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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한민족의 삼국후기 무렵의 서양과 이슬람 지방사

浮萍草 2013. 7. 18. 00:00
    13. 삼국후기 무렵의 서쪽 변방
    르만민족의 대이동에 의하여 로마 말엽의 유럽지방과 지중해 연안지방에는 그칠 사이 없는 전란과 혼란이 계속되었다. 
    서기 285년에 양분된 로마왕국은 서기 353년에 동로마의 콘스탄틴왕에 의하여 다시 합쳐졌으나 그 11년 후인 313년에는 또 다시 양분되는 등 큰 혼란상태를 벗어
    나지 못했다. 
    서기 313년에는 기독교가 공인되어 자유로이 활동을 할 수 있게 되었는데 그 12년 후인 325년에는 니케아에서 제1회 (유럽세계) 종교회의라는 것이 열렸다. 
    56년 후인 서기 381년에는 콘스탄티노플에서 제2회 종교회의가 열리고 여기에서는 여러 종파 중에서 아타나시우스파의 기독교 교리만을 유일한 교리로 인정하기로 
    결정했다. 
    다시 11년 후인 서기 392년에는 기독교가 로마의 국교로 인정받고 다른 모든 종교는 이단으로 낙인 찍혀서 배제되었다.
    그에 따라서 그 자신 로마의 박해에 시달렸던 기독교는 그 한을 풀기라도 하듯이 다른 종교들이나 같은 기독교의 다른 종파까지도 박해했는데 그에 의하여 로마지역
    내에서는 공인된 기독교만을 강요받게 되었다. 
    그와 같은 과정을 거쳐서 급성장을 이룩한 기독교는 모든 게르만족 사이에도 퍼져 들어가서 야만적인 행위는 도맡아 하면서도 입으로만은'사랑과 평화와 진리'등을 
    외쳐대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들 모두는 자기들만이 신의 은총을 받을 수 있는 선량한 신의 백성들이라는 독선적인 생각에서 헤어나지 못하였으며 그러한 현상은 지금까지도 별다른 
    반성없이 계속 이어지고 있기도 하다. 
    이태리반도와 그리이스반도 지역 등 일부만을 소유하게 된 채 명맥을 유지해 가던 로마왕국은 서기476년에 이르러 최후로 게르만 민족에 의하여 서로마왕국이 
    완전히 멸망하기에 이르렀다. 
    서로마를 멸망시킨 것은 게르만족 용병대장인 오도아켈이었는데, 이로부터 이른바 유럽세계의 암흑 시대가 시작되었다. 
    게르만민족 이동의 결과로 서로마 지역에는 동고트·서고트·반달·부르군트·프랑크·앵글로색슨 등 여러 부족국가들이 우후죽순처럼 탄생하여 서로의 운명을 건 야만적
    인 동족상잔의 혈투를 벌였다. 
    동로마는 동로마대로 인접한 페르시아 등과 전쟁을 하기도 하고 평화적인 소강상태를 유지하기도 했는데 게르만 부족국가들 중에서는 점차로 프랑크족과 앵글로
    색슨족이 두각을 나타내게 되었다. 
    게르만민족의 이동을 몰아온 흉노족의 일파는 유럽지방의 심장부에 훈왕국이라는 유럽지방에서 가장 강력한 나라를 세웠다. 
    그러나 흉노족은 서기 453년에 이르러서 용맹스럽던 군주 앗틸라의 사망을 계기로 와해되기 시작하여 점차 주위의 게르만족들과 융합되어 세력이 약화되었고 그 후 
    수많은 혼혈과정을 거쳐서 지금의 헝가리의 조상이 되었다. 
    동로마제국은 그런대로 그리이스와 소아시아(터어키 지역) 및 이집트·리비아에 이르는 지중해연안에서 지배권을 구축하였고 그 나름대로의 문명을 발전시켰는데, 
    유럽과 아시아에 걸친 묘한 지리적 관계로 인하여 일종의 동·서 융합적인 문화적 성격을 지니게 되었다. 
