浮 - 채마밭/푸드 이야기

자주먹는 '곰탕'과 '설렁탕', 차이점을 아시나요?

浮萍草 2013. 9. 28. 11:07
    '진국 곰탕'과 '고소한 설렁탕'
    탕과 설렁탕의 차이를 물어보면 얼른 답하기 쉽지 않다. 
    우리나라 음식문화사를 체계적으로 정리한 고 이성우 교수는 18세기 외국어 학습서를 인용 중국어나 몽골어에서 고기 삶은 국물을 의미하는 말‘공탕(空湯)’을 곰탕의
     어원으로 봤다. 
    또 공탕의 몽골어 말소리인 ‘슈루’가 설렁탕의 어원일 것으로 추정했다. 
    결국 곰탕(공탕)이나 설렁탕(슈루)이나 물에 고기 넣고 끊인 음식을 부르는 같은 말이라는 얘기다. 
    이를테면 생선이나 물고기나 같은 말인 셈이다. 
    그러니 그걸 자꾸만 구분해서 쓰려고 했던 것이 어쩌면 무리였는지 모른다. 
    ㆍ지금의 분류기준 인식은 1940년 처음 나타나
    일제강점기에 나온 소설이나 잡지, 조리서에는 설렁탕에 대한 언급이 많다. 1924년에 나온 현진건의 ‘운수좋은 날’의 비극적 설렁탕은 모두가 익히 아는 바다. 그런데 곰국(탕)에 대한 언급은 찾기 힘들다. 곰국(탕)과 설렁탕을 구별해 따로 언급한 조리서는 1940년에 나온 손정규의 ‘조선요리’가 처음이다. 곰국은 “사태, 쇠꼬리, 허파, 양, 곱창을 덩이째로 삶아 반숙되었을 때, 무우, 파를 넣고 간장을 조금 넣어 다시 삶는다. 무르도록 익으면 고기나 무우를 꺼내어 잘게 썰어 열즙(熱汁)에 넣고 호초(胡초)와 파를 넣는다”고 하였다. 설렁탕은 “우육(牛肉)의 잡육, 내장 등 소의 모든 부분의 잔부(殘部)를 뼈가 붙어 있는 그대로 하루쯤 곤다. 경성지방의 일품요리로서 값싸고 자양 있는 것이다.”고 하였다. 이 대목은 곰탕과 설렁탕의 차이점, 설렁탕의 지역 토착성을 설명하고 있다. 고기와 깔끔한 내장 등 비교적 고급 부위에 무를 넣고 끓인 것이 곰탕, 뼈와 잡고기나 그 밖의 내장을 넣고 오래 고아낸 것이 설렁탕이라는 것이다. 책의 설명에 따르면 요즘 우리가 알고 있는 곰탕이나 설렁탕과 큰 차이가 없다. 저자 역시 지금의 우리처럼 곰탕과 설렁탕을 별개로 인식했거나 구분의 필요성을 느꼈던 것 같다.
    ㆍ식민지 시대 경성 식당가 최고 메뉴였던 설렁탕
    책에서 언급한 대로 설렁탕은 지방색을 띠었다. 일제강점기에 설렁탕은 서울음식이라는 인상을 풍겼다. 살점을 발라낸 소뼈는 도살장이 있는 도시라면 어디나 다 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왜 서울에만 설렁탕이 성했을까? 소 한 마리 분량의 뼈와 잡고기를 한꺼번에 끓이면 엄청난 양이 될 것이다. 그 많은 양을 상하기 전에 팔려면 역시 짧은 시간에 소비해줄 손님이 많아야 했다. 그런 이유에서 설렁탕은 인구가 많았던 서울(경성)다운 음식이었다. 특히 빨리 간편하게 식사를 끝내고 일터로 돌아가야 하는 노임 근로자가 다수 상주했던 것도 큰 요인이었을 것이다. 게다가 설렁탕은 특정 지역 특산물이 아닌, 서울 인근에서도 쉽게 구할 수 있는 평범한 식재료를 사용하기 때문이기도 했을 것이다. 어쨌든 설렁탕은 지방에서 올라온 사람이라면 한 번쯤 맛보고 싶어하는 음식이었다. 하지만 서울다운 음식이라고 해서 고상한 음식 대접을 받은 건 아니었다. 지체 높은 사람들이 보기엔 도무지 근본 없는 상것들의 음식이었던 것이다. 그들의 눈에는 만드는 사람, 식재료로 쓰는 고기의 부위, 즐겨 먹는 사람이 두루 상스러워 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설렁탕의 인기는 식을 줄 몰랐다. 외식업 메뉴로서 현대적 요소를 갖췄기 때문이다. 일제강점기 이후 상업적 외식업소가 늘면서 설렁탕은 이에 적합한 메뉴였다. 가격이 저렴하고 먹기 편하고 맛이 좋은데다가 한끼 식사로 충분할 만큼 양이 많았다. 특히 술 먹고 난 뒤 먹으면 해장국으로서도 그만이었다. 요즘 말로 하면 가격대비 만족도가 이만한 음식이 달리 없었던 것이다. 점잔 빼는 나리들이 앞에서는 상스럽다고 타박하면서도 뒤로는 몰래 먹었을 정도였다. 처음에는 곰탕과 설렁탕의 의미 분화가 없었던 듯 하다.
