浮 - 채마밭/기획ㆍ특집

한국, 한국인(1)- 1950년대, 중석이 한국 수출을 먹여 살리다.

浮萍草 2015. 12. 29. 22:14
    세계 최빈국 한국은 어떻게 수출 5강이 되었나?
    
    ㆍ들어가는 글
    
    6․25전쟁의 잿더미에서 맨손으로 출발한 우리 경제가 이제는 수출규모 세계 5위이다. 
    무에서 유를 창조한 것이나 다름없다. 더구나 그 격동기에 선진국들이 200년 이상에 걸쳐 이룬 ‘산업화와 민주화’를 압축적으로 일구어냈다. 
    우리 선배들의 땀과 피로 이룬 것이다. 
    그들의 발자취를 더듬어 우리 민족의 정체성을 확인하고자 한다.
    1950년대 한국은 아프리카 나라들보다도 못했다. 
    전쟁이 끝난 1953년의 1인당 소득은 67달러로 세계 최빈국의 하나였다. 
    그 뒤 8년이 지난 1961년에조차 1인당 소득은 82달러로 179달러였던 아프리카 가나의 절반에도 못 미쳤다. 
    그마저도 미국 원조 덕이었다. 
    전쟁 복구가 시작된 1953년부터 1961년까지 원조액은 무려 23억 달러였다. 
    당시 우리의 수출액과 비교해 보면 미국 원조가 얼마나 큰 금액이었는지 알 수 있다. 
    1962년 무렵 우리 수출은 5천만 달러였다. 
    그해 정부 주도로 처음 경제개발계획이 시작되었다. 
    같은 해 ‘대한무역진흥공사’(KOTRA)가 설립되었다. 
    변변한 자원 없는 우리 민족도 한번 해 보자고 무역진흥의 기치를 내걸고 달리기 시작했다. 당시 수출 거리라곤 광물과 수산물밖에 없었다. 
    그런데 1963년에 처음으로 농산물 수출에 성공했다. 
    바로 농촌 아낙들이 키운 누에고치에서 생산해낸 생사였다. 
    이로써 1964년에 1억 달러 수출을 달성했다. 
    이를 기념하여 ‘수출의 날’이 제정되었다. 
    이때부터 수출에 나라의 명운을 걸다시피 불철주야 앞만 보며 달렸다.
    그로부터 6년 뒤인 1970년에 수출 10억 달러를 넘어섰다. 
    또 그로부터 7년 뒤 수출 100억 달러를 돌파했다. 
    100억 달러! 당시로서는 쉽게 믿기지 않는 숫자였다. 
    대통령은 그날 일기에 이렇게 적었다. 
    “10억 불에서 100억 불이 되는 데 서독은 11년,일본은 16년 걸렸다. 
    우리는 불과 7년 걸렸다. 새로운 출발점으로 삼자. 
    새로운 각오와 의욕과 자신을 가지고 힘차게 새 전진을 다짐하자.”
    이렇게 달려와 2011년 수출액은 5500억 달러를 넘어섰다. 
    이탈리아를 제치고 수출 7대국의 하나가 되었다. 
    50년도 채 안된 사이에 11000배나 증가한 것이다. 
    올 3월 프랑스 신문은 자기네가 한국한테 수출 총액이 추월당했음을 보도했다. 
    이로써 우리는 올해 프랑스를 제치고 수출 5강이 되었다.(주1)
    세계은행에 따르면 1960년대 이후 30년 동안 한국의 경제성장률이 세계 197개국 가운데 가장 높았다 한다. 
    자그마치 30년을 1등으로 달려온 민족이다. 
    세계 경제사에 유례가 없다고 한다. 
    바깥을 향한 경제정책이 우리 민족을 일으켜 세운 것이다. 
    1960년 이후 50년간 세계 경제는 6배 커진데 비해 우리나라 국내총생산은 34.5배나 늘어났다. 
    역사상 가장 빠른 성장이었다. 
    유대인이 주축이 되어 이룩한 근대 경제사도 우리 한민족의 업적에는 비할 바가 못 된다. 
    16세기 식민지 개척으로 근대 최초의 제국을 건설했던 스페인은 1000년 동안에 1.6배 16~17세기 해상무역 강국이었던 네덜란드는 200년 사이에 5.6배,18세기 산업
    혁명으로 패권국가가 된 영국은 170년 동안에 9.4배 성장했다. 
    미국은 1870년부터 1940년까지 9.5배,일본은 1913년부터 1970년까지 14.1배 각각 성장했다. 우리 경제성장이 정말 대단했으며 산업 현장에서 우리 선배들이 흘린 
    엄청난 땀과 눈물의 결과물임을 새삼 느끼게 된다.
    <한국, 한국인>은 우리 현대사를 경제사적, 무역사적 입장에서 조명하였다. 
    무역진흥 업무에 32년간 몸담았던 필자가 더 이상 기억이나 자료가 훼실되기 전에 해야 할 일이라 여겼다. 
    고백해야 할 것은 이 글의 자료 가운데 많은 부분을 여러 책과 인터넷 검색으로 수집했다. 
    이를 통해 여러 선학들의 좋은 글을 많이 인용했거나 참고하였음을 밝힌다. 
    한 조각, 한 조각의 짜깁기가 큰 보자기를 만들 수 있다는 생각에서다. 
    널리 이해하리라 믿는다. 참고문헌은 익명의 자료를 제외하고는 각 문단 말미에 밝혔다. 
    그럼에도 이 글에 있는 오류나 잘못은 당연히 필자의 몫이다. 
    잘못을 지적해 주면 감사한 마음으로 고치겠다. 끝으로 이 글을 수출 진흥 일선에서 수고하는 KOTRA 식구들에게 바친다.
    
    ㆍ1950년대, 중석이 한국 수출을 먹여 살리다 
    중석, 텅스텐

    광복 직후인 1946년 우리나라의 수출 품목은 오징어와 중석이었다. 수출 대상국은 중국과 일본 단 두 나라였다. 연간 수출액은 350만 달러에 불과했다. 1950년대조차 우리에게는 이렇다 할 수출품목이 없었다. 땅 속과 바다 속에서 찾아낸 광물과 수산물이 고작이었다. 땅 속에서 파낸 광물은 미국에 팔고 바다 속 수산물은 일본에 팔았다. 중석과 철광석, 흑연이 그 무렵 우리 수출의 중심이었다. 전체 수출에서 차지하는 광물 비중은 60∼80%였다. 당시 우리나라는 중석의 주요 생산지였는데 무거운 돌이라 하여 중석(重石)이라 불렀다. 중석을 텅스텐이라고 부르는데 이 말은 스웨덴어로 '무거운(tung) 돌(sten)'이란 뜻이다. 이름 그대로 중석은 무겁고 단단하다. 다이아몬드 다음으로 단단한 금속이다. 따라서 금속원소 중 녹는점이 가장 높다.