    
    14. 이슬람 세계의 태동
    유럽지역에서 이러한 큰 변화가 일어나고 있는 동안에 침체상태에 빠져 있던 중동지역에서 사막의 예언자라고 불리운 마호메트가 출현했다. 불모의 땅인 아라비아반도는 여러 토착부족들이 살고 있었으나 통일된 국가를 형성하지 못하여 항상 주변의 강국들에게 눌리워서 사는 속국의 처지에 놓여 있었다. 좌우로 메소포타미아와 이집트라는 대문명권을 끼고 있으면서도 자고로 그들 아랍민족은 별로 달라진 것도 없이 옛부터의 유목생활이나 대상 또 무역중개상으로서 상업활동에 주로 종사하면서 근근히 살아가고 있었다. 아라비아반도 북부에 인접한 팔레스타인에서 단기 2333년(서기0년)전후하여 일어난 기독교가 지중해 연안을 따라서 널리 퍼져가면서 로마제국의 판도에서 국교로 인정받는 지위에까지 오르는 동안에 아라비아에서는 여전히 메카의 검은 돌만을 신앙의 대상으로 하는 고유의 종교가 전해 내려오고 있었다. 그러나 유태인의 분산에 따라 이동해간 유태인의 세력 및 기독교 세력은 이러한 변방 사막지방을 파고들기 시작했다. 아라비아반도의 남단인 예멘지역은 비교적 농경생활이 가능한 지역으로서 오래 전부터 유태인들이 몰려들었는데 혹은 기독교, 혹은 유태교를 신앙으로 삼고 자기들 나름대로의 집단 부락들을 형성하여 살아가고 있었다. 따라서 사방 어디에나 통하고 있던 대상들에 의하여 여러가지 새로운 종교의 가르침도 조금씩이나마 퍼지기 시작했다. 서기 511년경에 메카에서 탄생한 무하마드는 이러한 세계적 동향에 착안하여 무정부 상태로 분열되어 있던 아라비아반도의 여러 아랍민족들을 통합하여 강력한 이슬람세계를 창건하는 기초를 마련하였는데, 이러한 대사업을 뒷받침해 준 것이 그들 나름대로의 종교적 결실인 마호멧교였다. 사막의 가혹한 생존 조건을 바탕으로 하여 성립된 이 종교는 그대로 아랍민족의 통합에 결정적인 구심점으로 작용하여, 단시간 내에 거대한 세력을 형성함으로써 지중해연안의 세력 균형에 큰 변화를 초래했다. 이슬람교에 의하여 일어난 아랍민족주의는 기독교적인 동로마와 대립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사실상 이슬람교를 세운 무하마드는 가브리엘 천사와의 심령적 접촉을 통해서 아랍세계에 신(여호와=알라)의 가르침을 전파하여야 한다는 사명감을 가지게 되어서 종교운동을 일으킨 것으로 기실은 기독교와 형제뻘되는 종교인 것이다. 다만 그 교리를 실천하는 주체 세력으로서 그때까지 무기력하게만 보이던 아랍민족이 등장함으로써 일종의 '교리에 대한 주도권 다툼'같은 양상으로 이슬람세계와 기독교 세계와의 대립이 벌어지게 되었을 뿐이다. 말하자면 한 쪽에서는'여호와를 위하여' 또는 '예수 크리스트를 위하여'라고 하면서 칼을 들고, 다른 한 쪽에서는'알라의 영광을 위하여'를 외치며 칼을 들게 되었을 뿐이다. 여호와의 아랍식 변형이 알라신인 것을 생각한다면 이러한 현상을 만들어 간 두 세계의 대립이야말로 몹시 역설적인 종교적 현상이 아니라고 할 수 없을 것이다. 여기에서 잠시 이슬람세계가 변화해 간 자취를 살펴보기로 한다. 일찌기 지나 지방에서 야만인 진시황이 통일 국가를 세운 시기(서기전 246년)와 비슷한 시기에 옛 페르시아지역에서는 셀레우코스왕조가 무너지고 페르시아인들에 의하여 파르티아가 건국되었다. 파르티아는 그리이스의 왕조들 및 로마와 대결하면서 약 500여년간 번영하였는데, 뒤이어 일어난 사산조 페르시아에 의하여 교체되었다.(서220 :이무렵 지나 지방에서는 후한이 멸망했음) 사산조 페르시아는 쇠퇴기에 접어 든 동로마 왕국과 싸워서 승승장구했다. 서기 3세기초엽에는 로마왕 고르디아누스3세의 침략을 격파하여 아르메니아와 메소포타미아 전지역을 획득하였고 이어서 3세기 중엽에는 로마왕 발레리아누스를 전투 중에 생포하기도 하는 등 막강한 무력을 과시하면서 무하마드가 출현하기 전까지 오리엔트 지역에 군림했다. 