萍 - 저장소 ㅁ ~ ㅇ/왕실원당 이야기

44 보광사

浮萍草 2013. 7. 31. 09:38
    ‘무수리 아들’, 영원한 주홍글씨
    콤플렉스 벗으려 평생 생모추숭 벌였지 뒤주에 아들 가둬 죽이는 병적 부성애 표출 조가 왕위에 오른 것은 기적에 가까운 사건이었다. 그는 왕비의 아들도 아니었고, 왕비가 아들로 삼은 왕자도 아니었다. 후궁의 아들이나 손자가 보위에 오른 경우는 영조 이전에도 종종 있었지만 무수리의 아들이 왕이 된 것은 전무후무한 일이었다. 이는 영조를 평생 쫓아다니는 주홍글씨이기도 했다. 영조가 재위한 직후 발발한 무신난(戊申亂 이인좌의 난)의 발문에는 영조의 즉위를 바라보는 당대 유학자들의 시각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다. 무신난 주동자들은“영조가 숙종의 아들이 아니라 노론의 영수 김춘택의 아들이고 독이 든 게장을 보내 경종을 독살했으며,무수리의 미천한 아들이므로 왕이 될 수 없다”고 주장했다. 무신난의 배경에는 정계에서 배제된 영호남 유생들의 불만이 내재돼 있었지만 또 한편으로는 궁궐의 여종이라 할 수 있는 무수리 소생이 왕으로 오른 데 대한 뿌리 깊은 무시와 경멸이 깔려 있었던 것 또한 사실이다. 숙빈 최씨는 무수리가 아니라 침방의 나인이었다는 설도 있고 무수리보다 조금 더 낮은 비자(婢子) 출신이었다는 설도 있다. 비자든, 무수리든 숙빈이 일반 궁녀들에 비해 훨씬 미천한 출신이었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숙빈이 궁궐에 들어온 것은 5세 때였다. 3세 때에 아비가 죽고 4살 때 어미마저 죽자 살길이 막막해져 결국 궁궐에 투탁된 것이다. 그 후 15년 뒤 우연히 숙종의 눈에 들어 명실상부한 ‘조선의 신데렐라’가 되었다. 숙빈은 1718년(숙종 44)에 세상을 떠났는데 그의 상장례는 당연히 유일한 아들 연잉군이 도맡았다. 하지만 후궁의 상례였기 때문에 많은 제약이 따랐고 자신의 의지대로 묘를 쓸 수도 장례를 화려하게 치를 수도 없었다. 결국 열흘 만에 간소한 형식으로 상례를 치렀는데 이는 영조에게 뿌리 깊은 한으로 남게 되었다. 영조는 왕위에 오른 후 숙빈을 추모하는 글을 지어 읽다가 신하들이 보는 앞에서 펑펑 운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땅을 치며 대성통곡을 하고, 어탁을 쾅쾅 치며 울부짖고 한번은 울다가 혼절을 한 적도 있었다. 이는 생모에 대한 그리움을 주체하지 못한 것이기도 했지만 자신의 미천한 출생을 감출 수 없다는 자괴감의 표현이기도 했다. 영조는 왕권이 어느 정도 구축된 재위 20년경부터 생모추숭사업에 착수했다. 우선 천한 신분이었던 외조부와 외증조부를 의정부 좌찬성 이조판서로 추증하고 숙빈의 묘호(廟號)를 육상궁 숙빈묘를 소령원으로 격상시켰다. 후궁의 사당과 묘를 궁(宮)과 원(園)으로 승격시킨 것은 숙빈이 처음이었다. 영조의 생모추숭사업에 걸린 기간이 장장 30년이었다. 영조는 왜 이토록 생모의 추숭에 열심이었을까. 그것은 바로 생모를 높이는 일이 바로 자신의 왕권강화와 직결되었기 때문이다. 또한 자신의 뿌리 깊은 콤플렉스를 극복하기 위한 처방책이기도 했다. 영조는 30년에 걸쳐 생모추숭에 열을 올리며 출생의 콤플렉스를 극복하기 위해 몸부림쳤지만 영조는 죽을 때까지 이 콤플렉스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의 콤플렉스는 유일한 아들 사도세자에 대한 엄격함과 기대의식으로 이어졌고 결국 자신의 성에 차지 않는 아들을 뒤주에 가둬 죽이는 병적인 부성애로 표출되었다. 한편 파주 보광사는 소령원의 원당으로 지정된 사찰이다. 영조는 숙빈묘를 소령원으로 승격시키면서 인근의 파주 보광사를 대대적으로 중창하고 보광사 경내에 숙빈의 위패를 모신 어실각을 조성했다. 이 절에는 왕실의 토지가 하사되었고 절 주변에는 금표가 설치되어, 숙빈최씨의 극락왕생을 발원하는 공간으로 재조성되었다. 지금까지도 보광사에는 영조가 조성한 어실각이 남아있다.
    ☞ 불교신문 Vol 2933         탁효정 한국학중앙연구원 전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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