    필라멘트
    중석의 용도는 강철에 5%정도 섞으면 강철이 단단해지고 강해져 높은 온도에서 변형되지 않는다. 텅스텐이 들어간 강철은 처음에는 공구 만드는데 쓰였다. 그 뒤 중석으로 총과 대포를 만들었다. 특히 중석으로 만든 포신이 강한 열을 견뎠다. 강철보다 단단한 중석은 탱크와 같은 군수산업의 핵심 광물이었다. 이후 중석은 고온에서도 잘 녹지 않아 전구의 필라멘트로 쓰였다. 강철의 녹는점이 섭씨 1500도 내외인데 비해 중석(텅스텐)은 금속 중 가장 높아 섭씨 3410도가 되어야 녹는다. 그렇다 보니 강한 열을 이겨내야 하는 필라멘트, 무기재료, 특수강, 초경합금의 소재로 사용됐다. 한국전쟁은 세계적으로 군수산업에 대한 관심을 높여 해외시장에서 중석을 비롯한 광산물 수요를 급증 시켰다. 이로 인해 중석 가격이 폭등했다. 그러자 1951년부터 광산물 수출이 활기를 띠었다. 중석은 1950년대 내내 우리나라 1위 수출상품이었다.

    당시 세계 최대의 중석(텅스텐) 광산이 바로 강원도 영월의 상동광산이다. 한때 세계 생산량의 15%를 점유했다. 중국이 공산화되면서 중석 확보에 어려움을 겪고 있던 미국은 1952년 3월, 2년에 걸쳐 1만5천 톤을 수입해가기로 계약했다. 이듬해 우리나라 수출총액 3,958만 달러 가운데 68%가 중석 수출로 벌어들인 돈이었다. 이른바 ‘중석불(重石弗)’이었다. ㆍ수산물은 일본에 수출하다
    김양식./ 조선DB

    그리고 일본에 오징어, 한천(우뭇가사리 가공품), 김 등을 수출했다. 1950년대 수출은 광물 비중이 70~80%, 수산물이 20~30%였다. 그 무렵 품질 좋은 수산물은 수출하고 하치들이 우리네 몫이었다. 김은 바닷가 바위 옷 같다 해서 해의(海衣), 해태(海苔)라 했다. 천연 김은 귀해 <삼국유사>에 왕의 폐백품목이라는 기록이 있다. 1420년대 쓰인 경상도지리지에 따르면 김을 최초로 양식한 시기를 조선중기 쯤으로 추정하고 있다. 또 다른 일설에 의하면, 1650년경 전남 광양의 김여익이 처음으로 김 양식기술을 개발해 보급했다 한다. 김여익은 병자호란 때 의병을 일으켰으나 조정이 항복하자 태인도에 숨어살던 중 소나무와 밤나무 가지를 이용해 김 양식 방법을 창안했다. 이후 김은 왕실에 바치는 특산물이었는데 하루는 임금이 김으로 맛있게 수라를 드신 후 음식 이름을 물었다. ' 광양에 사는 김여익이 만든 음식입니다.'고 아뢰자 임금이 '그럼 앞으로 이 바다풀을 그 사람 성을 따 김으로 부르도록 하여라'라고 해 '김'이라 불렸다고 한다. 삼면이 바다인 우리나라에 하늘이 내린 영양의 보고가 바로 김이다. 마른 김 5장에 들어 있는 단백질 양이 달걀 1개에 들어 있는 양과 비슷하다. 또 김에는 비타민과 미네랄이 풍부하다. 비타민 C가 귤의 세 배, 비타민A와 비타민B군이 일반 야채의 열 배 가깝게 들어 있다. 또한 필수아미노산·인·마그네슘·나트륨·칼륨·규소·철·망간 등 우리 인체에 필요한 미네랄과 철분이 풍부하게 함유돼 있다. 일종의 종합비타민인 셈이다. 게다가 콜레스테롤을 몸 밖으로 내보내는 성분도 함유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ㆍ세계가 한국 김에 반하다 

    조미김을 먹고 있는 휴잭맨 딸
    최근 김의 세계화 현상이 두드러지고 있다. 1953년 일본에 첫 수출을 시작한 김은 1970년대 대량 양식을 통해 수출이 늘어나다 근래 들어 큰 신장세를 보이고 있다. 종래 주로 일본과 중국에만 수출하던 김이 2012년에는 70여 개국으로 늘어났다. 금액도 2억 3천만 달러를 기록해 일본을 제치고 세계 1위의 수출국이 되었다. 대내적으로는 그간 농수산물 분야 수출 1위였던 인삼도 추월했다. 이제는 미국이 일본을 제치고 우리 김의 최대 수입국이 되었다. 김은 웰빙, 채식 열풍과 더불어 성장가치가 높다. 지난해 김 수출액은 2억 7천4백만 달러를 상회했다. 한국의 주요 김 수출국은 미국, 일본, 태국, 중국 순으로 나타났다. 이 기세라면 3억 달러 수출도 멀지 않았다. 한류의 힘이 먹거리에도 변화를 일으키고 있다.
