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W T = ♣/스트레스 클리닉

‘미안해’ 병에 걸린 것 같아

浮萍草 2016. 1. 27. 10:14
    ㆍ나만 맛있는 거 먹고 좋은 데 가면 마음이 편치 않아요
    Q (가족들 얼굴이 자꾸 떠올라요) 새 옷을 산다든지 또는 여행을 간다든지 하는 좋은 일이 생기면 주변 가족들과 친구들에게 미안해집니다. 그리고 그 미안한 마음이 좀처럼 가시지 않아 정작 좋은 기분을 마음껏 누리지 못합니다. 나만 좋은 걸 누리는 것 같아 가족들이나 친구들에게 자꾸만 미안해져요. 그래서 저는 가족 또는 친구들과 공유가 어려운 나만의 전공 분야라든지 직장에서의 성과를 통해서만 자유롭게 행복을 느끼는 것 같습니다. 저는 왜 이럴까요. 좋은 음식을 먹을 때 부모님 얼굴이 먼저 떠오르고 미안해지니 말이죠. A (욕망을 통제하는 기준이 너무 높군요) 미안하다는 감정은 내가 상대방에게 잘못이 있을 때 마음이 편치 못하고 부끄러운 것이죠. 내가 잘못을 저질렀다고 생각될 때 자동적으로 나오는 감정 반응이 미안하다는 느낌입니다. 그러니까 오늘 사연은 미안함이란 감정 반응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내 행동에 대해 잘잘못을 판단하는 기준이 너무 엄격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기준이 엄격하니 미안함이란 감정 반응도 강하고 자주 튀어나오게 되는 것이죠. ㆍ일방적 자기 통제는 분노·우울 불러와
    우리 뇌엔 마음의 윤리 선생님이 있는데 심리학 용어로 초자아라고 합니다. 내가 잘못을 하면 호되게 꾸짖고 죄책감을 만드는 역할을 하죠. 사회가 적절히 유지되기 위해서는 이 윤리 선생님의 기능이 매우 중요합니다. 우리의 본능은 이기적인 측면이 강하기에 윤리 선생님이 적절히 꾸짖고 통제를 해주어야 그나마 더불어 사는 세상이 유지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윤리 선생님의 기능이 심하게 저하된 경우 반사회적 행동이 쉽게 나올 수 있고 이것이 성격으로 고정된 경우를 반사회적 성격이라 부릅니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 남에게 해를 주는 것을 죄책감 없이 저지르는 건 마음에 윤리 선생님이 없기 때문이죠. 이처럼 내 마음의 윤리 선생님은 개인과 사회의 안정적 생존에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그런데 오늘 사연처럼 마음의 윤리 선생님이 지나치게 엄격하면 남이 아니라 반대로 나를 괴롭힐 수 있습니다. 새 옷을 샀다면‘너무 자랑해서 주변 사람들 배 아프게 하지 말아야지,그리고 생일이나 중요한 기념일에 내가 여력이 있다면 옷 한 벌 선물 해야지’정도가 적당한 생각인데 새 옷을 산 것을 즐기지 못할 정도로 내 안에 미안한 마음이 들고 있다면 문제가 되겠죠. 이러다 보면 오히려 상대방과의 관계도 안 좋아질 수 있고 내 삶의 질도 떨어지게 됩니다. 지나치게 내 욕구의 만족을 통제하고 있기 때문인데요. 분노나 우울이 찾아올 수 있습니다. 결국 욕구 만족과 욕구 통제 사이에 균형이 필요하죠. 본능은 나쁜 거라며 일방적으로 찍어 누르는 것보다는‘본능 통제 목적은 본능을 즐기기 위해서이다’란 생각을 하는 것이 욕구의 만족과 통제 사이에 균형을 잡는데 더 효과적이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ㆍ내가 나를 적절히 조절하는 절제가 바람직
    성적 충동과 같은 본능에 대해서는 더럽다, 도덕적으로 옳지 않다는 통제 메시지가 우리 뇌 안에 어느 정도 심어져 있습니다. 먹는 것, 성, 권력에 대한 본능적 요구는 우리 생존에 필수적인 내용이지만 과도하면 타인과 나에게 해를 끼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본능 관리의 전략으로 찍어 누르고 억제하는 것이 최선의 방법일까요. 도덕이나 법률 같은 사회 시스템으로 쾌락을 강력하게 통제하기 시작한 것이 인류 역사상 오래된 일은 아니죠. 시스템적인 통제로 개인적인 욕구를 통제하다 보니 효율적인 측면도 있지만 쾌락 자체를 부정적인 것으로 여기게 하고 오히려 음성적인 욕구 충족 활동과 이탈을 만들 가능성도 있습니다. 