萍 - 창고 ㅈ ~ ㅎ/축생전

9. 호랑이 (상)

浮萍草 2013. 8. 2. 07:00
    지혜의 문수보살 수호하는 영물
    호림산신도. 탱화장 브라이언 베리씨 작품
    승의 왕 호랑이는 죽는 순간까지 품위를 잃지 않으려고 애쓴다. 숨이 끊어지기 직전까지도 다른 짐승에게 먹히지 않도록 온 힘으로 꼿꼿한 자세를 취하다 죽는다고 한다. 어둠 속에 먹이를 노릴 때 형형히 빛나는 눈빛은 매섭다. 날렵하고 균형 잡힌 몸매와 늠름함,포효하는 울음소리는 공포였다. 그러나 조선시대 호랑이는 공공의 적이었다. 잡으면 나라에서 상을 내렸다. 울산 동구 마골산 불당골에는 착호비(捉虎碑)가 있다. 말을 키우는 하급관리 전후장이 영조 22년(1746)에 호랑이 5마리를 잡아 ‘절충장군’ 직을 받았다는 거다. 그는 호랑이 사냥에 일가견이 있었다. ‘승정원일기’에 보면 영조 33년(1757)에도 호랑이를 잡아 가선대부(嘉善大夫,조선 시대 종2품 아래 관직)로 벼락 승진했다. 남한의 마지막이라고 알려진 호랑이는 어떻게 됐을까. 자연사는 아니었다. 대한제국 말 1908년 2월 영광 불갑사 뒤 고개에서 나무꾼이 함정을 이용해 호랑이를 잡았다. 소식을 들은 일본인이 당시 논 50마지기 값인 200원으로 호랑이를 샀다. 그는 호랑이를 박제했다. 다시 한국으로 돌아와 일본인들이 다니 던 목포 유달초등학교에 기증했다. 영광 불갑사 일주문 옆엔 그 호랑이를 모형으로 제작한 조형물이 있단다. 두려운 동물인 만큼 숭배의 대상이기도 했다. 잡귀와 재앙을 물리치는 힘이 있다고 믿었다.
    결국 사람들은 호랑이와 산신이 손을 잡게 만들었다. 사찰 산신각에서 산신을 보좌하는 호랑이 그림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는 이유다. 예천 용문사 산신도에는 푸른 관을 쓰고 붉은 도포를 입은 산신이 호랑이 등에 기대어 만족스러운 미소를 띠고 있다. 수원 팔달사와 서울 화계사 명부전 벽화에 토끼가 호랑이에게 담배를 물려주는 모습은 정겹기까지 하다. 산신각은 민간신앙이었던 산신 사상과 불교가 습합하면서 나타난 독특한 문화다. 인자하거나 해학적인 그림은 호랑이에 대한 공포를 없애고 호환도 막고 싶었던 슬기가 엿보인다. 한 마디로 일석이조를 노린 셈. 산신과 호랑이에 얽힌 흥미로운 얘기가 전한다. 하얀 눈썹을 가진 호랑이가 흰 수염을 가진 할아버지로 변해 마을로 내려갔다. 희한(?)하게도 마을 사람들은 하나같이 교만한 여우 등 탐욕 가득한 축생으로 보였다. 호랑이는 야차 같은 사람들은 잡아먹었다. 어느 날 스님이 “과보 받는다”고 호랑이를 꾸짖었다. 그러자 호랑이는 눈썹 하나를 스님에게 줬다. 다음 날 스님은 저잣거리에서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다. 정말 많은 이들이 모습만 사람이었다. 스님은 혀를 끌끌 찼다. 호랑이의 용맹함은 불법을 수호하는 영물로 추앙 받는다. 지혜를 상징하는 문수보살이 타고 다니는 동물이 바로 호랑이다. 보살이 중생들에게 지혜를 전할 때 어김없이 호랑이가 등장한다. 위엄과 용맹으로 지혜를 수호하는 영물이라는 증거다. 그래서 당대 선지식을 ‘호랑이’라고 칭하기도 한다. 가야산에는 성철 스님 호랑이가“절돈 3000배를 내놓으라”며 호령했다. 세간에서는 인홍 스님을 ‘가지산 호랑이’,활안 스님은 ‘조계산 호랑이’로 일컬었다. 서릿발 같은 가르침 때문이다. 그런데 1700년 동안 한반도 정신에 면면히 흘러온 불교는 토끼일까, 호랑이일까.
    법보신문 Vol 1099        최호승 기자 time@beop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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