萍 - 저장소 ㅁ ~ ㅇ/왕실원당 이야기

47 용주사 - 하

浮萍草 2013. 9. 4. 10:09
    ‘국민성금’으로 용주사 세운 뜻은?
    정조, 범국민 참여 유도해 아버지 억울함 알리려 유교식 추존 한계…불교식 추숭으로 승화 시키다
    탁효정 한국학중앙연구원 전임연구원
    도세자가 뒤주에 갇혀 죽을 당시 정조의 나이는 11살이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그 아이가 영조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를 것이라고는 아무도 생각지 못했다. 하지만 신하들의 예상을 깨고 영조는 손자를 다시 불러들여 동궁으로 삼았다. 단, 여기에는 두 가지 조건이 붙었다. 첫째는 영조가 죽은 뒤에도 아비의 일을 들추지 않겠다는 것 둘째로 죽은 효장세자의 양자가 되어 대통을 이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효장세자는 영조의 후궁 정빈이씨의 소생으로, 사도세자의 배다른 형이었다. 아비의 죽음 그를 둘러싼 모든 사건을 목도한 정조는 그 기억들을 꽁꽁 묶어 마음 저편에 숨겨두었다. 그리고 15년간 그에 대해 입도 벙긋하지 않은 채 할아버지와 노론의 안심을 얻는데 성공했다. 1776년 3월 10일 영조가 세상을 떠난 지 6일 뒤 경희궁 숭정문에서 즉위식을 치른 정조는 대신들과 첫 대면한 자리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과인은 사도세자의 아들이다.” 온갖 음모와 살해위협을 감내하며 15년을 기다려온 정조는 드디어 가슴에 품고 있던 칼을 꺼내들었다. 가장 먼저 자신의 외가이자 노론의 핵심세력인 풍산홍씨 가문에 대한 복수가 시작됐다. 아비를 죽이자고 주청을 올린 외조부 홍봉한도 예외가 될 수 없었다.
    이어 자신의 아비에 대해 온갖 소문들을 전해 바친 노론 대신들과 동궁시절 침실에 자객까지 보낸 벽파들에 대한 숙청이 줄줄이 이어졌다. 이로써 아비의 복수는 일단락되었지만 그럼에도 정조는 아버지를 부왕(父王)이라 부를 수는 없었다. 정조는 영조의 명을 받들어 효장세자의 뒤를 잇는 형식으로 왕위에 즉위했고, 효장세자를 진종(眞宗)으로 추존하여 그의 위패를 종묘에 배향했다. 이와 함께 사도세자에 대한 추존도 진행시켰는데 장헌세자라는 시호를 내리고 그의 사당을 경모궁으로 추존시켰다. 하지만 여기까지가 끝이었다. 사도세자를 왕으로 추숭한다면 이는 자신의 종통을 부정하는 행위이자 영조에 대한 배반이었기 때문이다. 유교식으로는 더 이상 생부에 대한 추숭을 할 수 없었던 정조가 선택한 방법은 불교식 추숭 즉 원당의 설치였다. 정조는 1789년 현륭원을 화성으로 이전하고, 현륭원 바로 곁에 용주사를 세웠다. 정조는 이미 동궁 시절부터 의왕 청계사 금강산 신계사 등을 아버지의 원당으로 삼았는데 용주사의 창건은 그와는 비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정조는 용주사 창건을 위해 대국민 모금운동을 벌이기로 결심했다. 장흥 보림사의 보경스님에게 대화주승이 되어줄 것을 부탁했다. 보경 스님은 전국 방방곡곡을 찾아다니며 고위관료로부터 일반 백성에 이르기까지 전 국민들로부터 보시를 받아 용주사 창건기금을 마련했다. 보경스님의 지휘 아래 전국 팔도의 승려들이 화주승으로 참여했고 96명에 달하는 관료들이 물자조달에 동참했으며 8만7000냥에 달하는 보시금이 모아졌다. 용주사 불화는 당대 최고의 화가 김홍도가 감독했고, 용주사 경내에는 <부모은중경>을 판화로 새긴 그림들이 안치되었다. 정조가 왕실의 내탕금 대신 국민성금을 통해 용주사를 조성한 것은 신료들의 비난을 피하기 위함이기도 했지만 자신이 사도세자의 아들임을 천명하려는 정치적 의도 또한 강하게 내포돼 있었다. 생부의 원당을 짓는 일에 범국민적 참여를 유도함으로써‘떳떳한’ 아버지의 존재를 만천하에 드러낸 것이다. 여기에는“내 아버지는 정치적인 사건에 휘말려 무고하게 죽었다, 나는 죄인의 아들도 정신병자의 아들도 아니다”라는 의미 또한 담겨 있었다. 세상사람 모두가 미치광이라 손가락질 한 아버지 하지만 정조에게 사도세자는 평생토록 안타깝고 그립기만 한 아버지였다. 왕이 된 아들이 그 아버지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전 국민들이 아비의 억울한 죽음을 알아주고 함께 안타까워 해주기를 바라는 것밖에 없었다.
    ☞ 불교신문 Vol 2942         탁효정 한국학중앙연구원 전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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