    ㆍ포항제철을 탄생시킨 대한중석
    우리나라 중석의 역사는 1916년 4월 강원도 영월의 상동광산이 발견되면서 시작되었다. 1923년 일본인이 광산을 열었다. 이후 1952년 대한중석이 설립되어 강원 상동광산과 경북 달성광산을 인수해 운영했다. 1960년도 당시 대한중석은 우리나라 유일의 외화벌이 국영기업이었다. 회사의 수출액이 국가 전체 수출액의 약 60%를 차지했다. 대한민국 수출을 거의 혼자 책임지다 시피 했다. 대통령은 자기가 가장 믿는 사람을 대한중석 사장으로 앉힐 수밖에 없었다. 대통령은 박태준을 1964년 12월 대한중석 사장으로 임명했다. 그 무렵 정부는 농업 중심의 1차 산업에서 2차 산업인 제조업을 발전시키려면 무엇보다 산업의 쌀인 철강생산이 절실하다고 판단했다. 박태준의 경영능력이 검증되자,1965년 10월 대통령이 ‘나는 고속도로 건설을 직접 맡을 테니 임자는 종합제철을 맡아’라며 특명을 내린다. 그리고 정부는 제2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1967년~1971년)을 만들면서 종합제철소 건설계획을 포함시켰다. 당시 믿을 건 ‘중석불’뿐이었다. 1968년 4월 정부는 대한중석과 합작으로(정부 75%,대한중석 25%) 포항제철을 설립하고 포철 초대사장에 박태준을 기용했다. ㆍ워런 버핏이 투자한 대구텍
    그 뒤 대한중석은 1970년대 중석을 소재로 하는 초경합금 공장을 건설해 제조업에 뛰어들었다. 그러나 중석은 1980년대 이후 세계 최대 매장국인 중국이 수출시장에 뛰어들면서 공급이 넘쳐났다. 중석의 국제시세가 톤당 38달러로 폭락했다. 당시 국내 생산원가는 98달러였다. 그러자 우리 중석산업은 사양산업이 되었다. 결국 1994년에 상동광산이 폐쇄되었다. 같은 해 3월, 문민정부의 공기업 민영화 방침으로 거평그룹이 대한중석을 인수했다. 민영화 1호 기업이었다. 그러나 이후 불어 닥친 외환위기로 거평그룹조차 부도가 나 망하자 대한중석은 낙동강 오리알이 되었다. 그런데 이때 대한중석을 눈여겨 본 회사가 있었다. 바로 이스라엘에 본사를 둔 금속가공 다국적기업 IMC그룹이었다. IMC는 1998년에 대한중석을 인수했다. 외국 매각기업 1호였다. IMC는 대한중석 상호를 대구텍(TaeguTec)으로 바꾸고 절삭공구를 생산하고 있다. 대구텍이 IMC에 인수될 당시 매출은 1000억 원 수준이었지만 현재 연 매출은 5000억 원 정도다. 대구텍은 한국 절삭분야 1위일 뿐 아니라 생산량의 65% 이상을 수출하고 있다.
    그런데 또 이런 IMC의 경영활동을 눈여겨보는 사람이 있었다. 바로 세계 최대 갑부이자 투자가인 워런 버핏이었다. 그는 2006년 대구텍을 포함해 IMC의 경영상황을 철저하게 분석한 후 이를 사들였다. 버핏은 이에 그치지 않고 상동광산 운영업체인 상동마이닝을 주목했다. 그는 2007년과 2011년 두 번이나 한국을 방문했다. 상동마이닝은 2012년 3월 초 IMC그룹과 총 7500만 달러 규모의 투자협약을 체결했다. 상동광산 재개발에 착수한 것이다. 광물 탐사 및 경제성 평가기관인 워드롭사가 발표한 자료를 보면 상동광산 상층부 광량만 앞으로 10년 이상 개발이 가능한 3500만 톤에 이른다고 한다. 중석의 질도 최상급이다. 이곳에 최상급 텅스텐 1억 300톤이 묻혀 있는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향후 100~200년간 채광이 가능한 양이다. 세계적으로 텅스텐 수요가 늘면서 국제가격은 1994년 10kg당 38달러에서 2013년 1월 350달러를 웃돌았다
    . 상동광산의 텅스텐과 몰리브덴 매장량의 잠재가치가 600억 달러 이상으로 평가되었다. 상동광산은 중석 매장량에서 단일 광산으로는 세계 최대이다. 버핏이 이 같은 호재를 눈여겨봤을 것이라는 분석이다.
    워런 버핏 버크셔 해서웨이 회장이 2011년 3월 21일 오전 대구텍에서 열린 제2공장 착공식에 참석, 내빈들과 함께 발파 버튼을 누르고 있다. /조선DB

    관련 업계에 따르면 버핏이 광물자원에 투자한 것은 처음이다. 텅스텐은 희토류와 함께 세계적으로 확보전이 치열한 전략광물이다. 주로 백열등 필라멘트,절삭공구,무기,골프채,전기전자부품에 주로 쓰이지만 최근에는 의료기기·LCD·LED·우주산업 관련 필수 광물로 수요가 크게 늘고 있다. 상동광산은 단일광산 기준으로 중석(텅스텐) 매장량이 세계 최대이다. 그 만큼 투자처로서는 높은 가치를 지닌 곳이다. 특히 중국정부의 희토류 수출규제 강화로 희토류 확보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광물 투자가 주목받고 있다. 이런 추세에 맞춰 '투자의 귀재' 위런 버핏이 상동광산에 투자한 것이다.
    (출처;부산세관박물관장,월간조선 2012.4월호 권세진 기자 등)
    ☞ 주(1) http://bbs2.ruliweb.daum.net/gaia/do/ruliweb/default/325/read?bbsId=G005&articleId=24940543&itemId=143 ☜
              글 홍익희 세종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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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 한국인 (2)-수출품목 늘리기 위한 ‘수출장려보조금제도’
    명주실 뽑다 손이 짓무른 10대 여공들...누에치기로 시작된 1960년대 수출
    1960년대 수출 주종품목 농산물, 아낙네들의 누에치기로부터 시작되다 보릿고개
