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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돌궐의 성장과 고구려 후예의 중원제패

浮萍草 2013. 7. 24. 00:00
    6. 돌궐의 성장과 셀죽·터어키
    록산의 반란이 실패로 돌아간 후에 돌궐은 세력을 회복하지 못하여 더 이상 동아시아에서 버틸 수가 없게 되었으므로 거란 및 위구르족의 세력확장과 
    때를 맞추어서 서쪽으로 대이동을 단행하게 되었다. 
    이들의 이동은 이전에 있었던 흉노족 대이동의 재판(再版)이나 다름 없었으며 후일의 칭기스·칸의 대 정복활동을 예고하는 것이기도 했다.
    위글족 오르콘 제국에 밀려난 돌궐일파 카를룩은 서쪽으로 타림분지와 카시가르를 지나서 천산산맥의 북쪽인 키르키스 지방에 다시 나라를 세웠는데 오르콘 제국이 
    멸망하자 다시 세력이 커지면서 동한국(東汗國)과 서한국(西汗國)으로 나뉘었다. 
    이 중 서한국은 아랍세력이 쇠퇴해 가던 이란지방과 맞닿게 되어 이란인이 세운 이슬람 왕조인 사마니드 왕조(서875 건설)와 대치하면서 이란인들과 마찬가지로 
    점차 이슬람국가로 변신해 갔고 곧이어서 동한국도 마찬가지로 점차 이슬람화해 갔다.
    3294년(서961)에 서한국이 동한국을 공략하자 사마니드 왕조는 서한국을 지원했는데 3300년대(서990년대)에 사마니드 왕조가 쇠퇴해지자 신흥 돌궐제국인 카라카
    니드(동서 한국의 통일국가)와 아프가니스탄 지방의 가즈나비드에 의해 멸망당했다. 
    가즈나비드와 후일의 셀죽 투르크는 카라카니드의 내분을 틈타서 세력을 확장했으며 서기 11세기 중엽에 이르러서는 셀죽 투르크 제국이 수립되어 이란지방을 본격
    적으로 공략해서 지배하게 되었다.
    돌궐제국 멸망후 아랄해와 카스피해 중간지역에 돌궐계의 여러 부족이 오구즈 부족연맹을 이루면서 볼가강 유역까지 세력을 확장했다. 
    연맹의 군주(야브구)에게 속한 장군들중에 두칵과 그의 아들 셀죽이 있었는데 서기 11세기 초에 셀죽의 집안과 야브구 사이에 분란이 생겨서 셀죽가(家)는 시르 
    다리야강 입구인 쟌드로 피신한 후 이슬람으로 개종하고 독자적인 나라를 세웠다. 
    셀죽 투르크는 가즈나비드의 지배력이 약해진 쿠라싼 지역을 공략했는데 니샤푸르와 메르브와 헤라트 등 인근의 큰 도시세력들이 셀죽 투르크에 자진해서 항복
    함으로써 크게 성장했다. 
    셀죽은 3373년(서1040)에 단단칸 부근에서 벌어진 가즈나비드와의 대회전에서 완전히 승리하여 중앙아시아 서쪽지역을 판도로 하는 대제국으로 발전했다. 
    이슬람으로 개종한 셀죽가는 바그다드의 칼리크가와 혼인관계를 맺으며 더욱 세력을 확장하여 말릭 샤(3405∼3425,서1072∼1092)의 통치기간중에 최성기를 맞았다. 
    계승권을 둘러싼 내분은 자주 일어났으나 말릭 샤는 강력한 통치력으로 카라카니드와 가즈나비드를 공략해서 영토를 확장하는 등 더욱 세력을 확장해 갔다. 
    그러나 말릭 샤의 사망후에 계승권 문제로 분열의 조짐이 커지는 한 편 북쪽에 다른 돌궐계가 코라즘 제국을 만들고, 동쪽에서는 거란계인 카라키타이가 세력을 확장
    해서 압박해 오는 등 복잡한 양상을 띄게 되었다. 
    셀죽 투르크는 실제적으로 여러 작은 공국(公國)들로 분열되어 연합한 형태로 존속되었다.
    돌궐족은 사라센의 종교적 전통을 인정하는 길만이 장구하게 그들에 대한 지배력을 행사할 수 있는 길이라는 점을 재빨리 간파하고는 어렵지 않게 그들 자신의 종교
    로서 이슬람교를 받아들였다. 
    이에 의하여 그들은 오히려 새로운 정복자로서 아무 이질감없이 받아들여질 수 있었다. 
    왜냐하면 이슬람세계라는 것은 뚜렷한 어떤 민족국가라기보다는 단지 일종의 종교적인 집합체에 가까웠기 때문이었다. 
    이들 돌궐족으로서는 이슬람교를 지배사상으로 받아들인다고 하더라도 아무런 손해를 볼 것이 없었으므로, 이슬람교를 받아들이는 데 있어서 전혀 주저할 필요를 
    느끼지 않았던 것이다. 
    새로운 종교로서 이슬람교를 받아들인 대신 중앙아시아로부터 이란·이라크·홍해연안에 이르는 광대한 지역을 소원대로 차지하게 된 돌궐족은 갑자기 이슬람교의 
    수호자로 자처하게 되었다.
    셀죽·터어키제국을 건설한 그들은 팔레스타인을 경계로 북아프리카 지방 칼리프국과 대치하고 소아시아반도를 점령함으로써 동로마왕국과도 세력을 겨루게 되었다. 
    이 돌궐족의 새로운 나라는 정복국가적인 강인한 성격을 견지하여 매우 엄한 질서를 유지하였다. 
    셀죽·터어키의 왕은 술탄으로 불리웠고, 술탄은 곧 지중해 동부 연안의 모든 세력을 다스리는 강자로서 지중해세계에 알려지게 되었다. 
     
