거란잔당은 3550년(서1217) 봄에 고려경내로 대거 침공하여 황도 개경까지 위협한 후 동주(東州=철원)와 원주까지 쳐들어 왔다. 그러나 김 취려
    장군이 인솔하는 막강한 고려군은 대반격을 개시해서 거란군을 몰아내기 시작했으므로 낭패한 거란군은 대관령을 넘어서 동해안을 타고 북쪽으로 도주했고 일부는 
    여진지역으로 쫓겨가기도 했으나 일부 주력부대는 3551년(서1218) 9월에 평양동쪽 강동성(江東城)을 점거했다. 
    그런데 여기서도 거란군은 다시 내분이 일어나서 걸노는 금산에게, 금산은 통고여(統古與)에게 통고여는 다시 함사(喊舍)에게 살해당하는 등 자중지란이 일어났다. 
    한 편 금나라 무장이며 요동선무사였던 포선만노(蒲鮮萬奴)는 거란족이 대요수국을 세우는 등 금나라의 위세가 땅에 떨어지자 자신도 3548년(서1215)에 대진국을 
    세웠었으나 거란군에게 밀려 두만강 유역에 다시 동진국(東眞國)을 수립했다. 
    몽골은 동진국과 연합을 추진해서 3551년(서1218) 가을에 합진(合眞)과 찰자(札刺) 두 장군이 이끄는 몽골군과 완안자연(完顔子淵) 장군이 이끄는 동진군의 연합군이 
    고려의 동북면 쪽에 머물고 있던 거란족을 소탕하며 고려경내로 침투해 왔다.
    고려측에서는 단독적으로 거란잔당 문제를 해결하려 했는데도 몽골-동진 연합군은 거란의 최후 거점인 강동성을 공격하면서 고려 서북면 원수인 조 충(趙 )에게 
    군량과 원병을 요청했다. 
    고려측에서는 일단 거란잔당을 일소하는 데 상호협조한다는 의미에서 쌀 일천석과 정병 일천명을 파견하는 등 몽골측의 요구를 받아 들였는데 몽골측은 거기에서 
    더 나아가'몽골과 고려가 형제결연(兄弟結緣)을 하자'고 제안했다. 
    그러나 고려측에서는 스스로의 힘으로도 거란을 물리칠 수 있는데 몽골의 동생나라가 될 필요까지는 없다고 판단해서 맹약요구에 대한 결정을 미루기로 했다. 
    그러나 그 후로도 몽골의 형제맹약 요구는 집요하게 강요되었다.
    3552년(서1219) 정월에 마침내 몽골-동진 연합군과 병마사 김 취려 장군이 이끄는 고려의 정예군은 합세해서 강동성을 총공격하여 함락시켰다. 
    거란잔당은 대부분 몰살당했으나 포로가 된 거란인들도 적지 않아서 그들에 대한 처리가 새로운 문제로 부각되었다. 
    그리고 그 문제에 대해서 심사숙고한 고려측에서는 홍익인간의 도리에 맞게 큰 인정을 베풀어 그들에게 살 길을 마련해 주기로 했다. 
    즉 그들을 각 도의 주와 현에 나누어 보내서 인구가 적고 한적한 곳에 소규모로 집단 거주해서 농사짓고 살게 했던 것이다. 
    이른바 거란장(契丹場)이었다.
     거란족도 같은 배달민족의 한 갈래라는 인식이 그들을 고려국민으로 포용하는 일을 가능하게 했을 것으로 볼 수도 있다.
    
    Pluskorea     안재세 역사전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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