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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대진국의 발전과 돌궐(투르크)의 요람기

浮萍草 2013. 7. 22. 00:00
    3. 대진국의 발전과 고구려인들의 활약
    대진국 역사, 상경과중경 동경과남경 서경과장령 부여와막힐 정리와안변 솔빈과동평 철리와회원 안원과독주 © 안재세 전문위원
    진국은 고구려의 영토와 국민들을 거의 모두 회복하여 처음부터 동아시아 최대의 강국으로 그 위력을 떨쳤다. 서쪽의 당나라는 고종왕 이후 측천무후의 등장이래 숱한 정변이 거듭되는 가운데 변방 피지배민족들의 독립투쟁이 줄을 이어 발생하였고 그에 따라 그 국력이 약화 되어 갔다. 대진국 태조는 한편으로는 황태자인 대 무예를 적국 당나라의 수도인 장안에 파견하여 당나라의 정세를 살피게 하였고 다른 한편으로는 당나라와 다시 정상적 관계를 맺어서 하루 빨리 평화로운 인간사회를 회복하고자 노력하였다. 당나라도 도저히 대진국을 당할 수 없을 뿐 아니라,심지어는 거란에 대한 침공을 시도했다가도 두 번이나 전멸적인 패배를 당하는 등 그 위신이 크게 손상되어 위축될 대로 위축되어 버려서, 결국 대진국과의 대결을 포기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거란이 당나라와의 전쟁에서 대승하고서도 당나라의 보복이 두려운 나머지 당나라에 오히려 투항하는 기회주의적 태도를 취하자, 당의 현종왕은 그 기회에 거란의 본거지인 영주의 유성에 영주도독부를 설치하고는 대진국의 북부지방인 흑수말갈의 족장들을 뇌물로써 회유하여 다시금 대진국을 협공하려 하였다. 이에 대진의 강병은 우선 흑수말갈을 징벌한 후에 그 여세를 몰아서 당의 국경을 위협하자 거란은 다시 당과의 관계를 끊고 돌궐과 손을 잡았다가, 다시 대진국에 대하여 당나라를 협공하자고 추파를 던지는 등 중심을 잡지 못하고 우왕좌왕하기만 하였다. 대진국은 이러한 거란인들을 일단 잠정적인 동맹세력으로 간주하고 당을 응징하기 위한 거국적인 준비를 갖추어 갔다. 대진국 태조는 수십년간의 전란과 당오랑캐들의 횡폭한 약탈·방화에 의하여 사라져 버린 환국이래의 옛 역사를 다시 회복시켜 놓기 위하여 발안군왕 대야발(大野勃) 에게 그 복원작업을 완수하도록 중임을 맡겼다. 당나라 오랑캐들은 중원지방을 빼놓고는 사방의 여러 민족들에게 아무런 볼만한 문명이 없었던 것처럼 꾸미기 위하여 한민족의 중요한 보배와 문화재들을 약탈해 감은 물론 가져갈 수 없는 궁전이나 문화유적들을 모두 불태워 없애버리는 만행을 저질렀고 인류의 최고 역사기록이기도 한 한민족의 숱한 역사서들을 질투심에 불타서 거의 모두 없애 버리는 죄악을 저질렀던 것이다. 중임을 맡은 대야발은 잠시도 쉴 사이없이 주위의 모든 기록들을 정리하는 한편 주변국가들을 여러 차례씩 방문하여 잃어 버린 역사서들을 수집하는데 심혈을 기울였다. 그러한 노력의 결과 마침내 완전하지는 못하나마 단군시대의 실상을 단편적으로라도 알아 볼 수 있을 만한 대작 '단기고사(檀奇古史)'를 완성하여 후세에 전하게 되었다. 이로써 어리석은 당오랑캐들의 배달민족역사 말살시도는 완전히 실패로 돌아갔다. 