浮 - 채마밭/기획ㆍ특집

상사병 극복

浮萍草 2016. 1. 4. 15:30
    옛 사랑은 접고 새 사랑을 시작하라  
    루는 50대 초반의 중소기업 사장이 진료실을 방문했다. 보통 키와 적당한 체격에 착한 인상이다. 그는 부드럽지만 약간 어눌한 말투로 어렵게 말문을 열었다. “선생님. 제가 한 달 전부터 밥을 못 먹어요. 잠도 거의 못 자고, 숨 돌릴 틈만 생겨도 가슴이 콱콱 막혀오는데 제발 좀 도와주세요.” ㆍ과거에만 집착하면 원망, 죄의식, 우울에 빠지기 쉬워
    그는 세 살 연상의 아내와 스물여섯의 이른 나이에 결혼했다. 어머니처럼, 누이처럼 잘 챙겨주는 아내에게 모든 것을 의지하면서 사업에만 올인했다. 사업이 어느 정도 자리를 잡아가던 5년 전, 갑자기 아내에게 폐암 진단이 내려졌다. 그녀는 1년도 못 채운 투병 끝에 세상을 떠났다. 배우자, 그것도 모든 것을 의지했던 배우자를 잃은 상실감과 비통함은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모른다. 더구나 사춘기 소녀 딸에게 어머니의 죽음은 엄청난 충격이어서 그로 인한 문제도 불거졌다. 정말 고통스러운 나날이었다. 얼마 지나 주위 사람들이 재혼을 권유했지만, 그는 아내 외에는 아무도 생각할 수 없었다. 한동안 그는 상사병을 겪었다. 그러던 중 1년 전, 이혼해 아들 하나를 둔 미모의 여교수를 만나게 되었다. 처음인 듯한 야릇한 감정,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사랑에 그는 푹 빠졌다. 1년 정도 달달한 사랑을 했다. 고통의 세월을 보상받는 느낌도 들었다. 그런데 얼마 전 그녀가 이별을 통보했다. 그녀는 이유를 말하지 않는데, 아마도 다른 남자가 생긴 듯하다. 그 때부터 그는 지독한 상사병에 시달리고 있다. 상사병은 이성(異性)을 그리워하는 마음의 병이다. 강박증이나 우울증과 비슷한 증상을 겪는다. 하루 종일 생각하고, 온종일 보고 싶어 한다. 함께 있는 걸 상상하고, 행여 연락이 올까 기다린다. 사병은 사랑병(lovesickness)이다. 이별, 사별, 실연, 짝사랑에서 나타난다. 심장이 터지고, 가슴이 미어진다. 밥도 안 먹히고, 잠도 안 온다. 함께 앓기도 하지만, 보통 한 쪽에 나타난다. 상사병은 죽음에 이르는 병이다. 몸이 쇠약해지고, 숨을 끊기도 한다. 베르테르는 친구 부인에 대한 연정으로 마지막 편지를 쓰고 자살했다. 황진이는 이웃집 총각이 연모하여 죽자 기녀의 길을 선택했다. ㆍ사별 후 찾아온 사랑도
    … 남녀가 첫눈에 사랑에 빠지는 시간은 3분도 채 안 된다. 순식간에 도파민이 분비되어 사랑에 미치고, 옥시토신이 분비되어 사랑에 눈먼다. 도파민은 열정의 호르몬이고, 옥시토신은 신뢰의 호르몬이다. 그런 사랑도 유효기간이 있다. 3년이 채 못돼 호르몬의 약발이 떨어지면 사랑의 콩깍지가 벗겨진다. 남녀가 헤어지게 되면 불타던 사랑을 그리워한다. 천천히 세로토닌이 고갈되어 사랑에 목멘다. 세로토닌은 행복의 호르몬이다. ‘사랑은 우리가 존재하는 이유다’. 30년이 지나도 사랑을 못 잊는 경우도 있다. ‘행복은 착각이다’. 인간의 뇌는 불완전하다. 과거를 회상할 때 마음대로 편집하고, 미래를 상상할 때 임의대로 구성한다. 과거는 보다 아름답게 기억되고, 미래는 보다 완벽하게 설계된다. 헤어진 사랑은 더욱 애달프고, 못 이룬 사랑은 더욱 아쉽다. 인간의 뇌는 바보스럽다. 과거와 미래는 현재 감정에 영향을 받는다. 