萍 - 저장소 ㅁ ~ ㅇ/왕실원당 이야기

42 파계사와 화엄사(上)

浮萍草 2013. 7. 17. 14:10
    조선 최고 로비스트 ‘최 무수리’
    스마트함으로 숙종 사로잡은 숙빈최씨 ‘베개 밑 송사’로 정적을 일망타진하다
    빈 최씨는 ‘조선 최고의 로비스트’라 하기에 전혀 손색이 없는 여인이다. 야사에는 숙종이 어두운 밤에 촛불을 켜고 기도하던 최 무수리와 단 하룻밤 사고를 치는 바람에 영조를 만들었는데 그 다음날 일어나 보니 무수리가 너무 못생겨서 다시는 찾지 않았다고 전한다. 하지만 역사적 사실에 비추어볼 때 이 야사는 ‘천만의 말씀’이다. 숙빈 최씨는 1693년, 1694년 1695년에 연달아 아들 셋을 낳았다. 첫아들과 셋째아들은 요절하고, 유일하게 살아남은 아들이 연잉군(후일의 영조)이다. 숙종은 최씨를 봉빈하면서 별저(이현궁)를 마련해주었는데 현재의 혜화경찰서 자리이다. 이현궁은 숙종이 머물던 창덕궁에서 한걸음에 갈 수 있는 곳인데다 사대문 안에서도 ‘제일가는 저택’(甲第)으로 꼽히던 곳이었다. 숙종이 이현궁을 하사한 것만 보아도 숙빈에 대한 애정이 무척이나 각별했음을 알 수 있다. 얼굴도 예쁘지 않았던 무수리 출신의 최씨가 어떻게 왕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었을까. 게다가 당시에는 경국지색으로 꼽히던 장희빈이 왕비 자리에 떡하니 버티고 있었는데 말이다. 그것은 바로 숙빈 최씨가 매우 스마트한 여자였기 때문이었다.
    점잖기만 한 조강지처 인현왕후를 버리고 예쁘고 패악스러운 장희빈에게도 싫증날 무렵 숙종에게 다가온 여인은 총명하고 순발력이 뛰어난데다 나이까지 어린 최씨였다 숙빈 최씨는 다섯 살에 무수리로 궁중에 들어와 궁에서 유년시절을 모두 보냈다. 그래서 궁의 예법에 매우 익숙해 있었고 말이나 행동거지가 매우 조신하고 민첩했다. 그녀의 신도비에는 “천성이 신중하고 단정하여 기쁨과 분노를 얼굴에 나타내지 않았고 여러 궁인들을 접할 때는 겸손하고 화목하여 모두의 환심을 얻었다”고 기록돼 있다. 숙빈을 기록한 사료들은 거의 공통적으로 그녀의 성품을 겸손하고 신중했다고 말한다. 궁안에서 무수리로 잔뼈가 굵은 그녀가 겸손하고 눈치가 빨랐던 것은 한편으로는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녀의 공손한 모습 이면에는 무시무시한 정치적 수완이 도사리고 있었다. 노론과 남인이 번갈아 숙청을 당하던 당시의 혼란한 정국은 그녀를 당쟁의 한복판으로 끌어들였다. 숙빈 또한 라이벌 장희빈과의 한판 승부를 위해서 자신을 밀어줄 세력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상황이었다. 숙빈은 장희빈을 폐출하지 못해 안달이 난 노론들과 손을 잡았다. 1694년(숙종 20) 남인들이 정변을 준비한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숙빈은 그날 밤 자신의 처소를 찾은 숙종에게 눈물을 흘리며 남인들의 행태를 고발했고, 숙종의 마음을 180도 돌려놓았다. ‘ 베개 밑 송사’에 넘어간 숙종은 노론을 처벌하려 했던 마음을 고쳐먹고 도리어 남인들을 일망타진했다. 그 후 장희빈이 신당을 차려놓고 인현왕후를 저주했다는 이야기를 전해들은 숙종은 장희빈에게 사약을 내렸다. 이 풍문을 숙종에게 전한 이 또한 숙빈 최씨였다. <단암만록> 등의 사료에서는 갑술환국이나 장희빈의 옥사와 같은 커다란 정변의 배후에 항상 숙빈 최씨가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전하고 있다. 일련의 사건들을 통해 숙빈은 자신의 연적(戀敵) 장희빈과 정적(政敵) 남인을 동시에 제거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는 자신의 아들 연잉군이 왕위를 계승할 수 있는 터전이 되었다. 숙빈은 남자의 마음을 사로잡을 줄 아는 여자였다. 그녀는 숙종에게 무엇을 하라고 말하지 않았고, 숙종이 모든 일에 주도권을 잡게 하였으며 숙종에게 항상 긍정적이고 편한 상대가 되어 주었다. 엘렌 페인의 ‘남자의 마음을 사로잡는 35가지 법칙’ 중에서 숙빈에게 해당되지 않는 사항은 ‘첫 데이트에서 보통의 키스 이상을 넘지 않는다’는 항목밖에 없다.
    ☞ 불교신문 Vol 2929         탁효정 한국학중앙연구원 전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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