萍 - 저장소 ㅁ ~ ㅇ/불교미술의 해학

2. 부처님 성도 속 재밌는 표현들Ⅰ

浮萍草 2013. 5. 7. 07:00
    불교의 4대 명절인 성도일. 부처님의 성도는 참으로 위대하다. 음력 12월8일은 부처님께서 도를 이루신 날로 이세상의 어두움과 중생의 어리석음을 몰아내신 날이다. 삶과 늙음, 병들음과 죽음의 이치를 낱낱이 아셨으며 이 세상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그 방법을 아신 날이 바로 성도일이다.
    엄숙한 佛畵, 그 속에 숨겨진 익살의 향연
    흥국사 설산수도상 속 ‘목욕 모습’ 흥미로워 부처님에 도전한 마왕, 보병과 줄다리기 한판 밧줄 잡은 졸개들, 전쟁보다 ‘유희’ 즐기는 듯
    ‘마왕의 공격’ 남양주 흥국사 소장.
    처님의 깨달음을 어떻게 표현할 것인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깨달음은 물질적인 요소로 설명할 수 없는 형이상학적 고차원적인 문제 이므로 쉽게 접근할 수 없을 것이다. 우리 조상들은 부처님의 성도를 어떻게 표현하였을까? 이 거룩한 순간을, 하늘과 땅의 스승으로 다시 태어난 이날을 어떤 느낌으로도 표현하기가 어려웠으리라. 그러나 우리 선조들은 마치 부처님의 성도를 옆에서 생생하게 지켜본 사람 처럼 부처님의 깨달음을 표현함에 있어 마음껏 상상의 나래를 펼쳤다. 그것도 경전에 근거하여 사실 그대로의 표현을 해학적인 묘사를 통해 더욱 극적으로 장엄하였다. 더욱이 그 장소는 인도 마가다국이 아니고 우리나라이며 부처님의 모습과 하늘의 신과 인간 모두 한국인의 얼굴뿐만 아니라 깨달음을 집요하게 방해 하는 마왕 파순의 무리 또한 우리의 모습이다. ‘신라불국토설’이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은‘신라는 부처님의 나라이다.’라는 뜻으로 즉 우리나라는 원래 부처님이 태어나신 곳이고 성불하신 곳이며,설법하신 곳이요, 열반에 드신 곳으로 인도의 싯다르타 태자가 아니라 한국의 싯다르타 태자이며 우리와 피를 같이한 한국인 부처님으로 믿어온 우리 조상들의 또 다른 지혜를 엿볼 수 있다. 부처님의 거룩하신 깨달음이 완성되기까지는 먼저 뼈를 깎는 6년 고행이라는 극적인 방법이 선택되었다. 불화에서 나타나는 고행도가 바로 그것이다. 피골이 상접하여 차마 살아있는 사람이라고 말할 수 없을 정도의 처참한 몰골이다. 경전에서는 고행의 장면을 묘사하기를“살갗은 익지 않은 오이가 말라비틀어진 것 같았고 드러난 갈비뼈는 부서진 헌집의 서까래와 같았으며 척추는 대나무 마디와 같았다. 뱃가죽을 만지면 등뼈가 만져지고 해골이 드러나고 눈이 깊이 꺼졌다. 그러나 눈빛만은 깊은 우물속의 별빛과 같이 반짝이며 빛나고 있었다” 하여 깨달음을 구하려는 강한 의지를 나타내고 있다. 그러나 육체적 고행이 깨달음에 도움이 되지 못한다는 것을 안 부처님은 네란자라 강에서 목욕을 하시고 수자타 소녀의 우유죽을 얻어 드신 다음 목동이 베어서 바친 부드러운 풀 위에서 결가부좌하여 ‘정각을 이룬 후에야 자리에서 일어나리라’ 말하며 선정에 드셔서 드디어 7일 만에 정각을 이루셨다. 이러한 성도를 이루기 위한 장면이 불화에는 아주 재미있고 해학적인 표현으로 나타난다.
    남양주 흥국사 만월보전 내 팔상도 중 부처님께서
    네란자나 강에서 목욕하는 장면.
    남양주 흥국사 만월보전 팔상도 중 설산 수도상의 상단부분에는 설산에서 수도하시는 모습을 재미있게 표현하였다. 부처님께서 네란자라강에서 목욕하는 장면과 수자타 소녀가 우유죽을 올리는 장면이다. 화면 중앙의 부처님께서 붉고 긴 수건을 어깨에 걸치시고 등 뒤의 때를 직접 미시는 장면은 6년 고행동안 씻지 않은 묵은 때를 벗겨내듯 그동안의 고정관념을 탈피하고 새로운 사유의 세계를 느껴는 듯 아주 시원해 하는 모습이 곧 성불할 수 있음을 암시하고 있어 흥미롭다. 또한 왼쪽 상단에 부처님의 목욕과는 상관없이 땅속의 지신이 솟아올라 땅이 흔들리고 나뭇가지가 흔들리니 나무의 신은 간신히 나뭇가지를 잡고 버티는 것 또한 해학적이다. 부처님 말고 다른 대상을 설정하여 하나의 경직성을 깨는 해학적 표현을 볼 수 있다. 화면 왼쪽의 3여인이 그릇에 우유죽을 바치며 “제가 바친 공양을 받으시고 어서 성불하시라”는 듯 서로 경쟁적으로 부처님께 공양을 올리며 재촉한다.