한편으로는 오리엔트 지역의 지리적 특성에 의하여 지중해지역과 인도지역에서 발전하기 시작한 종교들이 사산조 페르시아에서 융화되기도 했다. 마니교는 예전부터 내려오던 페르시아의 조로아스터교적인 전통에다가 인도의 불교 지중해연안의 기독교 등이 혼합된 복합적인 종교로서 짧은 기간에 널리 퍼졌다. 마니는 그 당시의 전 오리엔트 지역 및 인도 등지를 여행하면서 복합적이면서도 통일적인 종교를 만들어 내었으며 스스로를 아담·노아·아브라함·불타·조로아스터· 예수 등의 뒤를 이은 최후의 가장 위대한 예언자라고 칭했다. 그러나 그는 조로아스터교의 신봉자였던 바하람1세에 의하여 처형당했고(서277년 따라서 페르시아 국내에서는 마니교의 세력이 급속히 약화되어 갔으나 한 때는 동쪽으로 지나지방까지도 퍼져 나갔다, 아라비아반도의 남서쪽인 예멘지방은 사막지대에서 벗어나 농경이 가능한 지역으로서 오래 전부터 그 나름대로 문명이 발달해 왔다. 서쪽으로는 폭이 좁은 홍해를 건너서 아프리카의 아비시니아 지방과 마주하고 있었으므로 두 지역사이에서는 많은 교류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아비시니아는 기독교를 받아들이고 있었는데 유대교도로서 예멘의 왕인 히므얄이 예멘의 기독교도들을 박해한 데 대한 보복으로 홍해를 건너 예멘으로 쳐들어가서 점령해 버렸다(서기 6세기경). 이에 예멘의 왕자가 페르시아로 들어가서 구원을 요청했으므로 사산조 페르시아의 호스로우왕은 페르시아군을 파견하여 아비시니아군을 몰아 내버린 다음에 예멘을 아예 페르시아의 영토에 병합시켜 버렸다. 그러나 페르시아도 호스로우왕의 시대를 정점으로 점차 쇠약해 가기 시작했다. 이 왕 시절에 부즈르그미풀이라는 현명한 의사가 있었는데 그는 인도를 여행하면서 인도에서 판차탄트라(일명 '비드바이우화집')와 체스를 페르시아로 가지고 왔고, 체스는 서양으로 전해져서 오늘날과 같은 서양체스로 만들어졌다고 한다. 종교적 갈등으로 인하여 여러 세력으로 분열되어 있던 아라비아반도에서 종교적 통합에 의한 아랍민족 통일의 기운이 무르익고 있었다는 점은 상상하기에 어렵지 않다. 마호멧의 출현으로 이슬람 종교에 의한 아랍민족의 통일이 이루어짐으로써 이 문제는 해결이 난 듯이 보였다. 그러나 무하마드는 부족간의 통합을 위하여 스스로 여러번 정략결혼 정책을 실행한 결과 열명이 넘는 부인들을 맞이하게 되었는데 이로 인하여 마호멧 사후에 각 부족들이 자기들의 종교적 정통성을 주장하며 사분오열되는 위기를 겪었다. 일종의 자기분열적인 종교전쟁이 발생했던 것이다. 무하마드를 이은 초기의 후계자들이 모두 불행한 최후를 마친 사실은 얼마나 이 당시의 혼란상태가 심했는가를 말해 준다. 즉, 초대 칼리프인 아부·바쿠르는 재위 2년만에 사망했는데 그 뒤를 이은 오마르는 10년 재위 끝에 자객에게 암살당했고, 세번째 칼리프 오스만은 70세라는 고령 으로 즉위했으나 22년 후에 자택에서 폭도들에게 학살당했으며, 네번째 칼리프 알리는 5년 재위 끝에 이 또한 자객에게 암살당했던 것이다. 그래도 이 네명의 칼리프까지는 공식적으로 추대되었던 까닭에 '정통 칼리프'라고 불리웠는데 그 이후로는 각 부족의 세력에 따라 이슬람 판도 내에 여러개의 나라 들이 갈려 나가게 되었다. 두번째 칼리프인 오마르는 매우 영명한 지도자로서 그 역량을 십분 발휘했다. 시끄러운 종교적 분쟁을 피하기 위하여 독특한 종교정책을 채택한 그는, 아라비아반도에는 이슬람종교 단 하나만을 허용하되 이교도들은 반도이외의 지역에 이주 시키고 아라비아반도 이외에서는 칼리프에게 세금만 착실히 내면 어떠한 종교에도 간섭않는다는 방침으로 일관했다. 이로써 아랍민족은 매우 강력한 단결력을 가지게 되었다. 이러한 정책으로 강력한 군사력을 획득하게 된 후에 그 여세를 휘몰아 본격적으로 이슬람의 판도확장에 나선 오마르는 시리아를 함락시키고(서636) 예루살렘도 함락 시켰으며(서638) 다시 유프라테스강의 하류에서는 사산조 페르시아의 대군을 격파함으로써 페르시아를 멸망시켰다. 