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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장보고와 신라의 운명

浮萍草 2013. 8. 13. 11:12
    11. 장 보고의 활약
    바다 실크로드에서 활약한 장보고 ⓒ편집부
    라는 성덕왕년대(3035-3069,서702-736)에 이르러 활발하게 해외진출 활동을 전개하기 시작했으며 지나지방 동해안 지역은 물론이고 해로를 통하여 인도지방까지도 학자들이나 상인들의 왕래가 빈번하였다. 또한 육로로 지나지방을 거쳐서 중앙아시아의 사마르칸드 지역까지도 무역이나 외교활동을 위하여 왕래하였던 사실이 최근에 알려지고 있다. 이처럼 해외활동을 장려한 정책이 주효하여 신라가 동아시아 무역의 중심지화한 결과 도시(특히 도읍지인 경주) 로의 인구집중 현상이 현저하게 발생하여 수도 경주는 최전성기에 17만여호(약 90여만명)에 이르는 국제적 대도시로 성장하기도 했다. 특히 배달민족의 고토인 산동지방에 신라인들의 집단거주지가 있어서 등주의 적산원(赤山院)에서 법화회 등의 불교예식을 거행할 때는 250여명정도의 신라인들이 참석하곤 했다. 이들은 모두 신라말·신라풍속·신라음악 등으로 모든 행사를 집행했다. 즉 대단위의 신라교민 집단이 형성되어 있었던 것을 알 수가 있는데 신라 제 46세 임금인 문성왕시절(3172∼ 3191,서839∼858)이던 3172년(서839)에 등주를 방문했던 일본의 승려 원인(圓仁;옌닌)이 남긴 기록에 의하면 그 당시 등주에는 발해관·신라관 등 일종의 교민청(僑民廳)에 해당하는 기관들이 있었다고 한다. 신라인들은 흔히 당나라에 가서 높은 지위를 획득하기도 했는데 그 중에 장보고라는 인재가 있었다.
    그는 출중한 무예를 바탕으로 일찌기 산동남쪽의 서주를 다스리는 무령군 소장을 지내었는데 신라 제 41세 임금인 헌덕왕 무렵부터 신라 통치배들의 정권 다툼질에 의한 난세로 인해 유민들이 대거 발생하고 그 중 많은 사람들이 당나라 해적들에게 납치되어 중원지방에서 노비로 팔리는 것을 목격하게 되었다. 장보고는 의분을 참지 못하고 스스로 일만여명의 사병을 양성하여 청해진(완도)에 근거지를 두고 해적소탕에 나섰는데 그 덕분에 신라의 양민들은 해적들의 피해를 받지 않게 되었다. 당나라 해적들은 신라인 납치를 포기하게 되었고 그 대신 이번에는 왜열도 지방을 약탈 대상으로 삼았으므로 왜열도 주민들에게는 당나라 해적들이 공포의 대상이 되었다. 해적들중에는 백여 척의 선단과 수천명의 인원으로 구성된 대규모적인 집단도 있었으며 그 중에는 신라인 부랑자들도 다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일본의 기록에는 '신라인해적'의 출몰에 관한 기록도 이 무렵에 다수 나타난다). 그러한 대해적단들을 굴복시킨 장보고의 위명은 동아시아의 전 해상에 진동하였고 신라인들은 안심하고 더욱 활발하게 항해술을 이용한 문물교류에 힘쓸 수 있었다.

    그러나 신라 33세 임금인 성덕왕때부터 시작된 궁중내란의 조짐은 36세 원성왕 년대를 제외하고는 점점 무르익어 갔고, 부패하고 허약하고 권력지상주의적이면서 사대주의적인 신라왕실에 대한 불만이 가중되어 가면서 헌덕왕 년대부터 49년 동안에는 25차례에 걸쳐서 피비린내나는 왕위쟁탈전이 발생하는 난장판이 벌어졌다. 지나지방의 풍습을 무작정 좋아하다 보니까 마치 지나지방의 난세에나 있을 법한 현상이 나타난 것이다. 그 와중에서 혹은 왕과 왕녀가 살해당하고, 숙부가 조카인 왕을 살해하기도 하고, 반란군에 쫓긴 왕이 목매어 자살하는 등의 온갖 참상이 꼬리를 물고 일어 났다. 장보고는 그런 난세 속에서도 남해안 지방의 민심을 크게 얻어서 그 세력은 신라 통치배들에게 위협적으로 느껴지기에 이르렀다. 46세 문성왕 7년(3178년,서845)에 장보고 딸이 왕의 둘째 왕비로 간택되었으나 신라 조정의 여러 간신들은 장보고의 혈통이 천민이라는 점을 내세워서 반대하였다. 장보고는 극도로 분개하여 간신들을 제거하고 국가를 바로 잡기 위하여 반정을 감행했다. 그러나 다음해에 간신들이 보낸 자객에게 장보고는 암살당하고 주인을 잃은 청해진은 흐지부지 사라져 버렸으므로, 신라는 자멸의 늪으로 더욱 급속히 빠져 들었다. 신라는 마지막으로 주어졌던 웅비의 기회를 놓치고 다시는 융성하지 못했다.
    Pluskorea     안재세 역사전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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