    6.25전쟁 뒤 당시 사람들은 극심한 굶주림에 시달려야 했다. 농민들 대부분은 추수한 농작물로 빚을 갚고 이자,세금. 학비 등을 뗀 다음, 남은 식량으로 초여름 보리수확 때까지 견뎌야 했다. 그 무렵 우리 국민의 70%가 농민이었다. 그러나 대농을 제외하곤 대부분 봄이 되면 양식이 떨어졌다. 어린 자식이 밥 달라고 보채고 산모의 젖이 안 나와 젖먹이가 울부짖었다. 모두 비슷한 처지라 양식을 꾸어 줄 사람도 흔치 않았다. 설사 꿀 수 있다 해도 그것은 ‘장리쌀’이었다. ‘봄에 꾸어 준 곡식에 대해 가을에 원곡과 함께 그 절반을 이자로 쳐 받는 복리’였다. 이렇듯 장리는 빌려 준 원금의 50%에 달하는 비싼 이자를 물어야 했다. 그런가 하면 흉년이 들어 쌀이 귀한 해에는‘맞장리’혹은 ‘곱장리’의 관행도 있었다. 이는 장리의 2배에 달하는 고리(高利)였다. 따라서 쌀 한 말을 빌리면 가을에 이자를 합해 그 배인 두 말을 갚아야 했다. 장리쌀을 상환하지 못하면 결국 조금 남아있던 논을 내놓고 빚을 갚은 뒤 소작농이나 머슴으로 전락했다. 심할 경우 자식마저 빼앗기기까지 했다. 보릿고개는 가을에 수확한 양식이 바닥나고,보리는 미처 여물지 않은 5 ~ 6월로 이 시기를 춘궁기(春窮期)라고도 한다. 보릿고개 때는 미처 여물지 못한 푸른 보리이삭을 태워 얻은 덜 익은 보리를 가루로 만든 다음 풀뿌리와 소나무 속껍질을 함께 넣고 죽을 쑤어 먹었다. 말 그대로 초근목피(草根木皮)로 연명한 것이다. 이것조차도 먹지 못하는 농민들이 많았다. 이들은 걸식하며 유랑민이 되어 떠돌아다녔다. 어린아이들이 보릿고개를 넘기지 못하고 굶어 죽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1960년대까지만 해도 보릿고개 때문에 농민들은 큰 어려움을 겪었다. 이런 상태이다 보니 국민들은 용기를 잃고 스스로를 비하했다. 이때 “엽전이 별 수 있어?”라는 말이 유행했다. 엽전은 우리 국민을 뜻했다. 농민들은 한 입이라도 줄이기 위해 아이들이 어느 정도만 크면 도시로 보내 공장이나 식모살이 일을 하게 했다. 하지만 그나마 이런 일자리도 귀했다.(출처; 한국형 경제건설, 오원출) ㆍ수출품목 늘리기 위한 ‘수출장려보조금제도’
    6.25전쟁이 끝나자 정부는 기아해결을 위해 국민들에게 농산물 재배를 독려했다. 이렇게 해서 생산된 곡물을 수출하려 해도 가격이 안 맞았다. 곧 수출원가가 국제시세 보다 높아 수출할 수가 없었다. 이를 타개할 묘안이 필요했다. 정부가 만든 묘안이 바로 ‘수출장려보조금’ 제도였다. 수출하는 게 바람직한 품목에 대해 수출로 인한 결손액을 정부가 보조해주기로 한 것이다. 1954년 11월 이 제도가 처음 시행되었다. 1차로 1954년 4월∼7월까지 수출한 품목 중 고령토 납석(蠟石),형석,건멸치,건어 등 5종목이 국내시세보다 외국시세가 낮아 적자 수출했다고 판단해 보상금을 지불 했다. 그 뒤 수출부문에서 농산물이 차지하는 비중은 높아갔다. 1955년 6.1%,1958년 14.9%,1959년 21.5%,1960년 30.5%로 늘어났다. 그간의 광물 위주의 수출에서 농수산물 비중이 그 다음으로 커진 것이다. ㆍ양잠업의 수출사업화

    양잠(養蠶)은 고대로부터 한민족의 특기이자 왕가의 중요한 장려거리였다. 왕후가 직접 뽕잎을 따고 누에를 치는 조선시대의 친잠례(親蠶禮)는 종묘와 사직 다음으로 중요한 행사였다. 또한 염색 기술이 일찍이 발달한 삼국시대의 비단은 중요한 수출상품이었다. 특히 중국에서 명품비단으로 유명했다. 그 무렵 중국에서 생지를 들여다 염색해서 되파는 가공무역도 발달해 있었다. 일제 때는 뽕나무 묘목과 누에씨를 농민들에게 강매했다. 이는 조선 농가를 일본의 잠사원료 기지화하기 위한 것이었다. 덕분에 우리 농촌에 양잠 농가들이 어느 정도 널리 퍼져 있었다. 당시 농민이 보릿고개 곧 춘궁기인 봄에 돈을 만져볼 방법은 산비탈을 훑으며 꺽은 고사리밖에 없었다. 그러나 어지간히 꺾어봐야 몇 푼 만들기도 힘들었다. 때문에 1950년대 농가에서는 아낙네들이 ‘삼’과 ‘목화’를 재배해 길쌈을 했다. 그리고 짬을 내 누에치는 양잠을 해야만 가족이 입에 풀칠이라도 할 수 있었다. 양잠농가는 봄부터 여름까지 방마다 잠잘 공간만 남겨둔 채 선반을 만들어 누에를 쳤다. 누에는 뽕잎을 먹기 때문에 산뽕을 따다 주거나 밭 주위에는 으레 뽕나무가 심겨져 있었다.
    뽕나무 열매 오디
    누에치기는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다. 이른 봄 누에씨를 부화시켜 누에치기를 시작하면 못자리 할 시기와 맞물려 한 동안은 허리가 휘어 진다. 억척스레 먹어치우는 누에들에게 뽕을 따다 하루 서너 차례에서 대여섯 번은 줘야하니 식구들이 모두 뽕잎 따기에 매달렸다. 며칠 지나면 보리를 베어 타작을 해야 했고,동시에 모내기를 해야 하니 ‘바쁘다’는 말로는 설명이 불가능했다. 이런 때는 누에치기가 학교에 다니는 어린 아이들의 몫이 되기도 했다. 어린이들의 경우 뽕잎 따는 일은 힘들었지만 그래도 뽕나무 ‘오디’ 따먹는 재미로 선뜻 나서기도 했다. 광복 후 1951년경까지 수매된 누에고치에서 뽑아낸 생사 곧 명주실은 대부분 국내용으로 쓰였다. 생사가 수출물자로 주목을 받게 된 것은 1952년 한국생사수출조합이 결성되어 수출을 시작하면서 부터다. 그 해 중석(重石)에 이어 수출액 2위였다. 하지만 규모는 크지 않아 200만 달러에 불과했다. 6.25전쟁은 양잠업의 쇠퇴를 가져왔다. 그러나 정부에서 생산증대에 힘쓴 결과 1953년부터는 생산이 6·25전쟁 이전 수준으로 회복되고 수출도 점차 늘어났다. 그 뒤 잠업증산 5개년 계획이 수립되어 추진되면서 60~70년대에는 양잠업 전성기를 맞이하게 된다. ㆍ1960년대 농산물 수출이 처음으로 광산물을 제치다
    미국의 저명한 국제정치 전문지 ‘포린어페어’지는 1960년 10월호에서 한국에 대해 “실업자는 노동인구의 25%,1960년 1인당 국민총생산(GNP)은 100달러 이하, 수출은 2,000만 달러, 수입은 2억 달러. 한국의 경제 기적 가능성은 전혀 없다”고 묘사했다. 1950년대 미국의 원조에 의존해오던 한국경제는 50년대 후반부터 원조가 급감하면서 굉장히 힘들어졌다. 그나마 무상원조가 유상원조로 바뀌었다. 어떻게든 돌파구를 찾아야 했다. 그 첫 번째 대상이 농산물의 수출산업화였다. 50년대 땅속의 광물을 찾아내어 수출하던 시대에서 60년대는 땅 위에 곡물을 심고 누에를 키워 실을 지어 내다 파는 수밖에 없었다. 1959년의 수출총액은 2천만 달러를 밑돌아 국민 1인당 수출액이 1 달러에도 미치지 못했다. 1961년 누에고치에서 뽑아낸 생사가 국내수요를 충당하고도 270만 달러어치가 수출되어 수출 3위 품목이 되었다.