    벌써 공양을 받으셨는지 철저한 고행의 모습은 오간데 없고 벗은 상체의 부처님의 몸에는 이젠 살이 적당히 찌고 배도 부르며 팔 다리의 강건함이 넘친다. 흰 피부는 부처님의 새로운 세상을 예견하듯 탄력이 있으며 이를 증명이라도 하려는 천신이 공손한 모습으로 이 장면을 지켜보고 있다. 목욕과 우유죽 공양을 받으신 부처님은 길상초를 깔고 선정에 드셨을 때 어떤 미동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새가 부처님의 머리 위에 집을 짓고 사는 장면에는 깨닫지 못하면 이 자리에서 죽겠다는 비장한 긴장감마저 흐른다. 그러나 새들은 부처님과는 상관없이 새끼를 기르며 오히려 평화스러운 가족적인 모습을 보여주어 해학적인 대조적 요소를 잘 나타 내고 있다. 이러한 장면의 표현은 사찰마다 조금씩 다르기는 하나 양산 신흥사 포벽 설산수도상은 부처님의 머리위에 까치가 집을 지어 새끼를 품고 있는 모습이다.
    마왕 땅의 부처님을 유혹하는 장면
    이러할 즈음 마왕 파순은 어리석은 중생을 먹이로 삼아 왔는데 부처님의 성도로 모든 중생이 깨달음에 이르면 자신의 먹이가 사라져서 굶어 죽기 때문에 죽느냐 사느냐 생존의 문제를 고민하게 된다. 오직 부처님이 깨달음에 이르지 못하도록 방해하여야만 자신이 살 수 있는 절대 절명의 위기를 맞이하였다. 이러한 내용을 남양주 흥국사 만월보전이나 부산 범어사 나한전의 팔상도 수하항마상에 잘 나타나 있다. 부처님께서 보리수 아래서 깨달음을 이루실 것을 안 마왕파순은 이대로 물러설 수 없다며 그림 하단에 전쟁을 치룰 준비를 하고 코끼리가 이끄는 수레를 타고 군대를 이끌고 앞선다. 인도산 코끼리만 있겠는가? 산신령을 배신한 우리의 호랑이도 마왕의 군인들과 함께 따라 붙는다. 저들끼리 웃고 떠들고, 참으로 재미있다. 우리나라 동물을 대표하는 호랑이가 하필이면 파순의 군대에 합류하여 부처님을 공격하다니 아이러니하다.
    그림의 중단 왼쪽부분에는 먼저 마왕자신의 세딸을 부처님께 보내어 미인계를 쓴다. 그림 속 거울을 든 마왕 파순의 딸은 미인이 아니라 못생긴 중년의 얼굴이다. 마왕으로서는 자신의 딸이 제일 예뻤으리라. 가슴에는 욕망의 새가 가득하다. 비상비비상처천을 뛰어 넘으신 부처님은 이러한 욕망의 세계를 간단히 물리친다. 마왕 파순이 마지막 카드인 군대를 동원하여 부처님 앞에 당도하였다. 한판 생사의 승부를 가리려 함이다. 부처님은 아무리 마왕의 무리라 하여도 살생을 할 수 없다. 오직 자비심을 내어서 마왕의 도전에 응하신다. 부처님은 깨달음의 큰 힘을 상징하는 동(銅)으로 만든 병인 보병(寶甁)을 부처님 앞에 내어 놓았다. “너희들이 이 보병을 쓰러뜨리면 나는 깨달음을 이루지 않을 것이다.” 말하니 마왕의 군대는 “얼씨구나 좋다” 하고 여러 갈래의 밧줄을 보병에 걸고 마왕 파순의 진두지휘아래 줄다리기를 한다. 운동회에서 해본 줄다리기는 정말 젖 먹던 힘을 쏟아야 한다. 얼굴이 붉어지고 팔다리 근육이 불끈 불끈 솟아오른 마왕의 군인들은 안간힘을 다 쓴다. 보병 주둥이를 잡고 바깥다리 거는 놈,힘을 모으기 위하여 북을 치며 격려하는 놈,빨리 당기라고 꽹과리를 두들기며 독촉하는 놈, 아예 보병이 넘어지지 않으니 밧줄을 이빨로 물고 늘어지는 놈, 등등 수십 수천의 마왕 무리들이 신나게 줄다리기 전쟁을 한다. 대상은 보병 하나뿐인데 이렇게 쩔쩔 매다니 어느 초등학교 운동회 구경을 하는 듯 재미있고 신나며, 해학적이다, 유머 감각도 풍부하다. 무기를 쓰지 않고 오직 밧줄에 목숨을 건다. 그것도 이기지 못한다는 것을 안 것일까? 죽자, 살자하는 전쟁판이 아니라 즐기고 노는 모습에서 여유가 넘친다. 부처님은 미소 지으며 설법을 하신다. “이놈들 보아라. 이 보병 하나 쓰러뜨리지 못하면서 마왕의 군대라 하느냐? 나는 지나온 여러 겁 동안 인욕바라밀을 실천하여 오늘의 도를 이룩하였느니라. 너희들이 온갖 유혹으로 내가 도를 이루지 못하도록 하나 내 마음은 항상 고요하다. 마왕이여 물러가라! 물러가라!”
    불교신문 Vol 2393         권중서 조계종 전문포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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