萍 - 저장소 ㅁ ~ ㅇ/왕실원당 이야기

41 봉국사 (下)

浮萍草 2013. 7. 10. 00:00
    ‘억불군주’, 요절한 공주 위해 절 짓다
    왕실원당 혁파하고 비구니원 철폐했던 현종 두 딸의 죽음 겪은 후 부처님께 무릎 꿇다 딸이 죽은 이듬해 명성왕후는 딸의 무덤 인근에 절을 창건했다. 현종은 이 절에 직접 사액을 내려 봉국사(奉國寺)라 명명하였다. 조선시대에는 사찰의 창건이 법적으로 금지돼 있었기 때문에 왕실이라 해도 절을 창건한 경우는 매우 드물었다. 더구나 조선후기에 이르러 왕이 절 이름까지 하사한 경우는 전후무후한 일이었다. 그런데 현종이 누구인가. 원당혁파령을 내리고 도성내 비구니원을 철폐해 억불군주를 자처했던 임금이 정작 자신의 두 딸이 죽은 후에는 절을 세우고 부처님께 딸의 명복을 부탁하고 있으니 절 받는 부처님도 기가 막힐 노릇이었을 것이다. 게다가 비구니원을 철폐한 후 현종을 성군이라 칭송하던 유학자 관료들 가운데 그 누구도 봉국사 창건을 반대하는 이가 없었다. 명선공주와 명혜공주처럼 후사없이 요절한 경우에는 사찰에 위패를 모시는 것이 조선시대의 일반적인 풍습이기도 했지만 제 아무리 심장이 딱딱한 관료라 하더라도 자식 둘을 연달아 잃은 왕 앞에서 ‘불교가 이단이니 어쩌니’ 하는 말을 차마 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더욱 흥미로운 일은, 절의 창건을 기념해‘봉국사신창기(奉國寺新創記)’를 쓴 스님이 백곡처능이라는 것이다. 현종에게 <간폐석교소>를 올려 “불교 좀 그만 괴롭히라”고 항의했던 스님이 현종의 죽은 딸들을 위해 직접 글을 지어 절에 봉안한 것이다. 두 딸이 죽고 난 후, 현종과 명성왕후에게 남은 자식은 숙종뿐이었다. 이때는 아직 막내딸 명안공주가 태어나기 전이었다. 나중의 일이지만, 명안공주 또한 스무 살의 나이로 요절하고 말았다. 숙종에 대한 명성왕후의 사랑은 일반적인 모성애를 훨씬 뛰어넘는 것이었다. 하나밖에 없는 아들인데다 누이들마저 모두 죽고 홀로 남은 외동아들이다 보니 금 가지에 옥 입사귀[金枝玉葉]도 이보다 더 귀할 수는 없을 지경이었다. 그런데 그 아들에게 처음으로 사랑하는 여인이 생겼는데 도대체 단 하나도 마음에 드는 구석이 없는 것이다. 금쪽같은 아들이 여자에게 푹 빠진 것도 눈꼴 사나운 노릇인데 하필이면 명성왕후 집안과는 정치적 대적관계에 있는 남인 집안의 여식에다가 그 어미가 노비인 아주 미천한 출신이었으니 명성왕후 입장에서는 그 어느 것 하나 마음에 드는 것이 없는 며느리였다. 그 며느리가 바로 ‘사랑에 살고 죽는’ 장옥정이다. 이 집안의 고부갈등은 이미 처음부터 예정돼 있던 수순이었다. 결국 명성왕후의 등쌀에 장옥정은 궁궐에서 쫓겨났고, 시어머니가 죽고 나서야 장옥정은 재입궐할 수 있었다. 명성왕후는 숙종 9년(1683) 12월 마흔 두 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명성왕후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아들에 대한 애착 때문이었다. 숙종이 이질에 걸려 사경을 헤매자 명성왕후는 무당을 불러 병을 고칠 방도가 없냐고 물었다. 무당은 “대비에게 삼재가 들어 왕이 아픈 것이니 김씨가 물벌을 서야만 아들의 병이 낫는다”고 하였다. 명성왕후는 무당이 일러주는 대로 삿갓을 쓰고 홑치마만 입은 채 물벼락을 맞으면서 “내 아들 대신 차라리 나를 아프게 해달라”고 빌었다. 12월의 엄동설한에 물벼락을 맞은 정성에 감동했는지 숙종의 병은 완전히 나았지만 김씨는 독감에 걸려 죽고 말았다. 명성왕후의 삶을 들여다보면 붓다가 자식에게 ‘라훌라[障碍]’라 이름 지은 심정이 백분 이해가 된다. 첫째와 둘째 딸은 너무 일찍 죽어 깊은 상처를 남기고 하나밖에 없는 아들은 요상한 여자를 궁에 들여 속을 끓이게 한 것도 모자라 병까지 들어 마음을 아프게 하고, 뒤늦게 낳은 딸마저 스무 살 되던 해에 요절하고 말았다. 열 손가락 깨물어 안 아픈 손가락 없다지만 어째 명성왕후에게는 하나같이 아픈 손가락만 있었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 불교신문 Vol 2927         탁효정 한국학중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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