    씨누에용 고치따기

    그 무렵부터 정부는 '누에치기'와 '생사생산'에 각별한 공을 들였다. 매년 연초 대통령의 시·도 연두순시와 청와대 보고에서 빠지지 않았던 게 '잠업증산'과 '생사수출'확대였다. 공무원들 역시 뽕밭 현장을 누비며 밤을 새며 증산대책을 마련해야 했다. 이 무렵 전국 농촌에서는 가난을 딛고 일어서겠다며 누에치기를 하는 집이 많았다. 누에고치에서 비단의 원료가 되는 실 곧 생사를 뽑아내기 위한 양잠은 국가 경제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뿐만 아니라 지역경제 발전과 농가소득 증대에 중추적인 역할을 했다. 1962년부터 정부 주도로 ‘잠업증산 5개년 계획’이 시작되었다. 1962년에는 전체 수출액 5,400만 달러에서 농산물 수출이 차지하는 비중은 43%로 높아졌다. 여기에 수산물을 합치면 농수산물 수출 비중은 66%에 달했다. 이로써 60년대 들어 농산물이 광산물을 제치고 최대 수출 품목이 되었다. 주요 농산물 수출품목 순위는 생사, 쌀, 인삼, 담배잎, 한약재 순이었다

    그 뒤 양잠농가는 계속 불어나 1974년 약 50만 가구에 이르러 전성기를 맞았다. 당시 양잠산물이 3억 달러이상 수출되어 농산물 수출의 절반을 차지했다. 수출 역군인 10대 여공들은 손을 뜨거운 물에 넣기를 반복해 명주실을 뽑아냈다. 대부분 손이 짓물렀다. 1962년부터 시작한 ‘잠업증산 5개년 계획’이 그 후에도 계속 추진되면서 1976년에는 사상 최고의 누에고치를 생산했으며 1979년 잠사수출액은 최대 3억6천500만 달러에 달했다. 이 시기 아낙네들의 누에치기와 여공들의 생사 생산이 농산물 수출의 대들보 역할을 했다. 그들이 바로 그 힘들던 시기인 60년대의 수출 역군이었다. ㆍ한국생사’, 양잠업과 생사수출을 주도하다
    ‘ 당시 양잠업과 생사수출을 주도하던 회사가 있었다. 바로 김지태가 경영하는 ‘한국생사’였다. 김지태는 일제시대 농민 수탈기관인 동양척식주식회사(동척) 부산지점에 입사해 4년간 근무했다. 그러다 김지태는 폐결핵에 걸려 5년 만에 회사를 그만두면서 회사 울산농장의 땅 2만평을 10년 분할상환 조건으로 불하받았다. 그 뒤 이 땅에서 수확한 벼는 분할상환금을 갚고도 매년 100석 이상이 남았다. 뿐만 아니라 그 땅을 담보로 대출도 가능했다. 그는 울산농장을 바탕으로 1934년 부산 범일동 소재 면화생산 공장인 부산진 직물공장을 인수해 인견(비단) 직물을 생산하는 산업자본가로 변신했다. 그러나 경험 부족으로 적자를 면치 못해 이 회사는 조선견직에게 넘어갔다. 이어 1935년에는 범일동에서 제지회사인 조선지기주식회사를 설립해 포장상자를 생산했다. 이 회사는 일본의 침략전쟁에 따른 군수물자 시장의 확장으로 날로 번창했다. 김지태는 이렇게 모은 자금으로 목산농장을 설립하는 한편 1943년 조선주철공업합자회사를 인수했다. 이 회사 역시 전쟁수요로 주철제품이 불티나게 팔려 역시 돈을 끌어 모았다.

    과거 견직물 생산 경험 덕분에 해방 후 김지태는 1949년 아사히견직(조선견직주식회사의 전신)의 관리인을 맡게 되었다. 이를 계기로 그는 회사의 규모를 400명 종업원에서 1800명으로 키우며 경영 능력을 보여주어 겱국 회사를 불하받는데 성공했다. 1950년대는 한국자본주의가 상업자본에서 산업자본으로 바뀌면서 재벌을 탄생시킨 태동기였다. 당시 재벌이 탄생하는 절호의 기회가 바로 적산기업의 불하였다. 그리고 이어진 동력은 무역에서 얻은 막대한 이익이었다. 조선견직을 인수한 김지태는 이어 경남 일대 제사공장들을 몽땅 사들였다. 곧이어 경북 일대뿐 아니라 강원도 등 전국 제사공장들을 연이어 매입했다. 그 뒤 조선견직을 중심으로 원료부문인 잠사업,제사업까지 확대하여 한국생사를 설립했다. 조선견직은 1950년대 이미 전국 최대의 견직물 생산업체로 발전하여 김지태를 실크재벌로 만들었다. 일본의 편창에 다음가는 세계 2위의 제사산업군으로 떠올랐다. 이렇게 수직계열화에 성공해 우리나라 양잠업을 이끌었다. 김지태는 1960년대 전국에 17개 공장을 거느리는 국내 최대의 실크재벌로 국내 실크산업의 약 70%를 지배했다. 그 뒤 전성기를 구가했던 1970년대 중반 무렵에는 직물·신발·건설·전자 부문을 포함해 30여 개의 계열기업을 거느린 재벌로 컸다. 수출이 처음으로 100억 달러를 넘어선 1977년에는 1억5000만 달러의 수출실적을 올려 ‘금탑 산업훈장’을 받았다.