기쁠 땐 과거가 행복하게 보이고, 슬픈 땐 미래가 불행하게 보인다. 좋은 추억을 떠올리면 상대가 그립고, 나쁜 추억을 떠올리면 상대가 싫다. 상상을 통해 그려진 과거와 미래는 모두 착각이다. 우리는 자주 착각에 빠져 하루하루를 살아간다. 착각이 클수록 실망은 더욱 커진다. ‘사랑은 지옥이다’. 남달리 상사병을 심하게 앓는 사람이 있다. 어릴적, 사랑에 문제가 있었던 경우다. 사랑(愛)은 마음(心)을 주고받는(受) 것이다. 세 가지 경우가 있다. ① 주기만 하고 받지 못한 경우 ② 받기만하고 주지 않은 경우 ③ 아예 주지도 받지도 못한 경우. 나이 들어, 잘못된 사랑을 찾아 방황한다. ‘현재는 잃어버린 과거를 욕망한다’. 사랑에 목마르고, 애정에 굶주린다. 누군가에 의지하고, 뭔가에 매달린다. 채워지지 않는 외로움, 고독감, 공허감에 시달린다. 결국, 미움, 원망, 적대감, 죄의식, 우울에 떨어진다. 자, 이제 그에게로 돌아가자. 그에게 탁월한 처방은 무엇인가? 첫째, 그만 사랑하자. 우리는 시간 속을 살아간다. 심을 때가 있으면 거둘 때가 있고, 만날 때가 있으면 떠날 때가 있다. 이제 멈출 때다. 사랑의 욕망은 끝이 없다. 성경에 이런 말이 있다. ‘욕심은 죄를 낳고 죄는 죽음에 이른다’. 멈추어 서서, 자신을 돌아보자. 사별과 실연이 주는 의미는 무엇일까? 이번 이별은 어떻게 헤어날까? 멈추어 서서, 주위를 살펴보자. 그동안 못 돌본 가족을 챙기자. 그동안 외면한 친구를 만나자. 멈추어 서서, 자연에 눈 맞추자. 그리움을 품고 낙엽 진 길을 홀로 걸어보자. 애달픔을 안고 어딘가로 혼자 떠나보자. 둘째, 다시 사랑하자. 우리는 사랑하기 위해 태어났다. 똑같은 사랑에 새롭게 도전하고, 색다른 사랑을 새로이 꿈꾸자. 어쨌든 과거 사랑은 이미 가고 없는 것이다. 사랑의 아픔은 잊혀지고, 사랑의 상처는 아문다. 상처를 일으킨 건 어리석음이지만, 아픔을 아는 건 여린 마음에서다. 상처와 아픔을 씻고 나면 견고한 기초가 마련된다. 이제, 뜨겁게 사랑하자. 좌우 진폭이 극대로 진행되는 삶을 살아보자. 사랑할 때 너와 나를 잊고 사랑 자체의 신비에 빠져들고, 미워할 때 연민의 정이 솟도록 미워하자. 욕망에 밀릴 때 우물 밑바닥까지 가 보고, 용서할 때 상대가 용서를 거부하는 것조차 용서하자. 맥베스는 이렇게 외친다. “내일, 내일, 그리고 또 내일이 한 걸음 한 걸음 소리 없이 다가온다.” ㆍ내일이 한 걸음 한 걸음 소리 없이 다가온다
    셋째, 더 큰 사랑을 하자. 세상에는 세 가지 사랑이 있다. 나사랑, 임사랑, 남사랑이다. 나사랑은 사랑의 기초고, 임사랑은 진짜 사랑을 위한 입문이고 남사랑은 인간의 소명이다. 진정으로 나사랑을 이룬 자라야 임사랑이 가능하고, 임사랑을 해본 자라야 비로소 남사랑이 가능하다. 한 청년이 절간 문을 두드렸다. “부처님을 사랑하기 위해 왔습니다.” “여인과 사랑해본 적이 있는가?” “감히 그런 상상은 한 번도 안 했습니다. 오직 부처님만 흠모합니다.” 스승은 화를 내며 청년을 내쫓았다. “여인을 한 번도 사랑해보지 못했는데 어찌 부처님을 사랑할 수 있겠는가?” 장자에 이런 말이 있다. ‘나사랑은 달이 중천에 떠 있는 모습이고,임사랑은 하늘의 달과 강물에 비친 달이 어우러진 모습이고 남사랑은 달이 모든 강에 비추는 모습이다’.
              글=이후경 정신과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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