萍 - 저장소 ㅁ ~ ㅇ/불교미술의 해학

12. 한잔 차 속에 담긴 ‘道’

浮萍草 2013. 7. 16. 07:00
    “제가 지금 깨끗한 물로 감로의 차를 만들어서 삼보 전에 바치오니 원하건데 어여삐 받아주소서” 사찰에서 새벽 예불 때에 부처님께 올리는 예불의 첫 소리이다. 새벽에 차를 올리는 것으로 사찰의 하루가 시작된다.
    “차 한 잔 드시게나…깨달음이 거기있네”
    삼매로 차 맛 즐기는 선사 표정, 즐거움 가득 뚫어져라 찻잔 관조하는 모습…신비감 전해져
    영덕 장육사 벽화
    리나라에서 차를 부처님께 올려 예경하는 일은 오래 전부터 이어져 왔다. <삼국유사> 권3 탑상 제4에 오대산 오만 진신,명주 오대산 보질도 태자 전기에 “정신대왕의 태자 보천과 효명 두 형제는 매일 골짜기 속의 물을 길어다 차를 끓여 5만 불보살에게 공양을 올렸다.” “오대산 신성굴에서는 도리천의 신이 하루 세 번 보천의 설법을 듣고 정거천 (淨居天)의 무리들이 차를 끓여 바쳤다.”하였으며,삼국유사 권2 기이 제2 경덕 왕 충담사 표훈대덕 조에 보면“충담스님은 앵통(櫻筒)속에 다구(茶具)를 넣고 다녔으며 매년 3월3일과 9월9일에 차를 끓여 남산 삼화령의 미륵세존께 올렸으며 경덕왕에 차를 끓여 바쳤는데 찻잔 속에서 향기가 풍겼다.”는 기록이 있어 부처님께 이른 봄에 딴 햇차(첫물차)를 올렸던 것으로 여겨진다. 또한 <삼국유사> 감통 제7 월명사의 도솔가조에 보면 “경덕왕 19년 경자년 4월 초하루에 두해가 나란히 나타나 열흘이 되어도 사라지지 않았다.
    이에 월명사가 도솔가를 지어 부르니 얼마 후 해의 괴이함이 곧 사라졌다. 왕은 기뻐하며 좋은 차 한 봉지와 수정염주 108개를 주었다”하여 차가 왕실 등에서 애용되었던 것으로 느껴진다. 이 뿐만 아니라 고려시대에 성행하였던 차 마시는 풍습은 조선전기에 종묘에 햇차를 올리는 의식,중국사신을 맞이하는 다례,제사에 사용되어 ‘차례(茶禮)’ 라 하였다. 이처럼 우리민족은 옛 부터 오늘에 이르기 까지 꾸준히 차를 애용하여 왔다.
    예천 용문사 산신도 일부
    스님들은 차를 참으로 좋아한다. 어느 누구에게도 평등한 마음으로 한 잔의 차를 전해준다. 큰 거울 앞에서는 친(親)하고 소원(疏遠)하고가 없는 그 모습 그대로 보여 지는 것 처럼 편한 마음으로 차를 권하면 마알간 찻잔에 전해지는 향기가 부처님 마음처럼 그렇게 다가온다. 옛날 당나라 조주스님은 찾아오는 선객(禪客)들에게 “그대는 전에 여기 온 적이 있는가?” “있습니다.” “차 한 잔 들게나.” “없습니다.” “차 한 잔 들게나.” 보다 못한 원주(院主)스님이“여기 온 적이 있어도 차 한 잔,없어도 차 한 잔,도대체 무슨 뜻입니까?” 물으니“원주스님도 차 한 잔 들게나.”하였다는 유명한 일화가 있다. 차 한 잔으로 깨달음에 이를 수 있다는 역설적이고 해학적인 유머가 풍부한 말이다. 이 한 잔의 차로 깨달음을 이루어야 한다는 목마름을 사라지게하기도 하고 한 잔의 차 맛이 깨달음의 본질임을 알게 하기도 하며,분별을 없애는 차 맛의 본성을 일깨워 주는 말이기도 하다. 다반사(茶飯事)란 말이 있다. 다반사는 항다반사(恒茶飯事)로“늘 있어 이상하거나 신통할 것이 없는 일상의 일” 로 이 말은 도(道)에 이르는 길은 늘 차를 마시는 일이나 밥을 먹는 일과 같아 늘 하는 일상의 일로 보아왔다. 이러하듯 사찰에서 차 마시는 일은 평상심(平常心)을 일깨워주어 곧 도에 이르게 하는 매개체로 생각해 왔다. 한 잔의 차는 욕심을 없애고 분노의 마음을 가라앉히고 어리석음을 멎게 하여 지혜의 문으로 들어가게 하는 감로수일 것이다.