              글 홍익희 세종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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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 한국인(3)- 수출만이 살길이다
    "머리카락, 소변... 팔 수 있는 건 뭐든지 팔아라" 1960년대 우리나라는 자원도 거의 없고 내수시장도 작았다. 게다가 당장 석유와 밀가루를 수입해야만 국민들이 얼어 죽거나 굶어 죽는 걸 막을 수 있었다. 그것들을 수입하려면 달러가 있어야 했다. 1960년도 우리 수출액은 33백만 달러에 불과했는데 수입규모는 3억 4300만 달러였다. 수입규모가 수출보다 10배 이상 컸다. 엄청난 적자 구조였다. 미국 원조가 줄어든 상황에서 이런 상태가 계속되면 나라가 파산할 수밖에 없었다. 유일한 해결책은 수출뿐이었다. 팔 수 있는 것은 모두 내다팔자는 수출 제1주의.그것이 1960년대의 최우선 과제였다. 1960년도 북한 수출액은 우리의 6배가 넘는 2억 달러에 달했다. 당시만 해도 북한이 남한 보다 훨씬 경제력이 강했다. 특히 북한은 중화학공업이 발달해있었다. 전기발전량은 북한이 우리 보다 5배,철광석은 10배 가까이 많이 생산했다. 화학비료는 20배, 시멘트 역시 비교가 되지 않았다. 경제 인프라적인 품목들에서 격차가 이 정도니 1인당 GNP 역시 북한이 남한보다 훨씬 높았다. 1.5배 내지 3배정도 높았다 한다. 당시 우리는 경제 인프라마저 이렇게 빈약하다 보니 수출 역군들은 산으로 들로 바다로 팔 것을 찾아 헤매 다녀야 했다. 1961년 '10대 수출품'을 살펴보면 1위 철광석, 2위 중석으로 광산물의 수출이 가장 많았고 3위가 생사였다. 그리고 4위가 무연탄 5위가 마른오징어,6위 활선어 7위 흑연 8위 합판 9위 미곡 10위에는 특이하게도 돼지털을 수출했다. 돼지털 120만 달러어치 전량이 미국으로 수출되었는데 구두솔과 옷솔의 재료였다. ㆍ수출입국의 깃발을 올리다/ KOTRA 설립
    1960년대 초 수입대체 전략은 세계적인 조류였다. 대부분의 개발도상국들은 근대화 수단으로 수입대체 중심의 공업화 전략을 추진했다. 세계 은행 같은 국제기구와 저명한 학자들도 후진국의 개발정책으로 점진적인 수입대체 전략이 최선이라고 권유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한국은 수입대체전략,곧 공업화전략을 추진하고 싶어도 설비와 기계를 수입할 외환이 없었다. 미국의 원조가 급격하게 줄어들어 1962년도 당시 외환보유고는 1억 6000만 달러가 전부였다. 그나마도 당장 필요한 석유와 밀가루 수입으로 외환은 점점 고갈되고 있었다. 당시 수입에 꼭 필요한 돈은 연간 2억 달러 이상 필요했다. 외환위기 일보직전으로 치닫고 있었다. 대한민국은 먼저 달러를 벌어야만 했다. 그래서 정부는 조기에 수입대체전략을 포기하고 수출주도 전략으로 바꾸었다. 결과적으로 이것은 한국경제에 큰 행운이었다. 수출주도 전략의 상징적 존재가 ‘대한무역진흥공사’(KOTRA)의 설립이었다. 1962년 정부 주도로 처음 경제개발계획을 시작하면서 같은 해 6월 KOTRA를 설립했다. 변변한 자원 하나 없는 우리 민족도 한번 해 보자고 무역진흥의 기치를 높이 내걸고 달리기 시작했다.
    정부는 KOTRA를 통해 해외 수출기지 확보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1962년 10월 홍콩무역관을 필두로 11월 뉴욕무역관,로스앤젤레스무역관,방콕무역관을 설치했다. 이듬해에도 이러한 노력은 계속되어 몇 년 안 되어 세계 곳곳에 100여개 무역관이 개설되었다. 초창기 수출전선에서 KOTRA맨들의 헌신은 우리 수출기반 확보에 절대적인 힘이 되었다. 그들은 바이어를 발굴하고 수출 인콰이어리(inquiry 문의)를 수집해 우리기업에 연결해 주었다. 수출을 어떻게 하는 줄 몰랐던 우리기업들이 KOTRA의 안내로 수출전선에 뛰어들기 시작했다. 당시 대우의 김우중을 포함한 수출 초창기 기업들이 KOTRA가 수집한 인콰이어리 덕분에 수출을 늘릴 수 있었다. 그리고 수출이 될만한 아이템을 KOTRA가 발굴해서 샘플을 국내로 보내 우리기업들이 이를 보고 만들어 수출토록 도왔다. 이러한 노력에 힘입어 가발,공예품,합판,섬유로 시작한 1960년대 수출규모는 연평균 40%라는 획기적인 신장률을 기록한다. 이는 세계 어느 곳에서도 유래 없는 기록이었다. 한편 정부는 수출품목을 다양화하고 수출물량을 늘리기 위해 수출적자를 보전해주는 수출보조금제도를 채택하고 있었는데 수출 증대를 위해 이 수출보조금을 대폭 높였다. 1960년까지 수출보조금은 1달러당 1.2~1.3원에 불과했는데 1962년에는 1달러당 21.5원으로 대폭 높였다. 이후에도 수출보조금은 계속 증가하여 1966년에는 51.6원으로 가파르게 상승했다. 그 무렵 급격한 수출증가가 있었던 배경에는 이런 직접적인 수출지원정책이 주효했다. ㆍ대외개방형 수출경제로
    당시 정부는 재정안정화 정책을 포기하고 팽창정책을 펼쳤다. 그 결과 인플레이션이 가속화되고 이에 따른 수입수요가 급증해 외환보유고는 날이 갈수록 줄어들었다. 1962년 말에는 1억 6천7백만 달러, 63년 9월에는 1억5백만 달러로 떨어졌다. 결국 견디지 못해 그간의 수입자유화 정책을 포기하고 외환쿼터와 수입물량제한으로 돌아섰다. 만성적인 무역적자에 대외원조마저 끊기자 1964년에는 외환위기 우려까지 제기됐다. 이런 상황에서 정부는 우리 경제의 운명을 결정짓는 일대 정책전환을 이룬다. 대외개방형 경제로 방향 전환을 한 것이다. 수입 대체산업 보호를 위해 낮게 유지했던 환율과 금리를 대폭 올리고, 무역·외환 거래를 제한하던 것을 과감히 철폐했다. 한국 경제를 개방형 수출구조로 전환하는 토대를 마련한 것이다. ㆍ100% 평가절하와 금리현실화
