萍 - 저장소 ㅁ ~ ㅇ/왕실원당 이야기

38 내원암(下)

浮萍草 2013. 7. 2. 00:00
    조귀인, 팜므파탈의 모든 것 갖췄으나…
    ㆍ인조 치세 중 4차례 저주사건 통해 권력 독점 영원한 권력 위한 佛事…믿었던 효종에 뒤통수 조는 왜 이토록 깊이 조귀인에게 빠져들었던 것일까. 조귀인이 후궁으로 처음 책봉된 것은 1630년으로, 정묘호란이 발발한 지 3년이 지난 시점이었다. 그런데 1636년 병자호란이 발발한 후부터 조귀인이 연달아 자식들을 낳았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1637년 효명옹주가 탄생하고, 1639년에는 숭선군, 1641년에 낙선군이 태어났다. 병자호란 직후 2년 터울로 세 아이를 생산했다는 것은 인조가 그만큼 조귀인에게 푹 빠져 있었음을 보여준다. 두 번의 호란을 겪으면서 병적인 자괴감에 빠진 인조를 깊이 위로해준 이가 바로 조귀인이었던 것이다. 인조의 사랑을 독차지하게 된 조귀인은 온갖 음모와 술수를 통해 인조와 자신에게 거슬리는 인물들을 제거해 나갔다. 인조의 치세기간(1623~1649) 동안 궁중에서는 4번의 저주사건이 발생했다. 역사학자들은 4건의 저주사건 모두 조귀인이 벌인 자작극이라고 말한다. 인조 10년과 17년에 발발한 저주사건에서 주동자로 지목된 인물은 인목대비의 고명딸 정명공주였다. 인조반정의 막강한 명분을 제시한 인목대비는 국정에 종종 개입해 인조에게 압력을 행사 했는데 이를 견제하기 위해 정명공주에게 무고죄를 뒤집어씌운 것이었다. 네 번째 저주사건은 민회빈 강씨가 저주하는 주술을 행했다는 것이었다. 이 사건을 통해 강빈은 사사되었고 소현세자의 자식들은 모두 제주도로 유배되었다. 저주사건, 일명 무고(巫蠱)는 궁중에서 가장 자주 사용되는 공격수단이었다. 중국사에서도 황후가 폐위되는 경우는 십중팔구 무고사건에 연루되는 것이었다. 왕후를 더 이상 총애하지 않는다는 이유를 내세워 폐위할 수 없었던 왕들은 궁궐에서 금기시 하는 주술을 행했다는 이유를 내세워 왕비를 ‘깔끔하게’ 쫓아내었다. 네 번의 저주사건이 발발한 후 조귀인의 권력을 넘볼 수 있는 사람은 그 어디에도 없었다. 그리고 그 권세가 만세토록 계속될 줄 기대하고 있었다. 그의 권력이 최고정점에 있던 즈음 조귀인은 큰아들 숭선군의 혼사와 큰딸 효명옹주의 출합을 기념하기 위해 자신의 원당인 남양주 내원암에 대대적인 불사를 벌였다. 조귀인이 조성한 불상 안에는 효명옹주의 저고리와 사위 김세룡의 도포가 복장되었다. 조귀인은 이를 통해 딸의 앞날에 닥칠 재앙이나 위험이 모두 사라지기를 발원했다. 하지만 그의 소망은 2년도 채 지나지 않아 산산조각 나고 말았다. 조귀인의 지지를 받아 왕위에 오른 효종은 즉위 직후 조귀인과 효명옹주에게 무고죄를 뒤집어 씌웠다. 효명옹주가 효종을 폐위시키고 김세룡의 아비를 왕으로 만들기 위해 무고를 행했다는 것이었다. 이 사건으로 조귀인과 김세룡에게는 사약이 내려졌고, 효명옹주는 유배되었다. 호랑이 새끼를 고양이로 착각하는 바람에 자신이 키운 호랑이에게 죽임을 당하고 만 것이다. 조선후기를 대표하는 팜므파탈, 조귀인과 장희빈에게는 몇가지 공통점이 있다. 우선 어미가 노비라는 설이 있을 정도로 매우 미천한 신분이었던 점이다. 그녀들이 의지할 데라곤 자신의 미모와 그 미모에 빠진 임금의 사랑 밖에 없었고 오로지‘스스로의 노력’으로 최고 권력을 장악할 수 있었다. 두 번째는 집요한 권력욕이다. 조귀인과 장희빈이 권력을 키워가는 동안 수많은 인물들이 사화나 저주사건에 연루되었다. 자신의 욕망을 위해 조정에 피바람을 일으키는 것쯤은 이들에게는 그다지 대수로운 일이 아니었다. 마지막으로, 둘 다 무고에 연루되어 죽었다는 점이다. 이들이 정말로 궁궐 안에서 굿판을 벌이고 인형에다 저주를 퍼부었는지는 확인할 길이 없다. 하지만 가난하고 보잘 것 없는 집안에서 자란 그녀들이 왕의 사랑을 잃어버렸을 때 무고의 힘을 빌리는 것 말고 별다른 대안이 없었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 불교신문 Vol 2921호         탁효정 한국학중앙연구원 전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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