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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단군조선 후기 무렵의 인도 및 지중해연안지방~알렉산더왕국 출현

浮萍草 2013. 6. 18. 07:00
    단군조선 후기 무렵 지도. © 편집부
    나. 단군조선 후기 무렵의 인도 및 지중해연안지방 나지방에 공자가 출현하던 시기와 거의 비슷한 시기에 인도반도의 북부인 히말라야 산줄기 남쪽의 석가부족왕국에서는 부처가 출현했다. 석가모니부처가 창도한 불교는 인도지방 전래의 바라문교적인 전통을 이어 받았으나 불평등이 지배하던 바라문 사회의 모순에 의해 수탈받던 민중들의 지지를 받았다. 불교는 '평등사회건설'이라는 새로운 희망을 주는 민중의 종교로서 크게 발전해갔다. 석가모니의 제자들에 의하여 정리된 불교의 교리는 인도뿐만 아니라 히말라야산줄기를 넘어서 티베트지방과 지나지방에도 서서히 퍼져갔고 당시 지중해연안 여러 지역들과 교역 및 문화교류가 활발하던 인도의 지리적·사회적 여건에 의하여 먼 서쪽의 야만지역 까지도 인류애의 사상은 퍼져나갔다. 이 시기 전후의 인도사회의 변천을 살펴보도록 하자. 드라비다인들을 인도반도의 중·남부로 몰아 버리고 인도반도 북부지역을 장악한 아리안족이 베다를 기본으로 하는 브라만 중심사회와 바루나(카스트)제도를 수립한 이후에도 주로 북서부지역으로부터의 또다른 이민족들의 침입이 그치지 않았다. 중앙아시아의 유목민인 스키타이족들은 강력한 무력집단으로서 힌두스탄 평원의 풍요한 산물을 노리고 수차례 대규모 침공을 해왔다. 석가모니의 출신부족인 샤카족도 스키타이족의 일부로서 인도지방 북부에 정착한 종족인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정복자와 피지배자가 혼합되어 가는 가운데 지배계층의 종족적인 순수성을 지키기 위하여 시작된 것으로 보이는 바루나제도는,자연히 점차적으로 사회적 신분· 계급을 구분하는 기준으로 변해 갔다. 바루나제도에 있어서 브라만(종교지도자)·크샤트리아(왕족,귀족)·바이샤(평민)·수드라(천민) 등으로 계층이 크게 나뉘기는 하지만,그 외에도 숱한 갈래가 있어서 각 계급간의 엄격한 구분은 사실상 힘들다고 한다. 4종성 아래에는 또한 부정(不淨) 계급인 찬달라,불가촉천민(不可屬賤民)인 파리아도 있고 여성의 위치는 대체로 수드라와 비슷한 형편으로서,극심한 남·녀 불평등이 운명으로 여겨지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도 바루나제도는 종교법적인 성격과 직업분화적인 성격이 더욱 농후하다는 면에서 그리이스·로마의 신분법과는 구별되기도 한다. 하여튼 이런 사회적 불평등제도가 베다의 이름을 빌어 강제되어졌던 상태에서 등장한 자이나교 및 불교 가르침은 매우 혁명적인 사상이었다. 자신의 사회적 위치를 운명적인 것으로 체념했던 하층계급은 인류평등과 해탈을 내세운 두 종교에 대하여 큰 관심을 가지게 되어,두 종교는 주로 인도 북부지방을 중심으로 크게 교세를 확장해 갔다. 그러나 인도사회의 다양한 직업적 분화에 깊은 영향을 미치고 있던 바루나제도가 몇몇 사상가들의 힘으로 혁신되기는 어려웠으며,나중에는 불교 교단 자체내에서도 바루나적인 요소가 강하게 자리잡게 되어,불교 교단이 브라만교적인 질서 속에 흡수되어 가기도 했다. 이렇게 본고장인 인도에서는 쇠퇴해 간 불교적인 순수성이 히말라야를 넘어서 동아시아지방, 특히 삼한의 강역내에서는 잘 보존되고 발전해 왔다는 사실은 그만큼 인류평등과 인간성 계발에 적합한 토양이 아시아의 동방에 이미 존재하고 있었던 점을 반증하는 것이다. 불교와 자이나교는 페르시아의 다리우스 대왕이 인도지방 북서부인 펀잡지방까지 세력을 뻗쳐 오던 혼란한 사회분위기에서 발생하여 교세를 확장해 갔으나 샤카족 자신은 혼란의 와중에서 멸망당하는 비운을 맞는다. 석가모니는 자신의 힘으로 불타 자신의 출신 종족이기도 한 샤카족의 멸망을 구원하려다가 실패로 돌아갔는데,그대신 샤카족의 지도자였던 마하남은 자신이 희생 함으로써 샤카족의 희생을 최소한으로 막을 수 있었다. 샤카족의 멸망에 관한 기록은 다음과 같이 전해오고 있다.