    그 무렵 미국은 우리 정부에 환율을 현실화할 것을 요구했다. 정부는 이를 기회로 수출증대를 위한 대폭적인 평가절하를 단행했다. 1964년 5월 1$=130원에서 257원으로 거의 100% 평가절하를 단행했다. 이 작전이 주효했다. 우리 상품의 수출경쟁력이 살아났을 뿐 아니라 우리 임금경쟁력이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이로써 약 20년 동안 시행되어 온 복수환율제도를 폐지하고 단일변동환율 제도를 채택할 수 있었다. 이는 환율이 외환시장에서 수요와 공급에 따라 결정되는 변동환율제도의 준비를 뜻했다. 당시 오원철씨 회고이다. “인력밖에 자원이 없는 우리나라로서는 값싼 노동력을 활용해서 제품을 생산, 수출하는 길밖에 없었다. 이러한 제품이란, 섬유제품, 운동화, 가발 등의 제품, 전자제품 조립 등 여공들의 몫이었다. 그런데 이들 여공들의 노임이 달러로 환산했을 때 국제 경쟁력이 없었다. 1964년 시간당 노임은 일본이 미화 56 센트,한국이 20 센트였다. 전후 일본은 일찍부터 섬유제품 등 경공업 제품을 수출하기 시작.최신 설비를 설치했고 공정도 개선해서 1인당 생산량이 크게 향상되어 있었다. 품질도 고급화해서 비싼 값을 받을 수 있었고,수출망도 구축돼서 안정적인 판매를 했다. 환언하면 인건비가 올라가도 이를 소화해 낼 수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싼 물건은 대만에 위탁 · 가공시키고 있었다. 결국 우리나라는 일본과는 상대할 입장이 못 되고,목표는 대만 등 개발도상국가라는 결론이 나온다. 그런데 대만의 노임은 시간당 20 센트로서 우리나라와 똑같았다. 인건비가 똑같은 조건하에서는, 우리나라보다 한 발 앞서가고 있는 대만과 도저히 경쟁을 할 수 없었다.” 그 무렵 수출업체에 대한 지원은 대단했다. 달러당 융자 비율도 기존 110원에서 최고 200원까지 높였다. 수출용 원자재는 세금을 면제해주고 수출 잘하는 기업한테는 장려금도 지급했다. 대신 그간의 특혜금리는 현실화했다. 1965년에 "금리 현실화조치"를 실시해 예금금리는 15%에서 26~30%로,대출금리는 14%에서 21~24%로 인상하여 시장금리에 근접하게 현실화한 것이다. 그럼에도 수출금융금리는 6%대를 고수했다. 수출업체는 금리 차이만큼 보조금을 받은 셈이었다. ㆍ애환 어린 가발수출/ KOTRA 출신 장용호가 주도하다
    1960년대 3대 수출품의 하나가 가발이다. 가발제조는 우리나라 여성의 섬세한 손재주,풍부한 노동력,그리고 무엇보다도 국내에서 조달 가능한 원료였다. 1960년대 초까지만 해도 국내에 가발제조업체가 없었다. 서울통상(주)의 최준규가 가발 수출의 가능성을 보고 뛰어들었다. 1965년에 미국 정부가 중공산 가발에 대해 수입금지 조치를 내렸다. 그러자 일본과 홍콩의 가발생산이 중단되는 행운까지 작용해, 우리 가발 수출이 급증했다. 가발이 1970년 총 수출액의 12%로서 제2위 수출 품목이 되었다. 순수한 외화벌이로는 가발이 오히려 수출 1위 품목인 섬유를 능가했다. 1962년 12월 KOTRA 뉴욕무역관 장용호의 부임은 남다른 뜻을 지닌다. 미국에 한국산 가발의 전성기를 가져온 주인공이기 때문이다. 코트라맨들의 주요 임무 가운데 하나가 시장조사 업무다. 어떤 상품들이 어떤 국가들로 부터 수입해 들어오는지 조사하는 일이다. 특히 일본이나 대만,홍콩에서 들어오는 상품은 우리도 잘하면 만들 수 있다는 생각 때문에 그런 상품들에 대한 시장조사를 철저히 했다. 백화점에 새로운 상품들이 선보이면 샘플을 구입해 본사로 보냈다. 우리 업체들은 그 모조품을 만드는 과정에서 창작을 가미해 신상품을 개발했다.
    코트라맨들은 그걸 들고 시장개척에 나서는 경우가 많았다. 때로는 본국 수출업자들을 바이어들에게 연결해주기도 했다. 그때 장용호의 눈에 띤 것은 국산 돼지털과 사람 머리카락(인모)이 미국에 수출되는 것이었다. 한국 돼지 털은 부드러워 브러쉬를 만드는 원료로 인기가 있었고 인모는 상류층 부인들이 애용하는 가발의 원료로 사용되었다. 부가가치가 없는 단순한 1차상품 수출이었다. 인모 수입업자를 통해 브루클린의 유대인 가발제조공장과 연결되었다. 그는 얼씬도 못하게 하던 사장을 설득해 공원들이 바늘로 머리카락 한 올 한 올을 캡에다 뜨는 제조과정을 지켜보게 되었다. "저런 수공업이라면 임금 싸고 손재주 좋은 한국인들이 더 잘 할텐데" 하는 자신감이 생겼다. 합작투자를 할 수도 있다는 가정 아래 자신이 직접 제조공정을 익혀 두었다. 임기를 마치고 돌아온 그는 사표를 내고 1965년 7월 서울 답십리에 콩나물 키우던 반지하 40평짜리 움집을 빌려 가발공장을 차렸다. 첫해 2만 달러어치 가발을 수출했다. 다음해에는 15만 달러로 늘었다. 때마침 일본에서 개발된 화학섬유원사 카네칼론의 출현으로 인조가발이 불티나듯 팔려나갔다. 판로는 주로 미국 백화점들이었고 비슷한 시기 출발한 대니안(안인모)과 함께 미국시장을 휩쓸었다. 그의 이니셜을 딴 YH무역은 1967년 50만 달러,68년 200만 달러,69년 470만 달러,그리고 70년엔 1,000만 달러를 돌파하면서 그해 수출의 날 행사에서 철탑산업훈장을 수상했다. 그는 서울 공장을 동서에게 맡기고 1970년부터는 뉴욕 현지에서 진두지휘를 했다. 당시 뉴욕에서 가발로 돈 번 교포들이 많았다. 그 사람들 중의 한 명이 박지원씨다. 