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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 셀죽터어키의 등장과 십자군 광란

浮萍草 2013. 9. 20. 21:38
    7. 셀죽·터어키의 등장과 십자군광란
    죽·터어키가 지중해의 강자로서 동로마(비잔틴)국을 누르고 등장하던 당시의 서유럽세계는 동양과 이슬람 세계에 비해 볼 때 형편없이 문명이 뒤떨어진 야만지역이나 다름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세유럽에 있어서 유럽만이 세계의 중심이자 세계의 전부라는 식의 독선적인 관념이 지배 하고 있었다. 어떻게 보면 자신의 열등감을 극복하려고 애쓰다 보니까, 거꾸로 자신만이 가장 잘났다고 억지로 우기며 다른 사람들을 맹목적으로 멸시함으로써 스스로의 자존심을 만족 시키려는 심리적 방어기전 같은 현상(즉 반동형성:反動形成 Reaction formation)이 기독교세계 전체를 지배한 것이다. 인류 역사는 가끔 엉뚱한 미신이나 맹목적 광신이 원인이 되어서 커다란 시행착오를 겪을 수도 있다는 사실들을 보여 주고 있다. 그 중에서도 가장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것이 바로 종교적 광신인데, 십자군 광란은 그러한 시행 착오들 중에서도 단연코 가장 특기 할만한 사건이다. 그리고 그러한 광란이 벌어질 수 있는 토대는 수백년간 기독교적 독선이 지배하고 있던 서유럽지역에서 이미 충분히 마련되고 있었다. 봉건제도가 확립되어감에 따라 교회와 봉건지배 계급들은 살쪄 가는 반면에 하층계급의 서민들은 거의 농노와 다름없는 지경에 떨어져서 가난과 비참속에 희망없는 삶을 이어가고 있었다. 또한 현실적으로 사회의 밑바닥을 헤맬 수밖에 없던 이들에게는 내세에서의 구원만이 유일한 희망으로 되어 갔다. 착취와 학대에 시달리는 민중에게는 언제 어디서나 구세주 사상이 퍼져들게 마련인데 이때도 예외가 될 수 없었다. 로마의 학정하에서 시달리던 하층 민중에 의하여 구세주 사상으로 받아들여졌던 기독교가 만들어 놓은 세계질서 속에서 민중이 다시 내세에 대한 희망밖에는 가질 게 없었다는 것은 기막힌 역설의 하나라고 할 수 있다. 당시에는 서기1,000년경에 말세가 올 것이라는 미신이 당연한 듯이 온 유럽을 휩쓸고 있었다. 그리고 거기에 덧붙여서‘기독교 성지 예루살렘에서 말세를 맞이하는 자들은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식의 낭설도 널리 퍼져 있었다. 그리하여 서유럽지방의 광신적인 기독교도들 중에서는 만리 가량이나 멀리 떨어진 낮선 예루살렘 땅으로 무작정 떠나가는 순례자들이 나타났다.
    예루살렘은 물론 북아프리카로부터 소아시아까지의 모든 지역을 장악해 오고 있던 이슬람교도들은 이러한 순례자들을 수많은 길손중의 일부로 간주했을 뿐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이슬람교의 성지로 확정된 아라비아반도 이외의 지역에 대해서는 어떠한 지방종교에 대해서도 간섭하지 않는다는 오마르 칼리프 이래의 전통에 따라서 기독교도들은 얼마든지 이슬람교도들 사이를 누비고 다닐 수 있었다. 단지 그들이 여행비용이나 숙박비나 음식값 등을 지불할 수 없을 때는 다른 종교를 가진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도덕적 법적인 책임을 질 수밖에 없었다. 많은 순례자들이 극도의 빈곤때문에 충분한 여비를 준비할 수 없었던 서유럽의 사회적 여건에 의하여 먼 외국땅인 이슬람세계에서의 순례행사에 따르는 경제적인 문제점이 발생할 소지는 이미 마련되어 있었던 것이다. 말세를 예루살렘에서 맞이하기 위하여 모여든 많은 기독교 순례자들의 기대와는 달리 서기 1,070년이 지나고 다시 수십년의 세월이 지나가도 말세는 오지 않았다. 이슬람교도 주민들은 여전히 활발한 무역거래 등을 통해서 번성하고 있었고 더구나 그 당시의 이슬람 문명은 최고의 전성기를 맞고 있었다. 뒤떨어진 유럽지방의 시골 구석구석에서 모여든 순례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자존심을 극도로 상하게 하는 것들 뿐이었다. 사탄은 이슬람교도들을 통해서 그들 가난한 기독교 순례자들을 조롱하는 것 같았고 사탄의 힘은 전세계를 뒤덮을 듯이 창궐하고 있는 것으로도 여겨졌다. 유럽인들은 세계의 중심도 아니었고 그들이 '이교도'들보다 더 훌륭한 생활을 하고 있는 것도 아니었으며 유럽지방에서 온 순례자들은 오히려 발전된 이슬람세계의 문명에 오로지 압도당할 뿐이었다. 극도의 열등감과 실망감에 휩싸인 기독교도들은 피해망상적인 반작용을 일으키게 되어 '이교도'들에 대하여 몹시 거만하고 얕보는 듯한 태도를 의식적으로 취하게 되었다. 자기들의 세계에 나그네로서 들어온 자들이 주인격인 자기들을 그처럼 멸시하는 태도를 보일 때 좋아할 사람은 인간사회 어디에도 없는 법이다. 이슬람교도들은 바보가 아니었으므로 이런 무례한 길손들에 대하여 같은 대접을 해 줄 수밖에 없었다.
