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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고선지와 안록산

浮萍草 2013. 7. 23. 00:00
    5. 고 선지 장군의 지략 오랑캐들에 의하여 당나라에 포로로 잡혀 간 수십만의 고구려인들은 노예의 신세로 전락하여 갖은 고생을 다하며 치욕의 나날을 보내었다. 그 옛날 신시의 일부였으며, 단군 조선 및 삼국 시대까지도 삼한의 강역이었던 지나지방에 이번에는 그 유서깊은 배달강토의 주인이 아닌 포로로서 찾아 오게 된 것 이었다. 그러나 활달한 기상에 가득찬 고구려인들은 조금도 기가 꺾이지 않았으며 중원지방을 별다른 외국지역으로 생각하지도 않았다. 중원지방은 곧 배달의 자손들이 되찾아야 할 단국강토의 일부에 불과했던 것이다. 단지 그 곳을 되찾을 힘을 가질 때 비로소 진정한 중원지방의 주인으로서도 다시 행세할 수 있는 법인데 운수사납게 포로의 신분에 떨어져서 잡혀온 것 뿐이라고 생각 하였던 것이다. 산동의 제남지방으로 끌려 갔던 고구려인들 중에 맹장인 고 사계 장군이 있었다. 그는 비록 노예의 신분으로 전락했으나 가슴속에는 고구려 부흥의 웅지가 한시도 떠나지 않고 있었다. 당시의 당나라는 조정의 문란과 변방 여러 나라들의 독립운동으로 인하여 이미 난세로 접어드는 징조를 보이고 있었다. 변방을 다스리기 위하여 각지에 절도사를 파견하는 정책을 취했던 당나라는 각 절도사들의 권한이 실제로는 하나의 왕이나 다름없이 막강해짐에 따라서 절도사들 끼리 세력다툼이 생기기도 하는 등 다시 분열의 조짐마저 보이기 시작했다. 절도사의 지위는 세습제처럼 변해가기도 했으므로 실제로 절도사들의 관할 지역은 하나의 독립국이나 다름없게 되었다. 당조정은 단지 절도사들로부터의 공물이나 세금징수만을 요구하게 되었고 모든 권한행사에 대해서는 침묵을 지킬 수밖에 없는 허약한 상태에 놓여 있었다. 마치 춘추전국시대가 재현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러한 혼란을 기다리기나 한 듯이 사방의 숙적들이 당을 공격해 들어오곤 했는데 그 중에서도 북방의 돌궐과 서역 사라센제국의 이슬람세력 남방의 토번(티베트) 등이 가장 활발하게 당을 조여들어 왔다. 따라서 당으로서는 유능한 장수들과 용맹한 군사들이 많이 필요했으므로 그 출신 여하를 막론하고 실력있는 자들을 중용하는 정책을 취할 수밖에 없었다. 고 사계 장군이 그의 아들인 고 선지와 함께 비참한 생활을 하던 제남을 떠난 것은 이러한 정세하에서였다. 이미 당나라의 말과 풍습에 익숙해진 그들은 거의 아무런 장애를 받지 않고 서쪽 변경으로 이주해 갔는데 서역을 관장하고 있던 안서도호부는 병력의 부족으로 크게 곤란을 겪고 있었으므로 고 사계부자는 곧 그 뛰어난 무용을 인정받게 되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도호부의 당군을 지휘하는 위치에까지도 오르게 되었다. 여러번의 출정을 통하여 혁혁한 전공을 세운 끝에 안서도호부의 대장군이라는 지위까지 승진한 고 선지 장군은, 서역을 위협하기 시작한 사라센의 세력을 몰아내기 위하여 일대 원정을 단행했다. 서역과 통하는 중요한 무역로를 장악하기 위한 주도권 다툼이나 다름없는 사라센과 쟁패에 있어서 고 선지 장군의 이 원정은 세계 역사상 그 유례가 없는 쾌거였다. 해발 3,000내지 4,000미터에 달하는 힌두쿠시 산줄기는 예측 불허의 기후 급변 인적미답의 험한 산세 고지대 특유의 풍토병 등이 인간의 접근을 막고 있는 천연의 장벽이라고 할 수 있었다. 