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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 마지막 수도 부여와 토박이 고고학자 심상육

浮萍草 2016. 4. 13. 12:29
    찬란하였으되 너무도 허망하였느니라
    700년 꽃피웠던 화려한 백제 마지막 수도 사비성 나당 연합군 공격 한 달 만에 어이없이 王國 멸망 서동 전설 어린 궁남지는 연인들 나들이 장소로 토박이 학자 심상육 "생각할수록 애잔한 역사" ㆍ마지막 날 풍경 바람이 부는 음력 8월 2일,백제 수도 사비성 왕궁에서 잔치가 벌어졌다. 서기 660년이었다. 대청마루 위에는 당나라 장군 소정방과 신라 태종 무열왕이 앉아 있었다. 마루 아래 땅바닥에는 백제 의자왕이 앉아 있었다. 마당 한가운데에는 백제로 망명한 신라 장수 검일(黔日)이 포박된 채 앉아 있었다. 18년 전인 642년 7월 검일은 백제군에 포위된 대야성(大耶城) 식량창고를 불태웠다. 검일은 성주인 김품일에게 아름다운 아내를 빼앗긴 한(恨) 풀이를 벼르던 사내였다. 그 전투에서 성주 김품일과 고타소랑(古陀炤娘) 부부가 죽었다. 고타소랑은 태종의 딸이고 김품석은 사위였다. 18년이 흘렀다. 태종이 말했다. "너는 죄가 세 가지다. 창고를 불질러 성 안에 식량이 모자라게 하여 싸움에 지도록 하였고 품석 부부를 윽박질러 죽였으며 백제와 더불어 본국을 공격한 죄." 신라 병사들은 검일의 팔다리를 소 네 마리에 묶어 찢어버리고 백마강에 던졌다. 백제 왕국 678년 역사도 끝났다. 7월 9일 금강 하구 기벌포에 상륙한 당나라 부대와 같은 날 황산벌에서 계백 부대와 맞붙은 김유신 부대가 사비성에 진군한 지 한 달도 지나지 않은 날이었다. 고고학자 심상육과 궁남지(宮南池)
    부여에서 나고 자란 고고학자 심상육
    부여군립 백제고도문화재단 책임연구원 심상육은 1973년생이다. 백마강 지류인 왕포천 건너 장암면 정안리가 고향이다. 마을 주변에는 백제 시대 가마터가 있었고 선산에는 고분이 널려 있었다. 중학교 때는 배를 타고 강 건너 읍내로 소풍을 갔다. 옛 절터인 군수리사지에 오르면 궁남지(宮南池)가 있었다. "자연스럽게 역사에 관심이 있었는데, 어찌 하다 보니 고고학자가 되었다"고 그가 말했다. 기록에 따르면 서기 634년 3월 의자왕의 아버지인 무왕이 성 남쪽에 20리 물길을 내 못을 만들고 버드나무를 심고 한가운데에 섬을 만들었다. 4년 뒤 3월에는 "왕과 왕비가 큰 연못(大池)에 배를 띄웠다"고 돼 있다. 전설에 따르면 무왕은 서동이고 왕비는 신라 진평왕의 딸 선화공주다. 두 나라가 피터지게 싸우는 와중에 벌인 사랑이라, 궁남지는 연인과 예술가들이 즐겨 찾는 관광지가 됐다. 부여를 상징하는 캐릭터도 서동과 선화공주요,궁남지가 있는 곳 이름도 서동공원이다. 하지만 '궁 남쪽 연못'이라는 기록만 있을 뿐, 이 연못이 궁남지라는 다른 근거는 없다. 부여에서 나고 자란 70대 김요한-원한 자매는 "지금처럼 정비돼 있지는 않았지만 어릴 적에도 궁남지 못가에서 놀았다"고 회상한다. 밤이면 연못가 버드나무 밑동에 조명이 켜지고,작은 섬 위에 있는 정자도 불을 밝힌다. 이 평화로운 풍경 속에서 백제가 망했다. 평화를 그리워할 틈도 없이 순식간에 망했다. ㆍ7세기, 멸망으로 가는 나날들
    백제를 둘러싼 7세기 동아시아 역사는 복잡하다. 시대순으로 짤막하게 언급을 해본다. 641년 의자왕이 즉위했다. 642년 의자왕이 신라 깊숙이 쳐들어가 대야성을 함락시켰다. 백제 사령관 윤충은 김춘추의 딸과 사위 목을 잘라갔다.
