萍 - 저장소 ㅁ ~ ㅇ/왕실원당 이야기

45 고운사

浮萍草 2013. 8. 21. 09:24
    왕의 환갑 축하 위해 불당을 짓다니…
    영조 기로소 입소 기념해 고운사에 원당 설치 유학자관료의 불교인식 변화 보여주는 한 단면 <조선왕조실록>에서 불교 관련 기사들을 읽다 보면 특이한 점이 한가지 발견된다. 조선전기까지만 해도 끊임없이 등장하던 불교 이단 논쟁이 조선후기에는 거의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조선전기에는 불교 이야기만 나왔다 하면 벌떼같이 달려들어“석씨(釋氏)의 도는 부모도 몰라보고 세상을 등지는 이단”이라고 야단법석을 벌이던 조정 대신들이, 성리학 교조주의가 한층 강화된 조선후기에 이르러서는 이단 논쟁 자체를 뚝 그쳐버린다. 왜 이런 현상이 나타났을까. 한창 박사논문을 쓰던 중 이 문제를 끌어안고 몇날을 끙끙 앓았던 적이 있다. 당시 필자가 ‘조선후기 지식인들의 불교인식’이라는 문제에 봉착한 이유는 조선후기에 갑자기 등장하는 ‘기로소원당(耆老所願堂)’ 때문이었다. 기로소는 정2품 이상의 관직을 역임한 문신들이 일흔이 넘으면 들어갈 수 있는 조선시대 최고위층들의 친목기구였다. 요즘으로 치면 장관 이상을 지낸 70세 이상 관료들의 사교클럽이었던 셈이다. 기로소에서는 왕과 함께 연회를 베풀며 회원끼리의 친목을 다졌기 때문에 조선시대 관리들은 기로소에 입소하는 자체를 매우 명예로운 일로 여겼다. 중국 당송대부터 조선에 이르기까지 기로소는 경로효친(敬老孝親)하는 유교정치, 즉 효치주의(孝治主義)를 상징하는 기구였다. 조선시대를 통틀어 기로소에 입소한 왕은 태조와 숙종, 영조, 고종 네 명에 불과했다. 27명의 왕 중에서 단 4명만 기로소에 입소한 것은 환갑을 넘도록 생존한 왕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왕의 기로소 입소는 국가적인 경사로 간주되곤 했다. 그런데 영조가 기로소에 입소하던 즈음에 갑자기 기로소원당이라는 사찰이 등장한다. 영조가 기로소에 입소한 것을 기념하기 위해 의성 고운사에 기로소봉안각(현재의 연수전)이라는 불당을 설치한 것이다. 유교적 효치주의에 기반한 기로소에 왕이 입소했는데 이를 기념하기 위해 사찰에 원당을 설치하다니 참으로 특이하면서도 이율배반적인 행위가 아닐 수 없다. 기로소원당은 사찰을 단순히 왕실원당으로 지정한 것만이 아니었다. 조정에서 돈과 물자를 내려 유교식 사당 형태의 건물을 짓고 왕의 어첩과 전패를 모셨으며 기로소의 대표가 직접 공문을 내려 가장 지체가 높은 승려를 원장과 판사로 각각 임명하고 원장과 판사가 직접 왕의 만수무강과 국가의 안녕을 발원할 것을 지시했다. 기로소원당은 왕을 상징하는 공간이었기 때문에 사찰 경내는 물론 금표 안의 산림에조차 일반인들의 출입이 엄격히 금지되었다. 기로소원당이 설치된 것은 영조와 고종대 두 차례로 1744년 영조가 기로소에 든 것을 기념해 의성 고운사에 연수전이 설치된 것이 최초이며,1902년 고종의 기로소 입소를 기념해 순천 송광사에 성수전이 설치된 것이 두 번째이다. 영조대 기로소원당의 설치는 조선후기 지식인의 불교에 대한 인식 변화를 보여주는 대목으로 풀이된다. 조선후기 사대부들은 학승들과 깊은 교유를 맺고 있었으며 대부분의 고승 비문은 당대 최고의 문장가로 꼽히는 유학자들에 의해 작성되었다. 또한 불교를 배척하기 위해 격렬히 이단논쟁을 벌이던 조선전기와 달리 조선후기에 들어서면 경제적으로나 사회적으로 불교를 일정부분 인정하고 불교계와 협력하는 분위기가 조성되고 있었다. 영조대 고운사에 설치된 기로소원당은 조선후기 사회에서 불교가 더 이상 배척 대상이 아닌 공존의 대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던 시대적 단면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 불교신문 Vol 2938         탁효정 한국학중앙연구원 전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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