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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당-거란-신라의 관계

浮萍草 2013. 7. 30. 10:00
    > 9. 당의 쇠퇴와 거란의 등장 진국은 이백여년간 비교적 평화로운 시절이 계속되어 해동성국(海東盛國)이라고 불리웠으며 난세에 시달리던 당나라 인민들이 동경하는 바가 되었다. 안록산의 난 이후에도 돌궐·토번?위구르 등의 끊임없는 침략에 시달리던 당나라의 인민들에게는 굳건하게 태평성대를 구가하는 대진국의 인민들이 부럽기만 했을 것 이다. 당나라는 점점 난세에 빠져들어 변방의 야심만만한 여러 부족들은 틈나는대로 중원지방에 세력을 확장해 들어갔다. 끝없는 전란과 함께 관리들의 부정부패와 가혹한 독재 착취에 시달리던 당나라의 농민들은 후일의 대규모로 폭동을 일으키기도 했는데 그 중에서도 '황소의 난'은 그 절정을 이루는 것이었다. 황소의 반란군은 곳곳에서 부패·무능한 관군을 격파하고 파죽지세로 진격하여 마침내 당의 수도인 장안까지 점거하는 위세를 과시했으나 워낙 오합지졸들의 집단에 불과했기 때문에 나중에는 지리멸렬하게 토멸당하고 말았다. 그러나 이로 인하여 당나라의 중앙정부는 쇠퇴일로를 걷게 되었고 거의 모든 통제기능을 상실해 가는 결과를 초래했다. 각 지방의 절도사들은 각각 왕처럼 군림하여 서로간에 쟁패전이 그치지 않았으므로 죽어나는 것은 죄없는 인민들뿐이었다. 오랜 세월동안 서요하(西遼河;시라무렌)를 중심으로 하는 열하 지방에 근거지를 두고 꾸준히 세력을 확장해 간 거란은 서쪽에서 크게 위세를 떨치고 있던 위구르족의 압력이 약해져 간 틈을 놓치지 않고 부족연합국가를 이룩했다. 거란족은 일찌기 흉노의 모돈선우에게 대패하여 선비산(鮮卑山)으로 숨어 들어갔던 동호의 후예인데 선비산에서 오랜동안 웅거하고 있었던 까닭으로 선비족으로도 불리웠다. 사백여년 간의 은둔생활을 지내어 가던 이들 선비족중에서 영웅 단석괴가 등장하여 숙적 흉노를 물리치고 몽골지방을 완전히 통일함으로써 선비족은 크게 그 세력을 확장하는 전성기를 맞이하게 되었다(2489년·서156). 대융성기를 맞았던 선비족은 그 후 우문(于文)·고막해(庫莫奚)·거란(契丹)등의 세 갈래로 크게 나뉘었다. 이들 중 거란은 본거지인 열하 지방에 대부분 남고 고막해는 몽골 지방으로 우문은 주로 지나지방으로 진출해 갔다. 이들도 크게 보면 모두 부여 계통의 조선족 일파로 알려지고 있다. 그러나 불안정한 유목생활과 삭막한 생존투쟁에 수백년간 익숙해져 온 결과 살벌하고 거친 근성이 저절로 배어 들어 틈만 보이면 인근 지역에 대한 약탈과 침략을 자행하는 대규모 마적단처럼 변해갔던 것이다. 고구려 소수림제 당시에 거란의 침공으로 고구려가 크게 당한 적이 있었으나 그 후 광개토대제가 천하를 통일하고 평정할 때 거란을 격파하였다. 그 후에도 거란은 돌궐의 공격으로 다시 약화되는 등 수십차례에 걸쳐서 흥망성패를 되풀이하다가 당태종왕과 함께 고구려를 침략하는 오랑캐 노릇을 하기도 하면서 영주지방에서 세력을 다져 갔다. 3048년(서715)경에는 당을 크게 위협하는 존재가 되어 당은 굴욕적인 정략 결혼과 뇌물등으로 간신히 거란족을 달래었다. 3084년(서751)에는 현종왕의 명령을 받은 안록산이 거란족 토벌에 나섰다가 오히려 대패함으로써 거란의 기세는 더욱 왕성해졌다. 이리하여 하북성지역을 거의 장악하다시피한 거란족중에서 영웅 야율아보기(옐뤼·아빠오지)가 등장하여 3234년(서901)에는 숙적이던 돌궐을 격파하고 돌궐족의 세력을 서역 멀리 밀어 내어 버렸다. 전 몽고 지방을 장악한 거란족은 다시 동쪽의 문명 대국인 대진국까지 넘보는 강자로 등장했다. 나아가서 3240년(서977)에는 마침내 거란국을 선포하고, 야율아보기가 스스로 그 첫번째의 왕이 되었다. 10. 신라의 번영과 쇠퇴