    비잔틴왕 © 안재세
    오만한 기독교도들을 반겨 줄 곳은 사실은 기독교도들의 본거지인 서유럽에조차도 없었던 것이다. 국제정세에 어둡고 근거없는 선민의식에 사로 잡혀 있던 기독교 순례자들은 자신들이 이교도들로부터 부당한 대우를 당하고 있다는 피해의식에 사로잡히게 되었다. 기독교도들은 자신들이 이교도들로부터 조릉당하고 핍박받고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고 유럽으로 돌아간 순례자 들에 의하여 그러한 '피해망상증'이 급속히 전파되어 나간 결과 마침내 '이교도들에 의한 박해'는 널리 유럽지방의 전 기독교세계에 알려지게 되었다. 셀죽·터어키의 존재를 극도로 증오하고 있던 비잔틴왕 알렉시우스1세는 이런 미묘한 정세를 놓치지 않았다. 그는'이교도들에 의한 박해'에 관계된 여러 가지 헛소문들을 서유럽지역으로 광범위하게 퍼뜨려서 기독교도 들의 복수심을 부추겼을 뿐 아니라, 서기 1095년 3월에 이태리 반도 북부의 피아첸차에서 열린 공회의에서는 직접 '이교도들의 박해'에 대해서 보고했다. 비잔틴의 목적은 물론 서유럽의 기독교세력을 이용하여 셀죽·터어키의 후방을 교란하여 비잔틴 자신의 안전을 추구하자는 것이었으나, 로마교왕 우르반 2세는 그 나름대로 그 기회를 이용하여 억눌린 민중의 불만을 해결해 버리려고 하는 한편 더 나아가서 그 기회를 동·서 로마의 교회를 통합하려는 계기로 삼고자 했으므로 비잔틴왕의 의견에 별로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그리고 6개월 후에 프랑스 남부의 클레르몽에서 개최된 공회의에서는 우르반2세 자신이, "예루살렘으로 가는 순례자들이 셀죽 터어키인들에게 큰 박해를 받고 있다." "유럽은 가난하고 비참하지만 성지 예루살렘은 풍요롭다." 는 등의 연설로 선동에 앞장섰다. 뿐만 아니라 그는 각지에 선동사(煽動使)들을 파견하여 성지 예루살렘을 탈취하기 위한 성전(聖戰)의 필요성을 역설하게 했다. 선동사들은 서유럽의 구석구석까지 돌아다니면서 여러가지로 성전에의 참여를 독려했다. 그들은,"종군자의 가족, 재산은 교왕의 직접 보호를 받게 된다." "만일 성지에서 전사하는 자는 모든 죄를 용서받고 즉시 천국에 올라갈 수 있다." 는 등의 감언이설로 무지한 민중을 현혹시켰는데 거기에 덧붙여서,"성지주변에는 많은 보물들이 있다." "그곳의 여성들은 아주 매력적이다." 라고 하면서 장미빛 환상을 제공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러한 보물들에 관한 온갖 전설적 이야기들이야말로 수백년간 가난에 찌들리고 착취에 시달려 은 서유럽의 무지한 민중에게는 무엇보다도 구미가 당기는 이야기일 수밖에 없었다.