등산에 익숙한 웬만한 전문가들도 접근하기 힘든 험한 산이었으므로 힌두쿠시산은 서역과 동아시아를 가르고 있는 천연적인 경계선 구실을 해 왔던 것이다. 그러한 힌두쿠시 산줄기를 대군을 이끌고 넘는다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따라서 사라센 군대도 힌두쿠시 산줄기 북쪽으로 비교적 용이하게 길이 열려 있는 천산남로(天山南路) 즉'비단길'이라고 불리운 대상들의 통로쪽으로 관심을 쏟고 있었을 뿐이어서 힌두쿠시 서쪽은 거의 무방비상태에 놓여 있었던 것이다. 고 선지 장군은 바로 이 점을 노렸다. 그리고 실행에 옮겨갔다. 유능한 참모인 고구려 출신의 봉 상청이라는 인재를 얻을 수 있었던 것도 고 선지 장군으로서는 큰 행운이었다. 그리고 그의 주도면밀한 계획하에 세계 역사에 길이 남을 힌두쿠시 횡단은 마침내 성공했고 사라센의 후방은 고 선지장군의 기습에 의하여 여지없이 무너지고 말았다. 사라센의 동맹국인 소발률국의 왕족들은 저항다운 저항도 해 보지 못하고 어이없이 포로로 잡혀서 장안으로 끌려가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장쾌한 원정을 성공적으로 수행하고 개선한 고 선지 장군의 용명은 온 당나라를 흥분과 기쁨으로 들뜨게 하였다. 그 후에도 수차례에 걸친 서역원정과 토번정벌로 더욱 더 그 용명을 떨치고 당의 서쪽과 남쪽지방을 평정한 고 선지 장군의 심중에는 부친 고 사계의 뜻을 이어 고구려의 원수를 갚기 위해서 당을 응징하려는 깊은 뜻이 항상 떠나지 않고 있었다. 그러나 당나라 조정에서도 그러한 고 선지 장군의 용맹을 경계하는 무리들이 없지 않았다. 그들은 고 선지 장군이 고구려 출신이라는 사실에 어딘가 꺼림직한 전률을 떨칠 수가 없었으므로, 항상 감시의 눈길을 늦추지 않았다. 따라서 고 선지 장군의 의도대로 모든 일이 잘 되어 나가지는 않았던 것이다. 단지 큰 뜻을 버리지 않은 채 때가 오기만을 대인답게 기다리고 있을 뿐이었다. 지역적으로 이미 당나라의 삼분지 일에 달하는 광활한 지방을 다스리는 안서도호부의 대장군으로서 고 선지 장군은 비밀리에 당을 응징할 준비를 진행시켜 갔다. 당의 현종왕은 왕으로서 해야 할 중요한 국사를 점점 더 간신들에게 맡겨 버리고 나중에는 자기 며느리인 양태진(양귀비)에게 반해서 그녀를 자신의 첩으로 삼고, 더욱 사치와 향락만 일삼게 되었다. 그래도 그러한 현종왕의 시절 약 30여년간이 그 때까지의 지나지방에서는 그나마 가장 무사태평한 세월이었다고 후일의 역사가들은 입을 모아서 말한다. 이러한 당나라의 실권을 장악한 간신배들과, 막강한 군사력을 소유한 열명의 절도사들은 제 세상을 만난 듯이 백성들을 쥐어 짜면서 자신의 탐욕추구와 세력확장을 꾀했다. 돌궐족 출신으로 강대한 대진국과의 접경지역인 당나라 동북방 변경을 관장하는 평로절도사가 된 안록산은 현종과 양귀비의 총애를 받으며 출세가도를 달리고 있었다. 그러나 내심으로 자신이 황제가 되어 보려는 야심을 품고 있었던 안록산은 당시 융성일로에 있던 대진국의 힘을 빌어서 반란을 꾀하려 했으나 신의없는 돌궐족의 태도를 믿을 수 없던 대진국은 그에 응하지 않고 관망만 하고 있었다. 안록산은 급속하게 출세하여 나중에는 중원지방 수비에 있어서 최고의 요충지대라고 할 수 있는 하북성 지역과 산서성 지역을 함께 통괄하는 절도사가 되었다. 그것은 문자 그대로 고양이에게 생선가게를 맡긴 격이었다. 그러나 안록산의 심상치 않은 움직임을 간파한 고 선지 장군은 자기 나름대로 안록산에 대한 견제를 철저하게 해 놓고 있었으므로 안록산은 함부로 일을 벌릴 수가 없었다.

