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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부산 영선고갯길 ‘사십계단’

浮萍草 2013. 6. 20. 10:12
    쫓겨난 고향… 헤어진 가족… 층층이 쌓인 6·25 피란민의 애환
    6·25전쟁 당시 피란민들이 부두 노역의 품을 팔기 위해 매일 오르내리던 사십계단(왼쪽)과 새로 조성된 사십계단. 주경업 부산민학회장 제공
    ‘사십계단’은 부산 중구 동광동 ‘영선고갯길’(새도로명 동광길)에 놓여진 계단이다. 사십계단을 내려가면 곧 중앙동4가의 넓은 평지를 만난다. 영선고개가 있는 언덕길과 그 아래 평지 사이에는 높은 계단이 두 개 더 있다. 반달계단과 소라계단이라 이름한 회전계단인데, 남쪽의 사십계단만 옛 이름 그대로 남아 60여 년 전의 6·25전쟁 피란 시절의 얘기를 간직하고 있어 옛 정서를 불러일으킨다. 사십계단의 윗길 동광동길은 조선조 후기 동래부에서 용두산 언저리의 초량왜관 연향대청으로 가던 길이었다. 그러니까 왜의 사신과 외교문서를 주고받기 위해 연대청(연향대청)으로 이르는 동래부사의 행차 길이었던 것이다(동래부사 행차 길은 설문-영주터널 앞-코모도호텔 앞-메리놀병원-가톨릭센터-광일초교 앞으로 보기도 한다). 영주시장 남쪽 영선고개로 이어지는 길은 영선산을 넘어야만 했다. 기치(旗幟)를 앞세우고 길 군악(軍樂) 잡힌 위풍당당하던 모습의 동래부사가 150여 명의 각양각색의 별색들을 거느리고 연대청으로 향하는 모습이 조선후기 화가 겸재 정선이 그렸다고 알려진 ‘동래부사접왜사도’ 10폭에 상세히 묘사돼 있다. 초량왜관 시절 영주동시장 뒷길-부원아파트 앞-논치시장-대청로로 이어지는 영선고갯길은 대낮에도 혼자 다니면 소름 끼치는 평소 왕래가 잦지 않는 좁은 길이었다. 그 무렵 왜관 담장을 함부로 넘다가 우리 복병소에 발각이라도 되면 왜인이든 조선인이든 참수형을 당했는데, 그 사형집행장이 바로 영선산 숲속이었기 때문이다. 덜렁하니 목매인 시신이 보이는 이 고갯길을 혼자서 넘기란 소름 끼치는 일이었다. 사십계단이 언제 만들어졌는지에 대한 정확한 기록은 없다. 개항 후 부산을 그들의 조계지로 만든 일본이 부산항을 매축해 대륙침략의 교두보로 만들기 위해 땅을 넓힐 때 만들어진 계단임에는 틀림없다. 오늘의 부산우체국 주변의 중앙동은 모두 바다여서 동광동과는 높은 언덕 차이였는데 일본은 이 언덕을 깎아 내려 그 흙으로 바다를 매축해 오늘날의 중앙동 시가지를 만들었다. 일제가 복병산(부산기상대와 남성여고가 있는 산)과 용두산이 이어진 허리(대청로)를 깎아서 부산우체국 언저리를 메우던 제1차 시기(1902년 7월부터 1905년 12월 까지)이거나 영주동과 중앙동을 가로막은 높은 영선산을 깎아 바다를 메워 이른바 ‘새마당’을 만들었던 제2차 시기(1909년 5월부터 1912년 8월)에 산허리의 길 아래를 매축하고 평지와 높은 길 사이에 계단을 가설했던 것이다. 그러나 시기로 보아 영선산을 착평하던 시기보다는 복병산과 영도에서 가져온 토사로 우체국 주변 시가지를 조성했던 제1차 시기로 보는 것이 옳겠다. 