    십자군 침략전에의 참가를 부추기기 위하여 때로는 면죄부가 발급되기도 했다. 그 면죄부를 지니면 죄를 용서받는다는 미신으로 유혹한 것인데 면죄부의 판매는 그 후에도 교회의 수입을 올리는 수단으로 매우 자주 사용되었다. 그리하여 아무런 희망도 없이'가난과 비참'속에서 지내고 있던 유럽지방의 민중은 소위 십자군이 되기 위하여 각지에서 모여 들었다. 이로써 약 이백여년에 걸친 장구한 십자군 광란은 그 막을 열었으며 반문명적인 모든 요소를 구비했던 십자군 광란은 그후 십여차례나 거듭되었다. 더욱 기묘한 것은 십자군이 예루살렘으로 떠나기 전 이미 광란의 전주곡은 시작되어 모든 이교도들을 소탕한다는 명분으로'피의 제전'이라는 이름 아래 대규모적인 유태인 학살과 파괴가 마인츠·보름스 등지에서 벌어진 일이다. 기독교도 이외에는 그 누구도 생존을 보장받을 길이 없는 참담한 세계가 펼쳐졌던 것이다. 기독교도들은 '이교도'' 뿐만 아니라 마침내는 같은 기독교도 중에서도 자기와 견해가 다름으로 해서'이단자' 고 지목된 자들에 대해서도 무자비한 학살과 박해를 자행하는 광신적 열기에 점점 깊이 미쳐 돌아갔다. 첫번째 십자군이 비잔틴의 콘스탄티노플에 도착하자 비잔틴왕은 부당하게도 십자군을 마치 자기의 신하들처럼 대하였고 십자군이 탈취하는 영토들을 자기에게 바치도록 요구했다. 어이없는 요구에 십자군은 비잔틴군과 사이가 벌어져서 단독적으로 소아시아를 침공했으나 아나톨리아에서 셀죽·터어키군에게 완전히 괴멸당하는 참패를 당했다. 이에 자극받은 두번째의 십자군은 보다 철저하게 준비를 갖추고 다시 소아시아를 침공했는데 이번에는 비잔틴왕이 십자군에 의하여 탈취된 영토는 십자군에게 나누어주기로 약속했다. 십자군은 이에 더욱 사기가 높아져서 분전한 결과 터어키군을 격파하였고 온갖 약탈과 학살을 자행하며 전진하여 마침내 예루살렘까지 함락시키는데 성공했다. 예루살렘을 점령한 십자군의 잔인무도한 만행은 그 당시의 전선에 참가했던 남프랑스의 어느 성직자의'자랑스러운 기록'에 의하여 생생하게 전해져 오고 있다. "그곳에서는'감탄할 만한 광경' 전개되었다. 예루살렘의 큰 길이나 광장에는 사람의 머리와 팔·다리가 산더미를 이루고 있었다. 십자군 병사와 기사들은 시체를 헤치면서 나아갔다. 신전이나 복도들은 말을 탄 기사의 무릎이나 말고삐까지 붉게 물든 피바다였다‥ 그처럼 오랫동안 신에 대한 모독을 자행하던 무리가 더럽혀 온 이 장소를, 그들의 피로써 물들이기를 원하시는 신의 심판은 공정하고도 찬양할만하다." 십자가를 앞세우고 다니며 신을 찬양한다고 해서 악마가 천사가 되는 것은 아니다. 이러한 악마적인 대학살을'신의 이름' 로 자행한 가증스런 십자군의 살인마들은 곧 분노에 찬 이슬람군의 전면적인 대반격을 받고 궤멸되었다. 이들 십자군이 저주스러운 악마와 동일하게 여겨왔던'이교도'은 십자군 포로들을 학살하지 않았음은 물론 부상자들에 대한 치료에도 성의를 다했다. 이러한 전쟁의 미묘한 성격은 십자군광란 이백여년 간에 걸쳐서 거의 비슷하게 전개되었다. 이로써 어느 신이 과연 인간들에게 진정한 사랑을 가르치는 데 보다 더 성공했는가 하는 점은 명백해졌던 것이다. 십여차례에 걸친 광란극중에서 십자군은 단지 두차례에 걸쳐서 예루살렘을 장악할 수 있었을 뿐인데 이슬람군이 예루살렘을 장악했던 전 기간을 통해서도 기독교도 들의 성지순례는 허용되고 있었다. 기독교도들은 스스로 이슬람교도들에 대하여 직접적인 적대행위를 하지 않는 한에 있어서는 여전히 아무런 장애도 받지 않고 이슬람교도들의 세계에서 '순례' 고 다닐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한 관용성들은 서유럽에서 이교도가 아닌 같은 기독교 계통의 '이단자' 까지도 가차없이 탄압했던 명색뿐인 '사랑의 종교' 좋은 대조를 보여줄 수 있었다.