    그런데 1950년대 이후 소의 사육두수가 급감하면서 소가 귀해졌다. 소 값이 오르니 서민음식이었던 설렁탕은 귀한 음식이 되었다. 푹 고아 만들었다는 의미와 ‘고음(膏飮)’이라는 보양적 이미지가 중첩된 ‘곰탕’이라는 이름이 자주 쓰였다. 식당들도 곰탕이라는 이름을 애용하면서 설렁탕과는 뭔가 다른 고급스런 보양식이라는 뉘앙스를 풍기려 애썼다.
    ㆍ캐주얼한 21세기 곰탕의 새 버전 ‘풍미곰탕’
    최근에는 사골과 뼈를 오래 고아 만들어 국물이 뽀얗게 우러난 것을 설렁탕, 양지와 사태 등 고기 위주로 끓여낸 것을 곰탕이라는 의미로 주로 쓴다. 그러나 업소에 따라 사용하는 재료나 조리법이 조금씩 달라 명확하게 가르기는 여전히 쉽지 않다. 서울 교대역 인근 <풍미연>이 최근 선보인 ‘풍미곰탕’(8000원)도 그런 범주에 속한다.
    풍미곰탕은 설렁탕과 곰탕의 육수를 반반씩 배합했다. ‘조선요리’의 설명대로 양지와 사태에 약간의 소머리와 양 등 소고기를 1차로 1~2시간 끓인 다음 대파, 무, 양파, 마늘 등 채소를 넣고 다시 끓여낸다. 끓여놓은 고기 국물의 잡내 제거와 단맛 가미를 위해 각종 채소를 넣고 다시 한 번 끓인다. 이렇게 채소로 조미한 곰탕 국물이 50% 들어가고 여기에 사골과 소뼈를 12시간 고아 만든 설렁탕 국물이 50% 들어간다. 소는 국내산 한우를 쓴다. 설렁탕은 상대적으로 고 연령층에서 선호한다. 대체로 무거운 맛이다. 젊은 층이나 새로 설렁탕을 먹으려는 사람에겐 접근하기 쉽지 않다. 이 집을 비롯해 다양한 버전의 곰탕이 생기는 것도 그런 연유에서다. 자꾸 변하는 사람들 입맛을 따라잡고자 좀 더 캐주얼한 곰탕(설렁탕)이 등장한다. 따라서 새로 나오는 탕은 기존 곰탕이나 설렁탕에 비해 맛이 부담 없고 편안한 느낌이 든다. ‘풍미곰탕’ 맛도 설렁탕이라고 하기엔 아주 맑은 편이고 곰탕이라고 하기엔 좀 뿌옇다. 맛도 곰탕 특유의 고기 육향과 설렁탕의 뼈 곤 고소한 맛을 동시에 음미할 수 있다. 여기에 고명도 푸짐한 편이다. 양지, 사태와 약간의 소머리 고기를 얹었다. 양지는 육수 만들 때 국물의 육향을 풍부하게 해주기도 하고 고명으로도 큰 구실을 한다. 탕을 담은 뚝배기가 커서 양이 푸짐해 성인 한끼 식사로 충분하다. 국물은 밑간을 했다. 소금과 간장을 역시 50:50 비율로 썼다. 사용하는 소금은 간수를 뺀 신안 소금을 볶아서 만들었다. 대체로 그냥 먹어도 될 0.3~0.4 정도 수준으로 염도를 맞췄다. 국물이 진해 실제 염도보다 체감염도가 더 짜게 느껴질 수 있다. 그래도 싱겁게 느낄 손님을 위해 식탁에 소금을 놓아두었다. 설렁탕 국물로는 새로운 맛을 내는 데 한계가 있다. 반면 곰탕 국물은 다른 부재료와 만나 다양한 맛을 창출해낸다. 설렁탕에 깍두기 국물이나 양념장(다대기)를 넣어 먹으면 뼈 국물 특유의 고소한 맛이 반감된다. 그러나 곰탕은 깍두기, 김치, 양념장 등 다른 부재료와 함께 하면 그 맛이 확장된다. 함께 내오는 겉절이김치와 깍두기도 국물과 아주 잘 어울린다. 주인장의 막내 시누이가 전북 부안군 곰소 에서 ‘우리젓갈’이라는 젓갈 업소를 운영하고 있다. 생산과정에서 화학조미료를 일체 넣지 않는다고 무조미료 갈치창액젓으로 만든 겉절이 김치는 뒷맛이 구수 하다. 깍두기는 짜지 않고 살짝 단맛이 감돌면서 적당히 익어 씹을수록 감칠맛이 난다. 설렁탕의 장점과 곰탕의 장점을 조합한 ‘풍미곰탕’은 기존 곰탕이나 설렁탕보다 무겁지 않다. 따라서 곰탕 설렁탕과 담쌓은 젊은이나 어린이도 친숙하게 접근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만추로 가는 길목이다. 온 가족이 둘러앉아 뜨끈한 곰탕 국물에 밥 말아먹으며 가을맞이를 해보는 것도 괜찮을 듯하다. <풍미곰탕> 서울시 서초구 서초동 1573-1 전화: 02-523-0641
    Food Chosun     글 이정훈, 사진 변귀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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