개인적인 차원에선 본능 통제보단 절제가 적절한 관리 전략이 아닐까 싶습니다. 한 그리스 철학자가‘절제는 욕망의 제거가 아니라 그것의 지배다. 절제력이 있는 사람은 더 이상 욕망이 없는 사람이 아니다. 절도 있게 욕망하는 사람,그래야 하는 것 이상으로 욕망하지 않고 그리하지 말아야 할 때는 욕망하지 않는 사람이다’라고 했다네요. 통제와 절제는 비슷한 듯하지만 매우 다르죠. 통제는 부정적인 것에 대한 일방적인 압박입니다. 내가 주인이 아닌 규제의 대상이 되는 것이죠. 그러나 절제는 내가 주체가 되는 겁니다. 내가 훈련을 통해 내 본능을 조절하는 것이죠. 절제를 통한 심리적 이득은 무엇일까요. 우선 내가 본능의 주체로서 내 스스로를 조절할 수 있다는 자아효능감을 상승시키죠. 나 자신에 대한 지배력은 그 자체가 매우 건강한 쾌감입니다. 그리고 통제는 본능의 쾌감을 억누르는 것이지만 적절한 절제는 오히려 쾌감을 더 강화합니다. 절제는 쾌락의 적극적인 활용법인 셈이죠. 본능에 대한 무절제함이 가져오는 건 내성이란 중독 증상입니다. 더 강한 자극이 없이는 쾌감을 얻지 못하게 되는 겁니다. 그러나 절제는 쾌락에 대한 예민도를 오히려 강화합니다. 너무나 먹고 싶은 음식을 하루 참을 때 그것에 대한 쾌락 반응이 강하게 유지되는 것과 같습니다. 본능을 나쁜 것으로 생각하고 그냥 찍어 누르는 것보다는 더 큰 쾌감을 위해 본능을 적절히 조절하는 것이 더 성숙한 마인드라는 오래전 철학자의 이야기, 새겨 볼 만합니다. ㆍ이기적이어야 이타적일 수 있다
    우린 집이나 학교에서 이기적인 것은 옳지 앓은 것,나보다 남을 먼저 배려함이 훌륭한 것이란 메시지를 수없이 들었기에 우리 뇌의 통제 시스템엔 이타적인 행동에 대한 규범이 진하게 스며들어 있습니다. 이기적인 행동을 하려고 하면 그 통제 시스템이 우리 마음에 불편한 감정을 만듭니다. 그래서 슬쩍 내 이기적인 마음을 이타적인 모양새로 바꾸는 전술을 무의식적으로 쓸 때가 많죠. 예를 들어 친구와 영화 보기로 약속하는 경우를 들어 볼까요. 친구가 ‘너가 보고 싶은 걸로 정해’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상대방을 배려하는 말인 듯하지만 결과적으론 이기적인 말이 되기 쉽습니다. 우선 영화 고르는 노동을 상대방에게 넘기는 것이죠. 그 말은 들을 사람은 고마운 마음도 들지만 부담도 갖게 되죠. 아무리 내가 원하는 것으로 정해라 해도 상대방을 고려하게 됩니다. 묻지도 않고 그냥 볼 영화를 고를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A라는 로맨틱 코미디 볼까’라 묻게 되죠. 그랬더니‘아니 그것만 빼고, 너무 유치해’란 답이 나옵니다. 살짝 짜증은 나지만 꾹 참고 이번엔 화끈한 액션물을 골라 봅니다. 그랬더니 이번엔 ‘좋긴 한데 너무 시끄럽지 않을까’라는 답이 옵니다. 묻는 쪽도 속이 끓기 시작합니다. 꾹 참고 다시 묻습니다. ‘B라는 복고풍 영화 볼까.’ 이제야 좋다고 합니다. 이쯤 되면 이 친구와 연관된 과거 기억을 지워버리고 싶은 생각마저 듭니다. 이기성을 감춘 이타적 행동은 상대방을 더 힘들게 합니다. 웃는 얼굴에 침 못 뱉게 해놓고 자신의 이기적인 요구를 은근히 주장하기 때문이죠. 그래서 상대방에 대해 배려를 제대로 하려면 먼저 이기적으로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나의 이기적인 욕구를 먼저 파악하는 것이 필요한 거죠. 그러고 나서 상대방의 욕구를 듣고 서로 부딪히는 부분이 있으면 적절한 선에서 내 욕구를 줄이고 타협을 하는 것이 솔직하고 건강한 타인에 대한 배려,이타적인 행동입니다. 앞의 예로 돌아가면 ‘네가 보고 싶은 걸로 정해’란 말 대신 내가 무얼 보고 싶은지 생각해 보고 ‘복고풍 영화를 보는 게 어떨까’라고 먼저 자신의 욕구를 이야기하는 것이 필요한 거죠. 그러면 상대방도 자신의 욕구를 이야기할 것이고 그때 내 욕구를 뒤로 미루는 것이 배려입니다.
          윤대현 서울대병원 강남센터 정신건강의학과 교수 yoon.snuh@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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