    오랜 십자군광란이 계속되는 동안 아시아에서는 대정복자 칭기스칸이 등장했다. 칭기스·칸의 공격목표는'중원지방''중앙아시아의 회교국가들' 었는데 회교국가에 대한 몽골군의 공격은 십자군에게 매우 기쁜 소식이 아닐 수 없었다. 십자군들은 '동방에 기독교도인 (새로운) 다욋왕이 나타나서 이교도들을 쳐부수고 있다'고 믿었고 교왕에게도 그렇게 보고했다. 마침내 페르시아 지방까지 장악한 몽골군이 이슬람을 지켜내려는 맘룩휘하 이슬람군의 거센 저항에 부딪치자 몽골군은 십자군에게 맘룩에 대한 협공을 제의하기 까지 했다, 기독교도들은 몽골군이 성지회복에 도움을 줄 것으로 생각은 했지만 적극적으로 응하지는 않았다. 서기 1221년에 교왕 오노리우스 3세가 프랑스 및 잉글랜드의 주교들에게 보낸 교서에서도 칭기스칸에 대한 기대감을 나타낸 바 있다. 그러나 몽골군은 기독교에 관심이 없었으므로,셀죽·터어키의 남은 세력을 소탕하자 이번에는 십자군에 대한 공격에 착수했다. 몽골군은 이슬람교도건 기독교도건 '평등하게'대우했으므로 이슬람세계가 겪었던 대참극은 십자군에게도 똑같이 가해졌다. 또한 몽골군은 러시아평원을 가로 질러 유럽지방에 대한 침공을 시도하기도 했다. 기독교 세계에 대한 몽골의 침공은 몽골 자신의 내부사정에 의하여 일단 철수했으므로 기독교도들은 잠시 한숨을 돌렸으나 약 20여년 후에 몽골장군 바투의 막강한 군대가 러시아와 헝가리 기사단 무사들을 차례로 격파하며 다시 침공했다. 기독교도들은 그때에 이르러서야 칭기스칸이 기독교도가 아니라는 사실을 확인하고 공포에 떨었으나 몽골군은 동유럽의 좋지 않은 기후와 풍토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으므로 기독교세계는 구제받을 수 있었다. 그리고 몽골에게 호의를 보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 교왕은 서기 1245년에는 플라노 카르피니(Plano Carpini) 등 사절단을 몽골에 보내기도 했다. 숱한 곡절을 간직했던 십자군광란은 서기 1291년에 이르러서 십자군의 마지막 거점 아르크가 함락됨으로써 마침내 그 종지부를 찍었다. 십자군광란 자체는 기독교 광신도들의 의도와는 달리 결국 실패로 돌아갔고 오히려 서유럽세계에 대하여 큰 반작용을 일으키게 되었다. 그 광란극을 계기로 이태리 반도에 있던 항구도시들은 공전의 호황을 누린 끝에 거대한 부를 축적할 수 있었다. 그들은 십자군의 운송을 담당하고 전쟁에 소모되는 막대한 전쟁 물자들을 조달하는 과정에서 천문학적 이윤을 남김으로써 십자군광란의 또 다른 모습을 보여주었다. 저들 도시들은 그 자체로서 강력한 국가체제를 갖추어 갔으며 그것을 본받아서 서유럽과 북부 유럽지방에는 많은 도시들이 커가기 시작했다. 제 4차 십자군때에는 이교도국가도 아닌 비잔틴왕국을 공격하여 대약탈을 감행하는 자중지란도 연출되었고 불과 7세∼16세 밖에 안되는 소년들만으로 십자군을 구성 했다가 그 소년들을 노예로 팔아 넘긴 적도 있었다. 도대체 십자군광란은 무엇을 위한 것이었는지 알 수가 없게 되었고 '전지전능한 신의 가호' 는 것에 대해서도 크게 의문이 생기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십자군광란이 지나간 후 교회에 대한 민중의 신뢰는 급속히 저하되어 간 반면에 봉건영주들을 효과적으로 동원하여 그들을 이용하는 데 성공했었던 각 나라 왕들의 실력은 크게 강화되어 교회의 권위에 도전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처럼 교회의 위신이 실추되자 교왕을 비롯한 교회당국자들은 쓰러져 가는 스스로의 권위를 다시 일으켜 세우려고 또 다른 광란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기독교세계의 존재의미 자체에 근본적인 의문을 제기할 수밖에 없는 대마녀광란이었다. 전투적인 측면에서의 기독교와 이슬람교 두 종교간의 도덕성의 차이는 이미 언급한 바와 같지만 십자군 병사와 이슬람 병사들간에는 여성들에 대한 태도에서도 명백한 차이를 보였다. 언필칭 '기사도'를 내 걸고 무척이나 여성들에 대하여 호의적으로 대했던 것처럼 알려져 온 서유럽의 병사들은 자기 처를 못 믿어서 정조대라는 무시무시한 중무장을 자기 처들에게 강요했던 반면에 여성들을 박대해서 여성들의 외출시에는 얼굴도 못 내밀게 '차도르'를 씌우는 등 여성들에 대한 남성들의 횡포가 극심한 것으로 알려 졌던 이슬람의 병사들은 자기 처들에게 단지'눈물단지'라는 작은 물병을 남겨 주었던 사실들은 두 사회의 인도적인 면에서의 우열을 보여주는 다른 하나의 예가 되기도 했다.
    Pluskorea     안재세 역사전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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