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W T = ♣/Her Story

‘백세인생’ 열풍… 26년차 가수 이애란

浮萍草 2016. 1. 6. 22:03
    “첫 앨범 쓰레기통에 버리고…”
    “가수 포기했지만 노래는 못버렸죠”
    데뷔 26년 만에 스포트라이트를 받게 된 가수 이애란
    하루에 5개 안팎의 스케줄을 소화하며 체력적 부담이
    크지만“나를 찾는 이들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행복하다”
    며 웃음지었다.신창섭 기자 bluesky@
    미(乙未)년을 의미 있게 마무리한 ‘백세인생’의 주인공 이애란을 병신(丙申)년의 업무가 시작되는 첫 날인 4일 만났다. 인터뷰 장소는 서울 영등포구 여의동 KBS별관. 그는 들떠 있었다. 1990년 데뷔 후 26년 만에 처음으로 KBS 1TV ‘가요무대’무대에 서는 날이기 때문이다. ‘가요무대’는 트로트 가수들에게 메카와 같은 곳이다. 쟁쟁한 가수들도 자신의 노래가 아닌 매회 주제에 맞는 흘러간 노래를 불러야 하는 진정한 고수들의 무대다. 그곳에서 이애란은 당당히 자신의 히트곡‘백세인생’을 불렀다. 수백 명의 관객은 따라 불렀다. 분명 이애란은, 확실히 떴다. “거리를 다닐 때 알아보시는 분들이 많아요. 식당에 가도 같이 사진 찍자고 하면서 반찬도 척척 더 가져다주시죠. 백지 수십 장을 쌓아 놓고 사인을 해본 것도 처음이에요. 무엇보다 감동적인 건 행사장에서‘백세인생’을 부를 때 함께 불러 주신다는 거예요. 요즘 자주 울어요. 기쁨의 눈물이에요.” 이애란의 사인은 매번 다르다. 그동안 ‘내 사인’이라는 것이 없었다고 그는 말한다. 사인 말미에는 ‘∼전해라’라고 반드시 붙인다. 이애란의 진짜 사인임을 알리는 일종의 인증이다. 1990년 데뷔한 가수가 그동안 변변한 사인 한 장 해본 적이 없다는 건,그동안 그의 삶을 짐작하게 한다. 이애란은 데뷔와 동시에 KBS 1TV 인기 드라마‘서울 뚝배기’ OST를 부르는 행운도 거머쥐었다. 녹음까지 마쳤지만 드라마에 몇 차례 삽입됐을 뿐,이애란의 이름을 단 노래는 발표되지 않았다. 노래를 포기하려고도 해봤다. 하지만 노래 없이는 살 수 없었다. 앨범을 발표했지만 팔리지 않아 제 손으로 쓰레기통에 버리며 울분도 삼켰다. “2006년에 첫 앨범을 냈어요. 내 노래가 생기고 앨범을 내면 저절로 가수로 인정받는 줄 알았어요. 매니저와 기획사도 없이 혼자 뛰다 멋지게 실패했죠. 남은 앨범은 아무도 모르게 쓰레기통에 쓸어 넣고 꿈을 접으려 했어요. 그런데… 가수의 인생은 포기했지만 노래는 버릴 수가 없더군요. 그래서 무명으로 남아도 노래는 부르며 살겠다고 결심했어요.” 두드리면 열린다 했던가. 기회는 우연히 찾아왔다. 사촌 오빠가 오랜 친구라며 작곡가를 소개해 줬다. 그가‘백세인생’을 만든 김종완이었다.