    7. 고구려인들의 중원지방경략과 제나라
    소위 '안사의 난'으로 불리운 대반란이 실패로 돌아갈 즈음하여(3096년,서763) 하북지방의 실력자였던 고구려출신 장군 이 정기가 반란진압때 세운 공로를 인정
    받아서,산동지방을 관할하는 절도사로 발탁되었다(3098년,서765). 
    그리고 얼마 안되어 치열해진 절도사들간의 세력다툼 와중에서 탁월한 실력을 발휘한 결과 강소성의 일부지역까지 취함으로써, 중원지방에서 가장 중요한 곡창지대
    들을 장악하였다. 
    이 지역들은 원래 백제가 400여년 가까이 영유했던 중원지방 분국(分國)중의 일부로서 그 후손들의 토착세력이 계속해서 명맥을 유지하였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고구려에서 끌려 온 유민들도 상당수 있었으므로 자연스럽게 한민족의 활동무대로서 다시 등장한 것이다. 
    이 정기는 당연히 고구려출신들을 대거 기용하였으므로 산동과 강소성 일대는 거의 고구려인들의 지배하에 있는 상태나 다름없었다. 
    고구려의 유민은 산산히 흩어져 갔어도, 고구려의 힘찬 맥박은 곳곳마다 이처럼 꺼지지 않는 배달민족의 기개를 보여주고 있었다. 
    그러한 고구려인들의 실력을 바탕으로 이 정기는 평로치청사(平盧淄靑使)라는 막강한 지위에 오르고 단시일내에 절도사들 중에서도 괄목할만한 대발전을 이룩하여, 
    마침내는 당나라와 당당하게 겨룰 수 있는 세력으로 성장했다. 마치 춘추시대에 접어들 무렵에 주나라와 겨루던 서언왕의 세력이 다시 부활한 듯 하였다.
    이 정기는 사리사욕이 없는 공평무사한 인걸로서 국민들의 부담을 덜기 위하여 노력했고 조세부담을 평등하게 집행했으므로 민중이 그를 지지하고 따랐다. 
    평로치청사로서의 그는 십여만의 정예강병을 유지하면서 외적의 침략에 대비했다. 
    또한 대진국, 신라등의 동족국가들과는 활발히 교류했고 동방의 대국들과 중원지방의 사이에서 교통의 최고 요충지로서의 여건을 최대한 이용하여 큰 부를 쌓아 
    갔다. 
    이 정기 사후에 그 아들 이 납은 드디어 고구려인들의 관할 지역을 제(齊)나라로 선포하고 왕위에 올랐다. 
    쇠약해져 가던 당나라는 신흥국 제나라에 대해서 신경을 곤두세웠으나 별 도리가 없었고 제나라는 당나라에 대한 방비책으로 강병 수십만을 증강하여 대비했다. 
    그처럼 많은 강병의 유지를 위한 재력을 조달하기에 충분할만큼 제나라의 국력은 융성했던 것이다. 
    4대에 걸쳐서 약 60여년간 중원지역 제일의 강국으로서 삼한의 고토를 지키며 번영하던 제나라는 원인이 분명치 않은 부하 장군들의 반란으로 인하여 자중지란이 
    일어난 결과 멸망의 길을 걸었다. 
    지나지방 역사가들이 극히 인색하게 기록해 놓고 있는 제나라의 위용은 서진시대 이후의 오호십육국이나 당나라 말기의 오대십국같은 난세의 패권국가들이 불과 
    이삼십년간의 하루살이 나라도 제대로 유지하지 못했던 사실에 비추어 볼 때 그 융성함을 가히 짐작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한민족의 끊임없는 고토회복 집념은 얼마후에는 신라사람인 장보고에 이어져서 다시 한번 꽃피우게 된다. 
    
    Pluskorea     안재세 역사전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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