태조의 뒤를 이은 대 무예 황태자 즉 대진국 무제는 일찌기 당나라에 파견되어 당의 내부 사정을 상세히 알고 있었다. 무제는 일본과도 통상관계를 활발히 진행시켜서 많은 사절단들이 왕래했다. 이 당시 일본에 보내어졌던 대진국의 국서에는, "대진국은 고구려의 옛 땅과 부여 이래의 전통을 이었다." 라고 명확하게 밝힘으로써, 대진국이 당당하게 고구려의 연장선상에서 발전하고 있음을 알렸다. 당시의 일본은 백제유민들의 대거 진출로 인하여 백제계의 왕조가 매우 유력한 입장에 있었으므로, 대진국은 신라와 당나라의 연합을 견제하기 위해서 일본과 협조 할 필요가 있음을 의식하고 있었다. 무제는 또한 당나라의 복잡한 내부 사정을 잘 알고 있었으므로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3065년(서732) 9월에 대장 장 문휴를 파견하여 요동반도에서 발해만을 건너 백제와 고구려의 옛 터전이었던 산동반도를 정벌하는데 성공했다. 대진국의 이러한 급습에 놀란 당의 오합지졸들은 혼비백산하여 패주하였고 장 문휴 장군은 당의 등주자사를 처형하고 난 후 산동지방을 휩쓸어 위력을 보이고 나서 당당하게 개선했다. 당나라는 이에 대한 복수를 하려고 다음 해에는 신라 성덕왕에게 협공을 요청했으므로 신라군은 대진국의 남쪽지방을 공략했다. 그러나 당과 신라의 의도와는 달리 대진국 군사들은 신라군의 침공을 격파했을 뿐만 아니라 대반격 작전으로 대동강 이북의 모든 지역을 점령해 버렸다. 당나라 침략군 또한 사기가 형편없는 데다가 침략의 명분조차 찾을 길이 없었으므로 싸우기도 전에 스스로 와해되어 철수해 버렸다. 다음 해에도 당나라측은 다시 침략을 시도했으나 워낙 막강한 대진국의 군세 앞에서 자신의 실력에 대하여 별로 신뢰할 수 없었던 침략군들은 다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결국 대진국을 정벌한다는 명목만 요란하게 떠들어댔을 뿐 실속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는 무력시위만을 하다가 제 풀에 지쳐서 포기하고 만 것이었다. 이로써 동아시아의 최강자인 대진국의 위명(威名)은 오히려 더욱 크게 천하를 진동시켰다. 4. 돌궐(투르크)의 요람기
    돌궐족은 처음 세렌가(=鐵) 강가에 살면서 유연(柔然)에 예속되어 철공업에 사역당하고 있었으나 돌궐군주 토문(土門)이 유연을 쳐서 두병 가한(頭兵可汗)을 죽이고 스스로 가한이 되었다. 북제(北齊)는 유연으로부터 구원요청을 받고 돌궐에 대해 단호하게 대처했다. 돌궐의 부민 카칸이 유연을 다시 공격하자 유연은 서위(西魏)에 투항하면서 구원을 요청했으나 서위의 군주인 우문태는 돌궐에 협력해서 유연의 군주 이하 3,000 여명을 돌궐에 인도하여 유연은 멸망당했다. 곧 사망하고 친족들이 영토를 분배해서 아들 무칸 카칸(목간가한;木杆可汗)은 돌궐의 중심지인 동부를 관할하고 부민의 동생 이스테미 카칸(室點密可汗)은 서부를 관할했다. 무칸은 572년까지 집권하며 거란을 복속시켜서 발해만까지 세력을 확장했으며 지나와는 정세에 따라서 정략결혼과 약탈을 반복하는 강온 양면책을 썼다. 무칸 사망후에는 무칸의 아들 탸파르(他鉢= 鉢)가 뒤를 이었으나 비슷한 무렵에 이스테미의 아들인 타르두(達頭)가 카칸이 되려는 야심을 품어서 분열의 조짐이 나타났는데, 타르두는 결국 스스로 카칸을 자칭했다. 