     
    ▲ (左) 샤카족 © 편집부   

    "당시 복잡하던 여러 소국가들간의 관계 속에서 사위성의 왕은 사소한 사건을 트집잡아 샤카족의 가비라성을 공격하려 했다. 석가모니는 사위성의 비유리왕이 진군하는 길에 세번 나타나 설득하여 그의 공격을 멈추게 하려 했다. 비유리왕도 세번 다 군사를 거두어 되돌아 갔으나 네번째 공격때는 석가모니도 막지 않았다. 그 이유는 '어쩔 수 없는 업보이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샤카부족은 살생을 피하기 위하여 화살촉을 뗀 채 활을 쏘며 사위성의 공격을 막으려 했으므로 비유리왕은 어렵지 않게 가비라성을 점령했다. 가비라성에서는 대학살극이 벌어졌는데 이 때 샤카족의 지도자였던 마하남은 샤카족을 멸망에서 구원해내기 위하여 비유리왕에게 한가지 제안을 했다. 그 제안이란 마하남이 성안에 있는 연못속에 들어가서 다시 물위로 나올때까지 성을 빠져나가는 샤카족만이라도 살려 달라는 것이었다. 비유리왕은 "그 사이에 빠져 나가봐야 몇 명이나 나갈 수 있을 것인가?" 생각하고 그 제안을 받아 들였으나, 한번 연못속에 들어간 마하남은 샤카족이 모두 빠져나갔는데도 끝내 떠오르지 않았다. 이상하게 여긴 왕이 조사하도록 한 결과 마하남은 연못속의 나무뿌리에 자신의 머리카락을 묶어 둔 채 죽어 있었다. 마하남은 샤카족의 멸망을 막기 위하여 스스로의 목숨을 기꺼이 희생시켰던 것이다." 잔인한 적의 세력이 침공하는 것을'인연'으로 돌렸던 불타와 살신성인의 노력을 기울였던 마하남의 이야기는 많은 것을 느끼게 해 준다. 과연 누가 더 훌륭한 존재였던가? 알렉산더의 터무니없는 정복욕에 의하여 페르시아가 멸망당하고 인도반도의 서북부지역까지 유린당하는 사태가 발생하자, 분열되어 있던 아리안족의 단결이 요구 되었다. 그 중에서도 뛰어난 지도자는 찬드라 굽타였는데, 그는 히말라야 인근 지역의 여러 동맹국들과 함께 세력을 확장하여 그 당시까지 가장 큰 세력을 자랑하던 마가다 왕국을 정벌하고(서기전 321년) 알렉산더군의 장수 셀레우코스의 펀잡침략을 막아내면서 지금의 아프가니스탄 남반부와 파키스탄(발루치스탄) 지역을 정벌하여 강대한 마우리아 왕조를 건설했다. 수많은 군소국가와 부족들을 다스리기 위하여 독재적인 방법이 사용되었던 마우리아 왕조의 궁중 내에서는 암살과 온갖 음모가 난무하기도 했다. 찬드라 굽타의 아들인 아쇼카 왕은 불교를 숭상하며 도덕정치를 펼쳤으나 각 지방에서 일어나는 반란에 대해서는 철저히 무력진압하는 모순을 범했다. 이를 깊이 후회한 그는 각 지역의 태수들에게 거의 독립적인 자치를 허용하는 간접 통치방식을 채택하였으나 바로 그 점 때문에 아쇼카왕 사후 곧 이어 각 지방마다 분열이 시작되어 가기도 했다. 아쇼카왕은 인도의 여러 나라를 통합한 흘륭한 왕으로서 불교를 깊이 믿어,불교의 전파에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 점을 높이 평가받아 오고 있다. 불교는 당시에 지중해 지방까지 전파되어 후일의 기독교 성장에도 많은 영향을 끼쳤다고 한다. 불교는 대체로 자비심을 강조하고 보살행을 장려하여 사회적 불평등이나 억압받는 민중을 구제하기 위하여 긍정적인 역할을 하였지만 나중에 교단자체의 비대화에 의하여 일종의 이권단체,권력단체화함으로써 타락해 가기도 했다. 그것은 불교에서만 발생한 현상은 아니며 어떤 좋은 목적을 가진 종교라도 그것이 관료화하거나 이권단체화 하게 되면 비슷한 타락의 길을 걸을 수밖에 없다는 것은 중세유럽의 교회나 오늘날 유행하고 있는 기독교·천주교·불교 및 그 외 인간의 이성을 마비시키는 각종 사이비종교에서도 나타나고 있는 그 나름대로의 역사적 과정 이기도 하다. 다. 그리이스 고전문화시기의 사회상