계단이 40개라서 사십계단이라 불렀다. 1936년(소화 11년)에 작성된<부산부시가도>에는 이 사십계단이 그려져 있다. 대역사였던 바다를 메우는 공사로 인해 부산에는 흙일하는 막노동자가 몰려들기 시작했다. 이런 막노동자를 ‘노가다’로 부르게 된다. 일본 말의 ‘도가다(土方)’가 노가다란 말로 바뀐 것이다. 이후 노가다는 우리 사회에서 막일꾼으로 통용해 부르게 되었다. 사십계단 앞 골목길에는 꼬치집(일명 ‘오뎅야’)들이 많았던 것으로 이름나서 술꾼들이 즐겨 찾았던 곳이었다. 술청에는 아코디언과 기타를 든 거리악사들이 연주하면서 탁자 사이를 돌아다녔다. 사십계단에는 이를 회상하는 의미에서 계단 중앙에 ‘아코디언 켜는 악사상’을 동상으로 조성해 놓았다. 평범하게 오르내리는 사십계단이 유명세를 타게 된 것은 6·25전쟁으로 말미암아 부산으로 몰려와 피란살이 하고 있던 실향민들 때문이었다. 물밀듯이 쏟아져 들어오는 피란민들을 더 이상 수용할 수 없었던 부산시는 이들을 산 위로 내몰았다. 그러나 피란민들은 빈터와 골목길과 길섶을 막론하고 사십계단 윗동네부터 움막을 치고 피란민 판자촌을 이뤘다. 이들은 이른 아침부터 일터를 가려면 사십계단으로 내려와야 했다. 사십계단은 피란민들이 생업을 위해서 오르내리는 길이었다. 더러는 헤어진 가족을 찾으려 온종일 헤매다가 지친 몸을 사십계단에 기대어 앉았다. 가족이 보고싶고 고향이 그리워 눈물지으며, 하늘이 무너져라 한숨을 쉬었다. 막일 끝내고 나누어 마신 소주 몇 잔에 얼큰하게 취해 버린 남정네들이 고된 몸을 잠깐 쉬는 곳도 사십계단이었다. 비록 전쟁의 포성은 들리지 않지만 가족과 집을 잃고 애통해하는 이들의 아픔은 부산을 전쟁 속으로 몰아넣었다. 전쟁이 할퀴고 간 상처는 우리 가요 속에도 남아 있다. 손로원의 시에 박시춘, 반야월 등과 어깨를 겨루던 작곡자 이재호가 곡을 붙인‘경상도 아가씨’가 전쟁의 아픔 못지않은 분단의 슬픔과 피란지 부산의 무뚝뚝한 정서를 함께 노래했다. 노래를 부른 가수 박재홍은 전기기술자로 부산으로 피란 와서 전기용품을 팔고 있을 때였다. 사십계단 층층대에 앉아 우는 나그네 울지말고 속 시원히 말 좀 하세요 피란살이 처량스레 동정하는 판잣집에 경상도 아가씨가 애처로워 묻는구나 그래도 대답없이 슬피 우는 이북고향언제 가려나 고향길이 틀 때까지 국제시장 거리에 담배장사 하더라도 살아 보세요 정이 들면 부산항도 내가 살던 정든 산천 경상도 아가씨가 두 손목을 잡는구나 그래도 눈물만이 흘러젖는 이북고향언제 가려나 영도다리 난간 위에 조각달이 뜨거든 안타까운 고향얘기 들려 주세요 복사꽃이 피던 날 밤 옷소매를 끌어잡는 경상도 아가씨의 그 순정이 그립구나 그래도 뼈에 맺힌 내고향이 이북고향언제 가려나 고향에 대한 간절함과 그리움이 경상도 아가씨의 순정과 함께 피란 총각의 가슴을 적시고 있다. 대중가요의 노랫말이지만 이보다 피란의 서러움과 아픔이 절실할 수 없고 미어지는 외로움을 달래주는 무뚝뚝하게 보였던 경상도 아가씨의 애처러운 정겨움을 잘 그려낼 수 없을 성싶다. ‘혹여 피란길에서 헤어지면 영도다리에서 만나자’던 약속의 기다림에 지친 다리를 끌고 그들의 보금자리로 가는 길녘 사십계단에 앉아 이젠 건물군에 가려서 보이지도 않는 영도다리의 환상을 좇아 가족들의 생사를 중천에 떠 있는 무심한 달에게나 빌어보고자 했던 실향민들의 간절함이 사십계단에 묻어있는 것이다. 