이슬람군은 계속하여 비잔틴 왕국의 일부였던 이집트로 원정을 단행하여 군사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압도적 승리를 거두고 이집트를 장악하게 되었다(서644). 그러나 이때 이슬람군은 알렉산드리아에 남아 있던 고서적들을 공중목욕탕의 땔감으로 태워 없애는 야만적이고도 광신적인 면모를 드러내었다. 이로써 알렉산드리아의 대도서관에 보관되고 있었던 귀중한 고대의 기록들은 시저와 이슬람광신자들의 횡액을 만나 지상에서 사라지고 말았다. 오마르의 구상은 숫적으로 적은 아랍인들을 통치자로 삼아서 세금과 군수품을 거두어들이는 역할을 시키되 아랍인들이 풍요속에 정착생활을 하지는 않도록 하는 것 이었다. 그리고 피정복민들도 이슬람교로 개종하면 인두세를 물리지 않았다. 하여튼 오마르 이후 이슬람세계에서의 종교 정책은 대체로 관대한 모습으로 전개되었다. 오마르의 예루살렘 점령 당시 성의 주민들이 자진하여 항복한 점이나, 오마르가 예루살렘으로 가기 위해 낙타 한 마리를 끌고 노예 한 명과 교대로 타거나 걸으면서 여행한 일은 이슬람 세계의 인간미와 평등사상이 한 단면을 엿보게 하는 한 아름다운 장면으로 기록되기도 했다. 그러나 오마르 자신은 지도층간의 권력 다툼의 와중에서 자객에게 암살당하는 비운을 맞았다. 오마르 사후에 70세의 노령으로 칼리프가 된 오스만은 계속 이슬람세력을 확장하는 정책을 추구하여 반세기도 지나지 않아서 북아프리카에서 중앙아시아에 이르는 거대한 판도를 장악했다. 그러나 서기 717년의 동로마와의 전쟁에서 동로마에 패함으로써 이슬람은 동로마에 대한 공격을 일단 중지하게 되었고 주로 지브랄탈 해협을 건너서 이베리아 반도 쪽으로 진출하여 서구 기독교 세계를 압박해 갔다. 피레네산맥을 넘어 프랑크 왕국의 심장부까지 나아간 이슬람군은 현 프랑스 중부 지방의 투르에 이르렀으나 기독교 세계의 모든 군사력을 집중하여 방어한 샤를 마르텔에게 저지당하여, 최종적으로 피레네 산맥을 대강의 경계로 삼아 이슬람세계와 기독교 세계가 나뉘게 되었다. 서기 8세기 중엽에 이슬람세계는 교리상의 문제로 인하여 숨니파와 시아파로 세력이 양분되어 바그다드와 코르도바에 각각 별개의 나라를 세우게 되었다. 이베리아 반도의 코르도바를 중심으로 세워진 이슬람 세계는 미개했던 서유럽의 여러 나라들에 큰 영향을 주었고 서유럽인들은 이슬람상인들의 세계적 활동에 의하여 세계의 지리에 관한 지식을 얻을 수 있었다. 이슬람은 사상가들에게 광범위한 표현의 자유를 허용했고 세계시민적 성격이 강했으며 지리학·천문학·수학·철학·의학 등에서 탁월한 발전을 이루었다. 본격적인 금융업도 기독교 세계보다 훨씬 앞섰고 고도의 관개 기술에 의해서 불모지에 작물 재배를 가능케 하는 등 모든 면에서 기독교 세계를 앞서 있었으므로 문화적 암흑 시대를 달리던 서유럽의 기독교 국가들은 이슬람 문화를 열심히 모방하기 위해 애썼다. 동쪽으로는 당나라, 서쪽으로는 서유럽 지방의 게르만국가들, 동남쪽으로는 인도지방 북쪽으로는 동로마 등과 맞서면서 당당한 대국가를 형성했던 이슬람 제국은 사라센제국이라고도 불리웠다. 이 거대한 제국은 문화적 통합국가이자 이슬람 종교권으로서 오늘날까지 그 종교적 세력권은 굳건히 유지되어 오고 있다. 이후에 동쪽 흉노족의 일파인 돌궐족의 세력 팽창으로 셀죽터어키가 일시 지배하게 되었고 그 후 몽골의 대정복때 병합되었던 적도 있었지만, 문화적 전통에 입각한 아랍민족주의는 더욱 굳건해져서 흥망성패에 관계없이 이슬람문화와 함께 이어져 갔다.
    Pluskorea     안재세 역사전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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