    펠레폰네소스 동맹으로 막강한 세력을 자랑하는 스파르타에 대하여 아테네는 델로스 동맹을 결성했는데 델로스 동맹에는 약 사백여개에 이르는 군소국가들이 참여 했다. 이 동맹에 있어서는 처음에 각 소국들의 독립이 유지되었으나 점차로 아테네가 종주권을 행사하면서 분열의 싹을 만들었다. 아테네의 참주는 페르시아 전쟁에 공이 컸던 테미스토클레스에서 키몬으로 다시 페리클레스로 이어지면서 서양 고대사에서 자랑하는 민주정치를 구현했으나 여성 들과 노예들에게는 참정권이 인정되지 않았다. 여성과 노예가 정치적으로 동격으로 취급된 이런 현상은 마치 인도의 바루나(카스트)제도에서 여성이 천민인 수드라와 같이 취급되고 있던 사실과 별로 다를 것이 없다. 이처럼 유치하기 짝이 없는 민주정치조차 과두주의자들에게는 너무나 위험천만하게 보였으므로 서기전 411년인 펠레폰네소스 전쟁 직후에는 불과 5,000명에게만 참정권을 준 일조차 있었다. 유태인들과 마찬가지로 그리이스인들도 외부의 침략에 대해서는 일단 단결했다가도 외부의 위협이 사라지면 자기들끼리 싸우는 일이 비일비재했으며 이러한 경향은 페르시아와의 전쟁이후 약 50여년 간의 짧은 소강상태 후에 발생한 펠레폰네소스 전쟁으로 다시 증명이 되었다. 그리이스 사회는 본질적으로 참다운 민주주의사회가 아닌 노예제사회로서 노예들의 존재가 시민생활을 지탱해 주는 밑바탕이 되었다. 노예들은 주로 수공업 분야에서 많이 활용되었으나 그 외의 갖가지 잡다한 업무도 맡아 하고 있었으며 이들이 무조건 혹사당하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공공사업에 종사하던 노예들은 일반 시민과 아무런 품삯의 차이도 없었다고 한다. 서기전 4세기의 대금융업자로 알려진 파시온은 노예출신이었으며 노예들은 주인들에 의해 해방되기도 하고 자신이 품삯을 모아 주인에게 지불하고 자유롭게 되기도 했다고 한다. 또 크레타와 스파르타에서는 비교적 여성의 지위가 보장되어 여성상속권과 그 이외의 여성의 권리도 존중되었다고 한다. 라. 펠레폰네소스전쟁 전후
    펠레폰네소스전쟁 전후 © 편집부

    서기전 448년에 그리이스 연합은 페르시아와 평화조약을 맺음으로써 평화가 정착되는 듯 했다. 또한 이 시기를 전후하여 그리이스에서는 종교분야를 제외한 많은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낸 인물들이 많았다. 그러나 그러한 인물들도 동족상잔의 전쟁이 일어나는 것을 막을 수는 없었다. 아테네를 중심으로 한 델로스 동맹의 세력이 커지는 것을 우려한 펠레폰네소스동맹의 맹주 스파르타는 그리이스의 패권을 겨루는 전쟁을 도발했다(서기전 431년). 전쟁 2년째 이집트로부터 발생한 괴질에 의하여 아테네 인구 1/3이 사망하는 변고가 생기고 이때 아테네 지도자인 페리클레스도 사망했다. 이상하게도 펠레폰네소스 반도에서는 이 병이 발생하지 않았는데 페리클레스가 사망한 아테네에서는 재벌들이 데마고그스(선동정치가)로 불리우는 정치가로서 등장하는 등 혼란이 가중되었다. 아테네의 중요한 식민지였던 시칠리아섬의 시리쿠사에서 일어난 반란 진압에 실패한 아테네는 더욱 세력이 약해져서, 마침내 스파르타에게 해전에서도 패배했다. (서기전 405년) 이 때 스파르타는 페르시아의 원조를 얻어서 승리를 거둔 데다가 재정이 결집되고 인력이 고갈되어 자신이 직접 그리이스를 지배하는 데는 실패한 대신 소아시아 에서의 페르시아 종주권을 인정하여 페르시아를 등에 업고 지배하려 하였으므로, 많은 그리이스 국가들의 반발을 사게 되었다. 