    고 선지와 안록산이 그처럼 팽팽하게 세력을 겨루고 있을 때 서역으로부터 다시 사라센의 대군이 당나라를 침공하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고 선지 장군은 당군을 지휘하여 사라센대군을 급습하여 많은 전과를 올렸다. 그러나 당나라의 썩어빠진 간신배들은 고 선지의 명망이 너무 높이 올라 가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으므로 사라센과의 전쟁을 계속적으로 수행하기 위하여 필요한 후원 군과 물자 등을 지원하는 데 성의를 보이려고 하지 않았다. 따라서 고 선지 장군 휘하의 병력은 줄어 들어가기만 했는데 고 선지 장군에게 설욕을 하기 위해서 철저한 준비를 다 해 놓은 사라센군의 병력은 점점 증강되어갔다. 절대적인 열세에 놓이게 된 고 선지 장군은 중과부적으로 고전을 겪으면서도 끝까지 맹렬하게 전투에 임했으나 사라센군이 총력을 기울인 타라스평원의 결전에서 분전한 보람도 없이 결국 패하고 말았다. 이 때 사라센 군대에 의하여 포로로 끌려갔던 당군 중에는 많은 기술자들이 포함되어 있었고 그 중에서도 종이제조 기술을 가진 자가 있었으므로 그들에 의하여 이슬람세계에 동방의 탁월한 제지기술이 전파되었다. 이슬람세계의 제지기술은 얼마 후에는 다시 문명의 암흑지대였던 유럽지방에까지 전해지게 되었다. 고 선지 장군이 패하여 장안에 돌아오자 간신배들은 그 기회에 고 선지 장군의 세력을 뽑아 버리려고 그의 관직을 박탈했고 그를 감시하고자 도읍지 장안에 거주토록 조치했다. 안록산은 숙적 고 선지가 아무런 힘을 쓰지 못하게 린 것을 절호의 기회로 판단하고 곧 대대적인 반란군을 일으켰다. 졸지에 변을 당한 당조정은 수비군을 급히 보냈지만 반란군의 예붕에 당해 낼 수가 없었고 따라서 참패에 참패를 거듭했다. 다급하게 된 당의 조정에는 고 선지를 다시 대장군에 임명하여 반란군을 막으려 했고,고 선지는 그에 응하여 군사를 이끌고 나아가 반란군을 크게 무찔러서 현종왕은 급한 변을 모면하게 되었다. 그러나 당의 조정에 가득한 간신배·소인배의 무리들은 자기들에 의하여 관직까지 박탈당했던 고 선지 장군이 복수를 할까봐 두려워하다가 마침내는 하잘 것 없는 소규모패전(그것도 고 선지 장군의 한 부대가 당했을 뿐인 별 것 아닌 패전)을 트집 잡아서 그를 처형해 버렸다. 마치 자신들을 늑대들로부터 지켜 주던 목양견을 어리석은 양들이 스스로 제거해 버린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기뻐서 날뛴 것은 안록산으로서 그는 조금도 지체하지 않고 곧바로 장안성을 함락시켜 버렸다. 현종왕은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으며 남아있는 계책이란 도주하는 길밖에 없었다. 현종왕을 위시한 당나라의 간신배 및 관리들은 멀리 중원지방 서남쪽에 있는 촉지방으로 정신없이 쫓겨 갔다. 당나라의 멸망은 마침내 풍전등화격이 되었고 양귀비는 분노에 찬 민중들에 의하여 어이없이 학살되었고 현종왕도 자신의 무능의 댓가로 왕위를 내어 놓을 수밖에 없었다. 그의 뒤를 이은 숙종왕도 별 대책이 있을 수 없어서,촉의 산골에 틀어박힌 채 다만 방어를 하기에 급급했다. 자신들을 그나마 잘 보호해 줄 수도 있었던 마지막 보루였던 천하의 영웅 고 선지를 스스로의 손으로 처단해 버린 댓가를 당의 부패한 조정은 톡톡히 치르지 않으면 안되었던 것이다. 안록산의 반란은 당나라가 강해져서 진압할 수 있었던 것이 아니라 반란군 내부의 치사한 권력다툼에 의하여 자멸해 갔다. 십여년에 걸친 내부 분쟁속에 골육상쟁이 계속되어 안록산은 그 아들인 안경서에게 그 아들은 다시 그 부하인 사사명에게 사사명은 또 다시 그 아들인 사조의에게 피살되는 등으로 황제의 권력을 장악해 보려는 짐승같은 무리들은 한심한 집안싸움을 끝없이 벌였다. 