    88년 전인 554년 관산성에서 성왕 목을 잘라간 신라에 대한 복수였다. 648년 딸을 잃은 김춘추가 나당연합을 제안하러 당나라로 떠났다. 그해 김유신이 옥문관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고 대야성 성주 김품석 부부 유해와 생포한 백제 장수 8명을 맞교환했다. 6 51년 당나라는 두 차례 벌인 고구려 공격에 실패하면서 백제에게 신라와 화친하라고 요구했다. 백제는 이를 무시하고 655년 고구려, 말갈 연합군과 함께 신라 북쪽을 공격했다. 세상은 합종연횡이 한창인데, 백제는 유아독존이었다.
    사비성에 밤이 왔다. 궁남지(宮南池)에도 밤이 내렸다. 서동과 선화공주의 사랑이야기는 전설이 되었다. 찬란했던, 허망했던, 백제였다. /박종인 기자

    기록에 따르면 655년 이후 백제에 해괴한 일이 벌어졌다. 붉은색 말이 한 절 대웅전에 들어가 죽었다. 659년 2월 흰 여우 한 마리가 상좌평 책상 위에 앉았다. 4월에 태자궁 암탉이 참새와 교미를 했다. 밤에는 귀신이 궁궐 남쪽 길에서 "백제는 망한다" 고 울었다. 대야성 전투에서 대승을 거둔 의자왕은 개의치 않았다. 승리감에 취해 태자궁을 화려하게 수리했고 왕궁 남쪽에 큰 정자를 세웠다. 왕비와 비, 궁녀들과 함께 술을 즐기며 충신들을 멀리했다. 이미 648년 김춘추가 맺은 나당동맹이 차근차근 진행돼 659년에는 백제를 칠 준비가 완료돼 있는 상태였다. ㆍ부소산성 삼충사와 의자왕
    고고학자 심상육이 말했다. "백제사는 기록도 많지 않은 데다 그나마 있던 유물과 기록도 사비성이 약탈되면서 망국과 함께 사라졌다. 발굴되는 기와에는 음양각으로 도장이 찍혀 있는데, 그게 무슨 뜻인지도 수수께끼다." 심상육은 "그래서 백제사는 알수록 애잔하다"고 했다. 기록이 드문 이유가 망국에 따른 철저한 유린과 약탈이라서 더 그렇다고 했다. " 나는 부여 사람으로서, 고고학자로서, 부여 사적을 발굴하는 혜택을 받고 산다." 그의 말에도 애잔함이 배 있다. 해동증자로 존경받던 의자왕은 말년에 승리감에 도취해 충신들을 버렸다. 삼국사기는 왕이 "황음무도(荒淫無道)했다"고 평가했다. 주색에 빠져 도리를 다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656년 좌평 성충이 "정신차리시라"고 극간(極諫·목숨을 걸고 아뢰는 일)했다가 옥에 갇혔다. 성충은 "기벌포와 탄현을 지키시라"고 유언하고서는 "백제 망하는 꼴 안 본다"며 단식하다 죽었다. 660년 바른소리하다가 유배를 당했던 또 다른 충신 흥수도 같은 취지로 조언을 했다. "듣지 마시라"는 간신들 말에 왕이 혹하던 그 순간 나당연합군은 기벌포와 탄현을 장악하고 사비성으로 진군 중이었다. 계백이 탄현으로 나가 신라군에 맞섰지만 중과부적이었다. 오천 결사대도 목숨을 걸었지만 5만 신라군도 목숨을 걸었다.