이에 힘을 얻은 아테네는 다시 부흥하기 시작하여 서기전 377년에는 제2아테네 해상동맹을 결성하고 평화를 이룩하려 하였으나,이번에는 스파르타와 테베가 서로 싸운 결과 스파르타가 패배하여 약소국으로 전락하는 등 그리이스 세계는 무질서와 혼돈 속으로 빠져들었다. 이러한 난세에 태어났던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은 도덕성회복과 이상사회 건설을 추구했으나 큰 성공을 거둘 수는 없었다. 특히 플라톤은 아테네의 정치가 '무지한 대중의 지배에 의한 것'으로 파악하여 이상적인 철학자가 지배하는 국가를 주장했으나, 만년에 가서는 군주제와 민주제가 적절히 상호보완하는 이상국가를 이루려 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 모든 시도는 백일몽에 그쳤을 뿐 결코 실현되지는 못했다. 전쟁 이후 지중해 지역은 상업이 대폭 발달하여 금융업 및 해상보험·신용거래 등이 성행할 정도였으나 빈·부의 격차는 더욱 심해지고 폴리스 세계의 사회불안은 가중 되어 갔다. 마. 알렉산더왕국의 출현
    알렉산더왕국 지도 © 편집부

    서양세계에 잘 알려져 있는 정복가 알렉산더는 이렇게 혼미한 그리이스 세계의 외곽지대인 마케도니아에서 성장하고 있었다. 그의 부친인 마케도니아의 왕 필립포스 2세 당시에 그리이스 세계는 마케도니아에 의하여 통일이 되어 갔는데 이로써 그리이스 폴리스 세계는 종말을 고하게 되었다. 필립포스 2세는 헬라스 연맹을 창설하고 그 맹주로 군림했다. 알렉산더의 성품에 가장 큰 영향을 준 것은 플라톤의 제자 아리스토텔레스였다. 비록 그 지식이 정확하지는 못했어도 당시로서는 박학다식했던 그는 또한 편협한 희랍인 중심주의자이자 극심한 인종차별주의자로서"노예로서는 아시아인이 적합 하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필립포스 2세가 암살당한 후 알렉산더는 그리이스 각 지방에서 일어난 여러 차례의 반란을 평정했다. 그 중에서도 테베의 반란이 가장 집요했으므로 그는 반란 평정 후 테베시를 완전히 파괴해 버리고 살아남은 모든 시민을 노예로 팔아 버리는 만행을 저질렀다. 그와 같은 강압적 수단으로 헬라스 연맹을 확고하게 다진 그는 오랜 내란으로 발생한 경제적 파탄과 내부적 불안요인들을 타개하기 위한 방법으로 오랜동안 평화 관계를 유지해 오던 페르시아를 노리게 되었다. 형식상으로는 소아시아의 그리이스인 도시들로부터 구원요청을 받고 출동하는 것처럼 하였지만 페르시아의 풍부한 산물과 영토를 노리던 알렉산더는 급속도로 소아시아반도를 휩쓸고 페르시아를 유린했다. 불과 수만명의 헬라스연합군이 페르시아와 인도 서북부까지 휩쓸 수 있었던 것은 페르시아가 얼마나 평화롭게 지내고 있었던가 하는 사실을 반증하는 것이다. 더구나 전쟁 따위는 생각도 하지 않고 지내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페르시아의 다리우스 3세는 거의 전투다운 전투도 해보지 못한 채 도피에 도피를 거듭하다가 파르티아 지방에서 반란자들에게 버림받은 끝에 중상을 입고 사망했다. 이로써 페르시아는 220여년 만에 멸망당했다. 정서가 불안정한 알렉산더는 아테네에서 따라온 타이스라는 미치광이 유녀(遊女)에게 홀린 끝에 타이스의 청을 들어 페르시아의 페르세폴리스 궁전을 불질러 버리는 정신나간 망동도 저질렀다. 