당은 스스로의 힘으로는 도저히 반란군을 몰아낼 길이 없어서 대진국에 원조 요청을 보내었으나 다 망해가는 판에도 오만불손한 어투로 국서를 만들어 보낸 결과 대진국은 아무런 응답도 하지 않았고 당의 멸망을 관망하는 여유를 보였다. 막판에 몰려서도 정신을 못 차리고 있는 당나라를 도와줄 아무런 이유도 없었던 것이다. 대진국으로서는 원수의 나라인 당이 돌궐에게 멸망당한다고 해서 애태울 아무런 이유도 없었고 중원지방의 왕이 누가 되던 간에 아무 관계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오히려 원수의 나라인 당이 돌궐족에게 혼줄이 나는 것을 싫어할 필요도 없었다. 단지 돌궐족의 세력이 정도 이상으로 팽창하는 사태만은 견제하고저 하였다. 그러나 반란군 내부의 권력다툼질은 결국 돌궐족 스스로의 힘을 약화시키게 되었고 이를 틈탄 당의 필사적인 전면적 공격 앞에서 사분오열 되었던 반란군의 군사 들은 급속히 궤멸되어 갔다. 욕심에 눈이 어두웠던 돌귈족은 그 좋은 기회를 유효적절하게 이용하지도 못하고 스스로의 관리능력에 한계를 드러내어서 자멸해 간 것이었다. 이후로 돌궐족은 극히 경계를 요하는 종족으로 당나라로부터 감시를 받게 되었고 다시는 동아시아에서 떨치고 일어날 기회를 얻지 못하여 스스로의 활로를 찾기 위해 먼 서쪽으로 중앙아시아 초원을 넘어서 이동해 가게 되었다. 그리하여 후일에 셀죽·터어키를 건설하는 기틀을 다져나가게 되기도 하였다. 돌궐족이 동아시아에서 발붙일 곳을 잃고 서역으로 이동해 간 것과는 대조적으로 안사(安史)의 난 때 당나라의 편에 서서 다소의 공을 세웠던 돌궐족의 일파인 위구르족은 돌궐족에 대신하여 몽골 고원과 당의 서쪽지역에서 크게 위세를 떨치게 되었다. 또 고 선지같은 위대한 지도자를 잃은 안서도호부의 광활한 영역은 당나라의 지배에서 점점 떨어져 나갔고 마침내는 토번(티베트)과 위구르인들이 할거하는 지역이 되었다. 이 지역의 지배권을 장악한 토번은 종종 당나라 깊숙이까지 침공하는 등 당나라의 골치거리가 되었고, 당의 멸망에도 상당히 큰 영향을 주게 되었다. 돌궐을 대신하여 중앙아시아와 북아시아의 강자로 급부상한 위글족은 흉노의 퇼뢰스(鐵勒) 부족연맹에 속한 일개 부족으로서 서기 7세기 초에 퇼뢰스 부족연맹이 와해될 때 돌궐에 내분이 벌어지자 셀렝가강의 상류유역에서 독자적인 세력으로 발전했다. 위글은 돌궐과 대립하면서 지나쪽과는 우호관계를 맺었는데 돌궐의 빌게 카칸이 사망한 후에 더욱 세력을 확장하여 돌궐의 주 세력을 중앙아시아의 서쪽으로 몰아 내는 데 성공했다. 위글족은 마침내 코리페로(骨力裵羅, 또는 利吐發)의 영도로 위글제국(=오르콘 제국)을 건설했는데 동맹관계에 있던 당에서는 3078(서745)년에 회인 카칸(懷仁可汗) 이라는 칭호를 부여하고 위글제국을 인정했다. 위글제국은 돌궐과 마찬가지로 반농경적인 유목제국이었다. 당나라와 시종 우호관계를 유지했던 위글은 당나라 현종왕때 일어난 돌궐족 안록산의 난때도 당나라에 원군을 보냈으나 그 댓가로 당나라측은 위글족에게 낙양과 장안에 대한 약탈을 허용할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미 약체화된 당나라로서는 위글에 대해서 회유책만으로 일관했다. 돌궐의 세력을 중앙아시아 서쪽으로 몰아 버리고 당나라와도 대등한 외교를 펼치던 위글은 뜻밖에도 소부족에 불과했던 키르키스족에 의하여 3173년(서840)에 멸망 당하고 말았다. 그러나 키르키스족은 자신의 제국을 건설하는 대신 고유의 유목생활을 계속함으로써 중앙아시아 지방에는 세력의 공백이 생기게 되었다.
    Pluskorea     안재세 역사전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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