    낙화암 길목에 있는 소나무 연리지(連理枝). 한 뿌리에서 나와 갈라졌다가 다시 만났다(왼쪽 사진). 당나라 장수 소정방이 '백제를 평정했다'고 새긴 정림사지 오층석탑. 신라군은 승리가 아니라 백제 멸망이 목표였다. 아무리 피해가 극심해도 무조건 최단 시간에 당나라 군사와 만나 사비성을 함락시켜야 했다. 진군 거리는 하루 20㎞로, 6·25전쟁 때 인민군이 남진하는 속도와 비슷했다. 불과 한 달 만에 13만 당나라 대군과 5만 신라군에 백제는 사라졌다. 마지막까지 백제를 지켰던 세 충신은 부소산성 삼충사 사당에 모셔져 있다. ㆍ100년 이어진 가문의 복수
    의자왕은 옛 수도인 웅진(공주) 공산성으로 후퇴해 농성전을 노렸지만 성에 들어간 지 닷새 만에 항복하고 성문을 열었다. 백성들 피해를 우려한 배려였다는 말도 있고 웅진 장수 예식(禮寔)이 왕을 강제 투항시켰다는 말도 있다. 먼저 투항한 왕자 융(隆)에게 신라 태자 법민(法敏)이 침을 뱉으며 쏘아붙였다. " 네 아비가 내 누이동생을 부당하게 죽여 감옥 안에 묻었다. 나는 20년 동안이나 마음이 아팠고 머리를 앓았다." 크게는 국가들이 벌인 전쟁이요 작게는 개인적인 복수심이 만든 전쟁이었다. 대야성 전투는 88년 전 할아버지 성왕이 참수당한 데 대한 복수였다. 대야성 성주가 저지른 패륜은 한 사내를 한(恨)을 품게 만들었다. 그 분노가 끝없이 증폭돼 20년 뒤 나라 하나를 치욕스럽고 급작스러운 멸망으로 이끌게 된 것이다. ㆍ2016년 사비성, 부여
    당나라 병사들은 사비성을 휩쓸며 약탈을 자행했다. 소정방은 도성 한가운데에 있는 오층석탑에 '대당이 백제를 평정했다'는 글을 새겨넣었다. 오랜 기간 '평제탑(平濟塔)'이라 불리던 탑은 정림사지 오층석탑으로 개명됐다. 왕궁이 있었던 관북리 왕궁터는 폐허가 됐다. 삼천 궁녀가 뛰어내렸다는 궁터 북쪽 부소산 낙화암은 그대로다. 당시 사비성 인구가 5만이었으니 궁녀가 3000명이라는 말은 터무니없다. 낙화암 가는 길목에는 소나무 한 그루가 두 팔을 붙이고 서 있다. 밑동에서 갈라졌다가 윗동에서 다시 해후한 기이한 나무다. 백제를 닮았다. 나당연합군이 진격한 사비도성 성곽은 발굴이 한창이다. 이 모든 곳이 지난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됐다. 가장 찬란했고 가장 허망한 나날이 공존하는 유적들이다. 모두 걸어서 돌아볼 수 있는 거리에 있다. 1993년 12월 12일 사비성 동쪽에 있는 능산리 계곡 주차장 공사 도중 진흙 물구덩이에서 금동대향로가 발견됐다. 발굴팀은 "당나라 군대의 방화와 약탈을 피해 승려들이 황급히 숨겨두고 도주했을 것"이라고 추정했다. 궁남지도 깔끔하게 정비됐다. 아무도 모른다. 제대로 된 발굴 작업 없이 정비된 이 연못이 과연 무왕과 선화공주가 노닐었다는 그 연못인지. 토박이 고고학자 심상육이 말했다. "나는 이곳을 궁남지로 알고 소풍을 다녔고, 어른이 되어서는 궁남지에서 사랑을 만났다. 이곳이 아니라는 증거는 없다. 우리는 궁남지로 추정한다." 의자왕은 항복 한 달 뒤 네 왕자와 귀족 88명, 백성 1만2807명과 함께 당나라로 끌려갔다. 두 달 만에 낙양에 도착한 의자왕은 며칠 뒤 죽어 북망산에 묻혔다. 2000년 부여군은 낙양시로부터 왕자 부여융의 묘지석 복제품과 북망산 흙을 기증받아 능산리에 가묘를 만들었다. 가장 찬란한 시절, 가장 드라마틱하게 생을 마감한 사내가 귀향했다. 1340년 만이었다.
          박종인 조선일보 여행문화 전문기자 seno@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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