그는 또한 자신의 목숨 구해 준 은인이기도 한 친구 클레이토스를 연회석상에서 창으로 찔러 죽이기도 하는 등,겉잡을 수 없는 분열증적인 성격조차 드러냈다. 그와 같은 숱한 시행착오적인 행각들을 거듭한 끝에 그는 열병에 걸려서 객사하고 광대한 영토는 세 개의 부분으로 곧 분열되었다. 알렉산더의 부하들에 의하여 셋으로 갈라진 영토는, 페르시아지방의 셀레우코스 왕조,이집트 및 시리아의 프토레마이오스 왕조,그리이스 본국의 안티오코스 왕조로 정립되었다. 각 나라는 각자의 지역적인 특성과 적당히 혼합되어 비교적 큰 갈등이 없는 듯이 지내어 갔지만 서기전 3세기 중반기부터는 지배당하고 있던 여러 민족들이 지방 국가를 일으키고 독립하기 시작하여 내란상태로 들어 갔다. 그리하여 셀레우코스 왕조는 파르티아에게, 나머지 지역은 로마에게 멸망당했다. 알렉산더의 동방침략과 함께 점령지에서는 그리이스식의 생활양식이 약 300여년에 걸쳐서 반강제적으로 보급되었다. 그리이스보다 문명이 오히려 앞서 있던 지역에 퍼뜨린 소위 헬레니즘문화는 지중해 일대와 인도 변경, 중앙아시아까지도 영향을 미쳤으나 본질적으로는 야만 정복자의 문명이었으므로 별로 볼만한 것이 없었다. 그리이스가 동방에 미친 유일한 영향이라고는 간다라 미술을 들 수 있겠는데 불상을 인간화하여 표현한 새로운 양식은 지극히 형이하학적 발상이었다. 알렉산더의 치기어린 아시아지역 원정 행각이 벌어지기 이전에 그리이스 지방에는 소크라테스·플라톤·아리스토텔레스 등 유럽지방에 현대에 이르기까지 큰 영향력을 미친 철학자나 사상가들이 등장한다. 지중해의 무역 및 여타 해상활동을 통해서 풍요한 생활을 할 수 있게 된 그리이스의 젊은이들은 방향감각을 상실한 채 자신들을 인간성의 타락으로 이끄는 방종과 쾌락주의에 어렵지 않게 빠져 들어 갔다. 대다수 민중의 삶은 노예들이나 다를 바가 없어서, 말이 민주주의이지 극소수의 대 부호들과 통치배들의 천하였다. 사회 빈부차이가 극심해지자 그러한 사회에 대해서 불만을 품고 사회적 변혁을 바라는 젊은이들도 많이 나오게 되었는데 반민중적인 통치배들은 이들을 무마시키기 위해서도 사회의 도덕감각을 아예 마비시키려 했던 것이다, 뜻있는 그리이스의 현자들은 그러한 야만화를 우려하여 여러가지 방법으로 민중을 깨우치려고 노력했다. 그 중에서도 아테네의 거리에서 직접적으로 젊은이들에게 올바른 사람의 길을 설파하였던 소크라테스는 확실히 그리이스의 고대사회가 낳은 탁월한 사상적 지도자 였다. 모든 인식의 근원을 자기 성찰에서 찾았던 탁월한 사상가는 당연한 귀결로서 인류의 평등을 주장하며,따라서 정치권력이나 부자들의 횡포에 대한 비판과 도덕심의 재발견 등을 주장하고 가르쳤으므로 인류의 이상을 잃고서 방황하던 많은 그리이스의 젊은이들은 소크라테스의 가르침을 받고자 하여 몰려들었다. 그리하여 많은 추종자들이 사회의 여러가지 모순에 눈을 뜨고 독재적인 통치배들에게 강한 비판을 일으키게 되자 이에 자신들의 부와 권력을 잃게 될 것을 두려워 한 치사한 통치배들은 소크라테스에게'사회를 혼란하게 하고 순진한 젊은이들을 잘못 가르쳤다'는 죄명을 들씌워서 독약을 마시고 죽도록 했다. 그리이스는 그 이후 급속히 내부붕괴가 진행되면서 사분오열되어 가고, 뒤에 일어난 로마에게 지중해지방의 패권을 내어 주게 되었다.
    Pluskorea    안재세 역사전문위원

      草浮
    印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