    1995년 국악 버전으로 탄생된 노래가 2013년 재편곡돼‘저세상이 부르면’이란 제목으로 다시 발표됐다. 김 작곡가는 1년의 트레이닝 기간을 거친 후 이 노래를 이애란에게 맡겼다. ‘백세인생’으로 인생역전에 성공한 지금,이애란이 가장 고마워하는 두 사람이 사촌 오빠와 김 작곡가다. “고향인 강원 홍천에서 열린 행사에 제가 가지 않으니 큰집 사촌 오빠가 전화를 걸어왔어요. ‘가수 안 하려 한다’고 하니‘지금까지 해온 게 너무 아깝다’며 김종완 선생님을 소개해 주셨죠. 오빠한테 크게 한턱 내고 싶은데 그동안 제가 어떻게 살아온 지 아는지라 ‘너만 잘돼라’고 말씀하세요. 그래도 꼭 좋은 선물을 해드리고 싶어요.” 이애란이 빠뜨리지 않고 이야기하는‘고마운 사람’이 한 명 더 있다. ‘백세인생’이 인터넷상에서 회자되도록 ‘∼전해라’라는 가사를 담아 일명‘짤방’(‘짤림 방지’의 준말로 글과 함께 올린 사진 또는 동영상)을 만들어준 대학생이다. 그가 만든 짤방은 10∼20대 사이에서 화제를 모으며‘백세인생’이 전 세대를 아우르는 히트곡으로 등극하는 데 크게 한몫했다. “그 학생과 만나 함께 밥도 먹고 지금은 이모-조카로 지내고 있어요. ‘이모가 돈 많이 벌어서 용돈도 줄게’라고 하니 웃으면서 기뻐해 주더군요. 사실 짤방 속 제 표정이 워낙 코믹해서 되게 쑥스러웠어요. ‘조카야, 좀 더 예쁜 사진을 쓰지 그랬니’라고 했더니 예쁜 건 화제가 안 된대요, 하하. ‘백세인생’의 성공은 정말 많은 분의 도움이 있었기에 가능했어요. 한없이 감사할 따름입니다.” 이애란의 인기는 해를 넘겨 이어지고 있다. 연말 방송사 각종 특집 프로그램에 출연했고 12월 31일에는 경주 불국사에서 한 해를 마무리하는 공연을 펼쳤다. 곧바로 서울로 올라와 새해를 맞은 그를 찾는 러브콜은 끊이지 않는다. 요즘도 하루에 많게는 6∼7개, 적게는 3∼4개의 스케줄을 소화한다. 각 프로그램과 행사의 취지에 맞게 ‘백세인생’의 가사를 바꿔 부르면 현장 분위기는 후끈 달아오른다. 방송 출연도 마다 하지 않는다. ‘국민MC’라 불리는 유재석이 진행하는 MBC ‘무한도전’과 강호동이 MC를 맡고 있는 SBS ‘스타킹’을 비롯해 유력 프로그램에 연이어 출연했다. 그를 찾는 목소리는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는다. 인터뷰가 진행되는 중에도 매니저의 전화는 쉬지 않고 울렸다. 방송 출연을 문의하는 작가,인터뷰를 요청하는 기자,행사 섭외를 요청하는 업체 등 각양각색이었다. “시간이 허락한다면 어디든 가서 노래합니다. 저를 찾아주시는 것만으로도 감사한데 몸이 조금 피곤하다고 거절할 순 없죠. 행사장에 갔다가 ‘팬이다’며 잡는 분들 때문에 전주가 흐르는데 무대에 올라가지 못한 적도 있고 팬들이 잡아당기는 바람에 무대 위에서 떨어진 적도 있어요. 그래도 마냥 행복해요.” 이애란은 강원 홍천에서 나고 자랐다. 지금은 경기 하남에 살고 있다. 그래서 두 곳에서 열리는 행사에는 빠지지 않고 참석하려 한다. 2012년 발표한 앨범의 타이틀 곡은 ‘내 사랑 홍천’이었다. 고향을 향한 노래를 부르고 싶다는 이애란의 바람을 담아 ‘백세인생’의 김종완 작곡가가 만들어 선물해준 곡이다. “아무래도 홍천에 가면 더 반겨 주세요. 금의환향했다고 손을 덥석 잡아 주시는 어른들도 계시죠. 저 역시 애착이 강할 수밖에 없어요. 하남은 제가 지금까지 오래 살아온 곳이라‘제2의 고향’이에요. 하남의 한 한의사 원장님은‘고생한다’며 한약도 지어 주셨죠. 더 많은 분을 만나기 위해 체력도 관리해야 하니 좋은 약도 잘 챙겨 먹고 꾸준히 걷기 운동을 하며 몸을 다스리고 있어요.” 분명 이애란의 위상은 달라졌다. 행사 출연료는 10배 가까이로 치솟았고,온라인 게임 광고도 2개 찍었다. “돈 많이 벌었겠다”며 부러워하는 이들도 많다. 하지만 아직 그리 넉넉하지 않다. 25년간 교통비 정도만 받고 전국을 돌며 노래하는 동안 쌓인 빚이 적잖다. 백혈병으로 투병 중인 막냇동생의 병원비를 대느라 몇 천만 원의 빚도 졌다. 그래서 이애란은 지금의 성공을 마냥 만끽할 틈이 없다. “아직 큰돈은 벌지 못했어요. 하지만 돈의 액수를 떠나 저를 찾는 곳이 많다는 사실만으로도 부자가 된 기분이에요. 무대 위에 서서 관객들과 호흡할 때는 세상이 제 것 같거든요. 빨리 삶이 달라지길 바라진 않아요. 이미 25년을 기다려 왔는걸요. 천천히,아주 천천히 이 순간을 느끼고 싶어요.” 요즘 지나가는 사람들은 이애란을 보며 “선생님”이라 부른다. 한복을 입고 세상을 달관한 듯한 노래를 부르는 그가 어른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작 이애란은 “나 그리 나이 많지 않다”며 손사래를 친다. “어느 순간 ‘국민 선생님’이 돼 버렸어요. 거리에 나가면 ‘이애란 선생님 가신다’고 하시죠. 하지만 저는 선생님 자격이 안 됩니다. (웃으며) ‘언니’가 맞아요. 많은 분이 언니라고 부르며 좀 더 편하게 대해 주시면 좋겠어요.” ‘백세인생’ 이후의 행보를 묻자 이애란은“아직 거기까지는 생각해 보지 않았다”고 말했다. “지금 ‘백세인생’은 나의 전부”라고 말하는 그에게 다음 행보를 묻는다는 것이 우문(愚問)이었다. 마지막으로 ‘백세인생’을 사랑하는 팬들에게 한마디해 달라는 주문에 이애란은“‘백세인생’은 150세까지 살자는 노래”라며 “꼭 150세까지 건강하게 사시라고 전해라∼” 라고 구성진 노래를 들려주는 것으로 답을 했다.