    지나지방의 야만족들과 손을 잡고 수차례에 걸쳐서 동족국가들을 협공하여 멸망시켜 버렸던 신라는 잠시동안은 삼국의 패권을 쥘 수 있었다. 그러나 신라의 통치 배들이 연합국으로 철석같이 믿었던 당오랑캐들이 신라마저 위협하게 되자 이번에는 자신들에 의하여 어이없게 멸망당했던 백제·고구려 등 유민 들의 힘을 빌어서 당오랑캐들을 물리치려 하였다. 고구려인들의 지칠줄 모르는 굳센 항쟁에 힘입어서 당오랑캐들을 북경지방 남쪽까지 몰아내는 데 성공한 신라는, 한 때 서쪽으로는 북경지방까지 북쪽으로는 길림 지역까지 장악할 수 있었다. 신라는 획득한 영토에 9주를 설치하고 각각의 지역에 도독을 두어서 통치했다. 그러나 고구려의 복국운동을 두려워한 신라의 통치배들이 고구려 망명정부를 해체해 버리고 고구려인들을 다시 탄압하기 시작하자 당오랑캐 축출에 다대한 회생을 무릅썼던 고구려인들은 격분하였다. 신라의 통치에 반기를 들고 나선 고구려인들의 가열한 투쟁에 밀려난 신라는 신라 성덕왕 35년(3069년,서736)경에는 대진국 무제의 대활약에 의하여 최종적으로 압록강이남으로 철수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신라가 온갖 권모술수와 외세를 악용한 무력적 수단으로써 삼국을 모두 병탄하려던 계획은 수포로 돌아가고 삼국은 다시 재편성된 채로 정립하는 결과가 되었다. 즉, 한반도에서는 신라가 왜열도에서는 백제의 망명세력이 난하이북·만주전역·연해주 및 흑룡강에 이르는 고구려의 고토에서는 대진국(후고구려)의 세력이 강력 하게 대두되어서 당을 비롯한 주위의 여러 야만세력들이 다시 숱한 내란과 전란의 소용돌이에 말려가는 동안에도 위풍당당하게 군림할 수 있었다. 신라는 외래 종교인 불교에 몹시 빠져들어간 결과 마침내 소위'불국사'라는 이름을 가진 대사찰을 비롯하여 크고 작은 수많은 사찰들을 전국 방방곡곡에 건립했다. 이는 마치 지나지방의 남북조시대에 양나라 무제가 수천개의 사찰을 건립했던 것과 비슷한 작태로써 이러한 대 건축사업이 일어날 때마다 결국은 민중들만 피폐 해져 가게 마련인 것이다. 마치 중세기의 유럽지방이나 마찬가지로 전국민이 불교에 심취하고 마취되어 있었으므로 민중도 불교의 창궐에는 큰 저항을 보이지 않았으나 왕족·귀족들의 권력과 재력이 급속히 증대해감에 따라서 부익부빈익빈의 말세적 풍조가 휩쓸기 시작했다. 이미 대토지 소유자로 등장한 각 지방의 귀족·호족들은 중앙정부의 명령에 잘 복종하지 않게 되었고 사찰의 건립 및 호족들의 권력유지를 위한 가렴주구가 심해 지면서 그와 비례하여 농토를 헐값에 팔아 넘기고 고향을 등지는 떠돌이 민중들의 무리가 늘어갔다. 깊어가는 사회적 모순을 해결할 수 있는 묘한 처방이 시급히 요구되고 있었던 것이다.
    Pluskorea     안재세 역사전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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