萍 - 저장소 ㅁ ~ ㅇ/왕실원당 이야기

39 자수원(下)

浮萍草 2013. 7. 4. 00:00
    현종이 억불정책 펼쳤다? 글쎄…
    비빈 출신 비구니 한 명도 없게 되자 인수원 등 도성 안 비구니원 폐쇄해 종 2년(1661) 인수원과 자수원이 폐사되었다. 두 비구니원을 폐사하라는 명이 떨어지자 당대의 고승 백곡처능은 <간폐석교소(諫廢釋敎疏)>를 올려 비구니원 폐사의 부당함을 역설했고 유학자 관료들은 현종을 성군(聖君)이라 치켜세우기에 바빴다. 인수원과 자수원은 조선전기 왕실 비빈들이 살던 인수궁과 자수궁을 각각 사찰로 개조한 곳이다. 선왕이 죽으면 그에 딸린 후궁과 궁인들은 별도의 궁에서 머무는 것이 관례였다. 조선전기까지만 해도 선왕의 후궁들이 비구니가 되는 것은 지극히 일반적인 일이었는데 태종과 세종, 문종이 죽은 직후 후궁들이 일제히 삭발염의를 했다. 머리를 깍지 않은 후궁이라 해도 궁방 안에다 불당을 차려놓고 조석예불을 올렸으니, 이들의 거처는 이름만 궁방이지 사실상 비구니사찰이었다. 인수궁과 자수궁은 점차 사대부가 여인들까지 받아들이면서 명실상부한 비구니 사찰로 변모해갔다. 임진왜란이 발발한 뒤 두 궁은 모두 불에 타 없어졌다. 하지만 왕실의 비구니들은 창덕궁 인근에 모여 살면서 왕실의 후원을 받아 절을 유지해갔다. 그런데 현종이 즉위한 직후 갑자기 두 비구니원을 폐사한 것이다. 오늘날 대부분의 학자들은 이 사건을 현종의 억불정책으로 해석한다. 현종이 비구니원을 폐사하고 원당 혁파령을 내렸을 뿐만 아니라 각종 토목공사에 승려들을 대거 동원하는 정책을 시행했는데 이는 불교를 억제하기 위한 억불정책의 일환이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두 비구니원이 폐사된 내막을 들여다보면 딱 잘라 억불정책이라 말하기가 어렵다. <현종실록>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나타난다. 왕이 말하기를 “궁중에 오래 전에 늙은 박 상궁(朴尙宮)이란 자가 있었는데 선조조에 은혜를 받은 후궁이었다. 늙어 의탁할 곳이 없자 머리를 깎고 비구니가 되어 자수원(慈壽院)에 나가 살기 수십 년이었는데 수년 전에 이미 죽었고 지금은 살고 있는 자가 없다”고 하였다. 여기에서 주목할 점은, 당시 인수원과 자수원에 왕실여성이 한명도 없었다는 것이다. 선조의 후궁이었던 박상궁이 마지막 왕실 비구니였는데 수년전 그가 죽은 후에는 비빈이나 궁녀 출신의 비구니가 단 한명도 없으므로 왕실에서 더 이상 두 비구니원 을 유지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 현종의 설명이었다. 현종대까지 인수원과 자수원은 왕실의 지원으로 운영되고 있었다. 두 비구니원은 도성 안에 존재하는 유일한 사찰이기도 했는데 승려들의 도성출입이 금지된 상황에서 도성 안에 사찰이 존재해온 것은 왕실 비빈들의 외호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런데 더 이상 왕실에서 출가자가 나오지 않게 되자 이곳에 왕실재정을 지급할 필요가 없다고 판단한 현종이 두 비구니원을 철거하기에 이른 것이다. 즉 현종은 이단인 불교를 믿으면 안 되기 때문에 절을 폐사한 것이 아니라 왕실의 출가자가 없기 때문에 폐사해야 한다고 판단한 것이다. 따라서 비구니원 폐사는 현종대에 이르러 억불정책이 강화되었음을 보여주는 사건이 아니라 조선후기에 이르러 왕실 내 불교신앙이 크게 변모했음을 보여주는 사건 인 것이다. 조선후기에 이르면 왕실의 불교신앙은 급격히 기복적인 성향을 보인다. 왕실 내에서 고승초청법석은 더이상 열리지 않았고 출가자도 나오지 않았던 반면 왕실 비빈들이 아들을 낳기 위해 설치하는 원당만 계속 늘어났다. 즉 구도(求道)적인 요소는 거의 사라지고 기복적인 성격만 나타나는 것이다. 그러다보니 왕실 내에 더 이상 비구니가 되려는 이도 궁궐 옆에 있던 사찰을 외호할 이도 없게 되면서 인수원과 자수원은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되었다. 그런데 흥미로운 사실은 왕실원당을 철폐했던 현종이 13년 뒤 직접 사액까지 내리면서 대대적으로 사찰을 창건한다는 것이다.
    ☞ 불교신문 Vol 2923 ☜        탁효정 한국학중앙연구원 전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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