그리고 북항에 정박해 있는 숱한 배들이 휘황하게 밝히고 있는 불빛을 쳐다보면서 향수를 달랬을 것이다. 사십계단에서 얼마 멀지 않은 부산역(당시의) 전쟁비축물자 수송화물차에서 슬쩍 빼어낸 군용물자와 구호물자들을 내다 파는 피란민들과 이를 노린 중간 상인들이 암거래를 튼 곳도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사십계단 주변이었다. 훔쳐내온 물건이었으므로 싼 가격으로 속히 팔아야 했던, 이른바 구호물자를 내다 팔던 곳, 무더기로 팔아 치우는 ‘돗데기’ 흥정도 이뤄졌다. 장사치들이 모이는 국제시장(당시 자유시장)에 가기 전에 말이다. 암거래가 트는 곳에는 ‘암딸라상’들도 모이게 마련,‘보슬비 오는 거리’를 작곡한 김인배는 부산 피란 시절 얘기를 하면서, 사십계단 바로 아래 골목을 ‘달러골목’이라 쓰고 있다. 동광동 토박이 이영근(84) 씨는 피란민들의 아픈 사연들을 눈으로 보고 들었다. 동광동 언덕바지 너머의 영주동 고지대에 터를 일구고 살던 피란민들이 역전(당시 부산역)과 연안부두까지 일터를 찾아 오르내리면서 힘겹게 살아왔던 애환을 기억 하고 있었다. 그리고 역전 대화재 후의 을씨년스러운 상황을 손에 잡힐 듯 증언한다. 1953년 11월 27일 중구 영주동 산동네 판잣집에서 일어난 불이 강한 바람을 타고 삽시간에 영선고개를 타고 넘어 옛 부산역 일대를 전소시켰다. 이른바 ‘부산역전 대화재’였다. 부산역이 불타고 부산우체국 부산일보사 등 중앙동 동광동 대청동까지를 잿더미로 만들고 6000여 가구 3만여 명의 이재민이 생겼다. 피란민 판자촌도 화마에 사라졌다. 사십계단 일대는 말할 것도 없었다. 부산시는 전소되고 황폐한 중앙동 일대를 새롭게 도시계획을 수립하면서 사십계단을 없애버렸다(그 자리에는 동광동 사무소가 오랫동안 들어섰었다). 계단 앞에서 부산역까지 넓게 뚫렸던 도로도 주택지로 만드는 등 도시정비를 다시 했다. 한참 뒤, 중구에서는 6·25의 상처와 피란민의 애환이 서린 사십계단을 옛 장소에서 50m 남쪽에다 새로 만들어서 사십계단이라 부르고 기념비도 세웠다. 그리고 중구청은 2003년 2월 사십계단에서 100m 북쪽에‘40계단문화관’을 건립해 5, 6층에 6·25와 사십계단 등과 관련한 역사자료를 전시하고 있으며‘40계단 문화 테마거리’도 조성했다. 사십계단 앞과 북쪽거리를 ‘기차거리’와 ‘부두거리’라 명명하고 그 시절의 애환이 서린 뻥튀기 아저씨, 지게꾼 부자 물동이를 이고 진 소년 소녀, 아기를 들쳐 업은 엄마 등의 조형물을 설치해 60여 년 전의 사십계단 이야기를 펼쳐 보이고 있다. 비록 한 갑자 훌쩍 지난 세월이지만 우리는 이곳 사십계단에서 물지게를 져 나르고, 아기를 들쳐 업고 피란 보따리를 머리에 인 우리들의 어머니와 누이 그리고 아버지와 형의 모습이 아른거리는 정취를 느낄 수 있는 것이다.
    Munhwa         주경업 부산민학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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