탸파르는 수나라가 지나지방을 통일한 2914년(서581)에 사망하고 그 후 2년여간 내분으로 돌궐세력이 약화된 데다가, 동돌궐은 정략결혼을 통해서 동맹하고 있던 북주의 멸망에 대해 보복하려고 수나라와 대결했으나 패했다. 참전했던 동돌궐의 장군인 아스파간은 동돌궐의 이스파라 카칸으로부터 모반의심을 받고 모친이 살해당하자 서돌궐로 도주해서 동돌궐과의 대결에 앞장섬으로써 돌궐은 동과 서로 완전히 분리되고 말았다. 동돌궐은 서돌궐에 맞서고자 수나라의 원조에 의존하게 되었으나 수나라가 몇 년 안가서 고구려에 대한 침공실패로 약화되자 시비 카칸(始畢可汗)은 돌궐의 재건을 도모했다. 그러나 수나라의 이세민 장군에게 격퇴당한 후 이세민이 수에 반기를 들고 부친과 함께 당나라를 세우자 시비는 수와 당 사이에 중립적인 입장을 취하며 실리를 도모하면서 돌궐의 판도를 회복해 갔다. 시비 사후에 처라 카칸(處羅可汗)이 이었으나 곧 사망하고 그 뒤를 이은 힐리 카칸( 利可汗;2953∼2963,서620∼630)은 지나지방까지 제패하려는 야심을 품고 당나라를 압박했다. 이에 당태종왕은 유화정책을 채택하여 직접적인 충돌을 피하는 동안 돌궐에 내분이 벌어져서 2962년(서629)에는 크게 분열되고 말았는데 당태종왕은 반란군을 지원하여 다음 해인 2963년(서630) 초에 힐리 카칸을 생포한 후 반대자를 카칸으로 세우는 데 협조했다. 이로써 동돌궐은 완전히 소멸되고 말았다. 이세민은 서돌궐의 내분까지도 이용해서 서돌궐마저 굴복시킴으로써 투르판 지역을 장악하여 당의 판도를 천산북로 입구까지 넓혔다. 서돌궐은 약 반세기 가량 당나라에 지배당했으나 당의 규제가 약화되어 가자 3012년(서679)에 아시테가(阿史德家)의 영도 하에 당을 공략했다. 아시테가의 시도는 실패하긴 했으나 돌궐족의 부흥운동을 크게 자극했고 3016년(서683)에는 쿠틀룩(骨 祿)이 돌궐족을 영도해서 당에 대한 투쟁을 벌였는데, 4년간 11번에 걸쳐서 주도한 당에 대한 공략을 승리로 이끔으로써 돌궐세력의 재건에 성공했다. 쿠틀룩 사후에는 그의 동생 카파간(默 )이 3043년(서710)에 돌궐 전체의 카칸으로 인정받았으나 3049년(서716)에 암살당했다. 이에 돌궐에서는 다시 내분이 일어났으나 쿠틀룩의 아들 퀼(闕) 테긴(特勤;王子,또는 君)이 내분을 수습하고 자신의 형을 카칸으로 추대했다(빌게 카칸,毗伽可汗). 그러나 추대된 빌게 카칸도 얼마 후 부하에게 독살당하고 그의 아들 이연 카칸(伊然可汗)이 즉위했으나 그도 곧 사망했다. 곧 이어 이연 카칸의 동생인 텡그리 카칸(登利可汗)이 어린 나이에 즉위하자 텡그리 카칸의 모친이 섭정했으나, 3073년(서740)에 그녀가 사망하자 내분이 심화되었던 돌궐은 흉노의 일족인 위글족에게 제패당하고 말았다. 그러던 와중인 3084년(서751)에 탈라스의 전투에서 이슬람세력이 당나라에게 승리하자 돌궐족에게도 이슬람교가 급속히 파급되어 갔다
    Pluskorea     안재세 역사전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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