         안진용 문화일보 문화부 기자 realyong@munhw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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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세인생’ 탄생 비화… 1995년 민요풍 국악→2013년 아리랑 삽입→2015년 제목 바꿔 완성
    ‘백세인생’의 탄생 비화는 가수 이애란의 인생과 닮았다. 1995년‘저세상이 부르면 이렇게 말하리’라는 제목으로 처음 세상에 나온 후 두 차례 간판이 바뀌었다. 이애란과 김종완 작곡가가 만난 뒤 2013년‘저세상이 부르면’으로 정식 발표됐다가 지난해 3월 ‘백세 인생’으로 또다시 제목을 바꾼 후 소위 ‘대박’이 났다. ‘백세인생’을 만든 김 작곡가는 4일 문화일보와 가진 전화통화에서“1995년 저작권 등록할 때는 민요 였다”며“꽹과리와 장구를 치는 명인들에게 곡을 드렸는데 이 곡이 이리저리 구전되며 원래 가사와 달리 불리게 되는 것이 싫어 정식으로 다시 발표했다”고 말했다. 이애란과‘백세인생’의 인연은 이때 시작됐다. 당시 장구를 배우기 위해 이 명인들을 찾아왔던 이애란이 귀동냥으로 이 노래를 들은 후 행사 무대 에서 몇 차례 불렀다. 이애란은“당시 교습비를 내지 못해 장구는 더 이상 배우지 못했다. 그때 잠시 들었던‘백세인생’이 기억나 1999년 경주엑스포 무대 등에서 음악도 없이 박수 치며 노래를 부르곤 했다”고 밝혔다. 이후 이애란은 사촌 오빠의 소개로 김 작곡가를 만나 ‘백세인생’의 진짜 주인이 됐다. 김 작곡가는“민요에서 가요풍으로 편곡한 이 노래를 이애란에게 주고 1년간 연습한 후 2013년 ‘저세상이 부르면’이라는 제목으로 발표했다”며“이 앨범의 타이틀 곡도 아니었는데 대중과 업계 관계자들로부터 좋은 반응을 얻었다”고 덧붙였다. 의외의 입소문이 나자 김 작곡가는 이 노래를 다시 매만졌다. 당시“이제는 100세까지 사는‘백세시대’가 됐다”는 내용이 담긴 TV 프로그램을 본 그는 제목을 사회 분위기에 맞춰‘백세인생’이라 바꾸고 이애란이 다시 부르도록 했다. ‘백세인생’은‘60세에 저세상에서 날 데리러 오거든 아직은 젊어서 못 간다고 전해라’ ‘80세에 (중략) 아직은 쓸 만해서 못 간다고 전해라’라는 맛깔스러운 가사가 돋보이는 곡이다. 이 가사는 김 작곡가가 젊은 시절 친구의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 상가에서 보고 느낀 바를 적은 것 이다. 그는 “아직은 정정할 나이에 세상을 떠난 어머니를 보며 인생의 무상함이 느껴졌다. 상여가 나가는데 어린 막내아들은 어머니가 돌아가신 것도 모르고 마냥 웃고 놀더라”며“이것을 보고 인간이 백수를 누리고 나아가 150세까지 살아보자는 바람을 담아 가사를 적었다”고 설명했다.
    ‘백세인생’의 후렴에 붙는 ‘아리랑’ 역시 편곡을 통해 바뀐 부분이다. 1995년 발표됐을 때는 ‘아리랑’이 없었다. 이는 김 작곡가가 이애란의 한을 승화시키기 위해 넣은 것이다. 이애란은“내게는 25년간 무명으로 살아온 한이 있다”며“그 한에 대해 이야기했더니 작곡가님이‘그렇게 한과 설움이 많았다면 아리랑을 붙여줄 테니 한을 실어서 불러 보라’고 하셔서 지금의‘백세인생’이 탄생하게 됐다”고 말했다.
         안진용 문화일보 문화부 기자 realyong@munhw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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