    선사의 차 마시는 모습은 그림으로 그려져 도(道)를 표현하는 방법이 되기도 하였다. 종종 사찰의 처마 밑 포벽의 벽화나 전각의 불화를 보면 선사들의 차 마시는 모습이 눈에 띤다. 자세히 살펴보면 차를 앞에 두고 졸고 있는 모습,차를 뚫어지게 바라보는 모습,차를 마시는 모습,동자가 차를 달이는 풍경 등이 해학적으로 표현되었음을 느낄 수 있다. 벽화에 나타난 선사들의 차를 대하는 여러 가지 모습은 여유와 직관, 초탈 등 탈속적인 표현으로 나타나 해학의 향기와 함께 깊은 깨달음의 경지를 느끼게 하는 것 같다. 먼저 상주 남장사 극락전 내부 벽에 그려진 선다(禪茶)를 보자. 깊은 산속 바위 위에 차 한 잔을 올려놓고 노송아래에서 좌선삼매에 든 선사는 가사를 걸치고 손으로 잡고 있는 지팡이는 미끄러져 이마에 닿아 있다. 차 향기에 취하였을까? 봄날의 노곤함에 졸고 있는 것인가? 고개를 떨어트리고 눈을 감은 무념의 표정은 차 맛을 보지 않고 느끼는 차와 선이 불이(不二)의 경지를 보여주는 듯 신비감을 불러 일으킨다. “거참 차 맛 한 번 좋데이!” 삼매로 차 맛을 즐기는 선사의 여유로움이 즐거움을 더해준다.
    상주 남장사 벽화. 차를 앞에 두고 앉은 노스님의
    모습이 정겹다.
    이번엔 영덕 장육사 대웅전으로 가 보자. 이곳엔 차와 씨름하는 선사가 있다. 기이한 바위 위에 한 잔의 차를 올려놓고 붉은색 통견을 걸친 결가부좌의 한 선사가 뚫어지게 찻잔을 바라다본다. 선사 뒤에도 기이한 바위가 있어 범상치 않음을 보여준다. 무슨 일일까? 차와 한판승부라도 하겠다는 것일까? 두 눈을 크게 뜨고 차의 향기를 바라다본다. 삶을 여실히 보는 것일까? “니눔이 이기나 내가 이기나 해보자!” 한판으로 찻잔이 깨어지고 바위가 깨어지며,만상이 사라지는 경지를 느끼려는 듯 찻잔을 응시하는 모습이 익살스럽다. 눈으로 차 맛을 관조(觀照)하는 선사의 직관이 해학적이다.
    이것 말고도 차 맛을 아는 방법이 있으니 너무나 인간적인 모습이라서 오히려 재미있다. 보성 대원사 극락전의 벽화에는 “차 맛은 마셔 보아야 안다”는 현실적인 그림이 있다. 흰 도포를 걸친 선사가 야외에 꽃구경을 나왔다. 바위틈에 핀 붉은 꽃을 보다가 갑자기 차를 마시고 싶어 등 뒤의 붉은 찻상에 놓인 차를 몸을 비틀어 오른손으로는 땅을 짚고 왼손으로 찻잔을 들어 차를 들이킨다. 얼마나 목말랐을까? 중생의 목마름을 대신 하는 것일까? 차를 마시는 모습 또한 역동적이고 파격적이다. “차는 마셔 봐야 맛을 알지라이. 요것이 보성 차 맛이여!” 불교는 관념적인 것이 아니고 현실적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듯 자신의 차 마시는 모습에 개의치 않고 배고프면 밥 먹고 졸리면 자는 평범한 진리를 일깨워주는 이채로운 그림이다.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를 통해“색성향미촉법(色聲香味觸法)”으로 느끼는 차 맛은 중생의 고정관념을 깨는 또 하나의 가르침인 듯 재미있다.
    보성 대원사 벽화.
    또한 예천 용문사 산신도에 나타난 동자의 차 달이는 그림을 보자. 심산유곡에서 쇠 화로에 큰 주전자를 올려놓고 물을 끓인다. 오른손에는 태극부채를 들고 왼손에는 불쏘시개를 집어넣으려 한다. 불이 붙어 활활 타오르자 쇠 화로의 귀면은 속에 불이 나 눈,코를 찡그리며 동자를 바라본다. 뜨겁다고 항변하는 귀면과 짐짓 무표정으로 일관하는 동자 사이에 해학이 흐른다. 사찰의 조그마한 포벽에 구속받지 않는 달관의 경지를 익살과 해학으로 드러내는 선사의 차 한 잔. 일상의 분주한 삶 속에서 여유를 갖고 삶을 관조하면 이렇듯 유연한 생각이 나오는 것을 조상들은 알았으리라.
    불교신문 Vol 2414         권중서 조계종 전문포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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