나중에 YH무역 공장은 여공이 4000명이 넘어서며 우리나라 최대의 가발 수출공장이 되었다. 그런데 70년대 후반에 불황이 닥치자 사업장을 폐쇄하여 이른바 ‘YH 여공 사태’를 일으켰다. 우리나라는 1964년 서울통상㈜을 통해 처음으로 가발을 수출하기 시작했다. 당시 수출액은 1만4천 달러에 불과했으나 이듬해에는 155만 달러로 100배 이상 폭증했다. 가발기업도 원래는 7~8개에 불과했으나 단번에 40여 개로 늘어났고 수출량도 증가했다. 1966년 가발의 수출액은 천만 달러 고지를 넘어섰다. 1965년 말 미국이 공산국가인 중국의 머리카락을 사용한 가발에 대해 수입금지한 데 따른 반사효과였다. 그동안 재미를 보던 홍콩. 대만.일본산이 규제대상으로 묶이자 자연스레 바이어들의 발길이 한국으로 옮겨지면서 국내 가발산업이 활기를 찾게 됐다. 그러다보니 가발공장이 우후죽순 생겨났고 머리카락 값도 덩달아 올라 1964년에 3.75㎏(1관)당 7천~8천 원 하던 머리카락이 1965년에는 3만~4만원으로 치솟았다. 당시 생산직 근로자 월급이 5천원이었다. 이러한 분위기에 따라 방물장수,엿장수가 동네방네를 돌면서 비녀 꽂은 어머니의 애지중지한 머리카락을 흥정 끝에 잘라냈다. 모발 수집상들은 미용기술 있는 아가씨들을 대동해서 농촌에 가서 서울의 멋쟁이 아가씨들은 최신유행인 파머를 해서 멋을 부린다고 꾀어 머리를 자르게 하고 파머를 해주는 마케팅 전략을 구사하기도 했다. 시골 아낙들은 돈 벌어 좋고 최신유행 파머를 공짜로 해서 좋았다. 사탕발림으로 여자 어린이를 유혹해 머리카락을 잘라가는 도둑도 활개를 쳤다. 심지어 '머리 기르기 운동'을 범국민적으로 전개해야 한다는 정책건의까지 있을 정도였으니 그야말로 온 나라가 가발수출 열풍에 휩싸였다. 그 뒤 한국산 가발과 속눈섭이 미국시장을 독점하다시피 했다. 그러자 정부는 가발 기능양성소까지 세우며 가발산업을 지원했다. 1967년에는 2천만 달러, 1968년에는 3천만 달러,1969년에는 5,336만 달러,1970년에는 9,357만 달러에 도달하여 수출기록은 해마다 경신되었다. 당시 미국으로 이민 간 사람들 중에도 많은 이들이 가발장사를 해서 미국 내에서는‘가발’하면“코리안”을 연상하던 때였다. 교포들이 가발로 돈 번 사람들이 많이 탄생했다. 1971년 4월 26일 김포국제공항은 아침부터 분주했다. 이날은 태극마크를 새긴 대한민국 국적 화물기가 미주지역으로 첫 취항하는 역사적인 날이었다. 대한항공 보잉 707 화물기에 실려 있는 대부분의 수출화물은 가발이었다.
    이러한 가발수출 뒤에는 여공들의 땀이 있었다. 20살이 안된 어린 여공들은 빠르고 정확한 손놀림으로 머리카락 하나하나를 천에다 꿰맸는데 그 솜씨는 신기(神技)에 가까웠다. 중학교를 다녔을 만한 나이의 어린여공들이 열악한 환경에서 때로는 밤을 새며 얇은 머리카락을 하나씩 일일이 붙이는 지루한 과정을 반복했다. 1960년대 수출성장에는 1개의 가발이라도 더 만들기 위해 노력했던 여공들의 땀과 꿈이 묻어있다. 지금도 우리나라 가발산업은 세계 최고의 위치에 있다. 세계 가발시장의 무려 80%를 차지하고 있다. 현재 가발산업은 세계최대 가발업체인 보양산업(대표 강기표)과 대화(대표 김진민)를 비롯해 미성 고려특수산업, 디앤사 등이 주도하고 있다. 비록 인건비 부담으로 공장은 중국,동남아, 아프리카 등지에서 가동하지만 기술력과 디자인,유통 에서 세계를 장악하고 있다. (출처; 대미수출 견인 가발, 부산세관박물관장, 파이낸셜뉴스, 노주섭 기자, 2013.4.14.) ㆍ이런 수출품목도 있었다/ 소변 수출
    1960~70년대 우리나라의 주요 수출품목에는 가발과 함께 소변이 상위에 올라 있었다. 산업 발달이 미비해 이렇다 할 수출품이 없던 당시 주요 수출품은 우리의 몸에서 얻어지는 것 들이었다. 여인들의 풍성한 머리채는 싹둑 잘라져 가발로 변모했고, 소변은 공중화장실마다 비치되었던 흰색 플라스틱 통으로 모았다. "한 방울이라도 통 속에!” 1960년에서 1970년대 공중화장실마다 붙어 있던 안내문이다. 학교, 예비군 훈련장, 버스터미널 등의 남자화장실에는 이런 안내문과 함께 흰색 플라스틱 통이 놓여 있었다. 바로 오줌을 수집하기 위해서였다. 사람의 오줌 속에 들어 있는 우로키나아제가 뇌졸중 치료제를 만드는 주원료로 사용됐기 때문 이다. 당시 우로키나아제는 1킬로그램에 2,000달러였다. 마땅히 수출할 것이 없었던 우리나라에서는 오줌을 모아 화학처리를 한 뒤 일본에 팔아 돈을 벌었다. 그 돈은 1973년에는 50만 달러, 1974년에는 150만 달러에 달했다. 소변을 정제해 얻어지는 우로키나제는 뇌혈전증, 심근경색, 고혈압, 중풍치료제로 이용됐다. 1인당 국민총생산(GNP)이 1000달러 남짓하던 시절, 우로키나제는 상당히 매력적인 고가의 수출품이라 수집 대상에서 제외될 수 없었다. >
    당시 훌륭한 수출품이었던 소변은 88올림픽 뒤 대부분의 화장실이 수세식으로 바뀌어 더 이상 수거할 수 없었다. 우리 녹십자의 경우 중국 소변을 수입해 약을 만들었으나 품질이 낮아 북한 평양에 합작공장을 설립해 문제를 해결했다. 북한은 에이즈 등 비뇨기성 질환이 거의 없어 좋은 품질의 소변이 수거되었다. ㆍ수출상품 개발에 혈안이 되다
    그 무렵 돈 되는 거라면 뭐든지 내다 팔았다. 심지어 돼지털,쥐털,다람쥐,갯지렁이,뱀,메뚜기,번데기 등도 수출했다. 귀여운 한국산 다람쥐는 세계 각국으로 팔려나가 외국인들 앞에서 열심히 쳇바퀴를 돌려야 했다. 1969년 한해 다람쥐 수출로 벌어들인 외화는 24만5천 달러였다. 길에 떨어진 은행잎은 환경미화원들이 수거해 독일의 제약회사에 팔았고 자작나무는 이쑤시개로 만들어 수출했다. 그리고 솔방울을 일본과 서독에 장식품으로 팔았다. 일본에서 레저 붐을 타고 낚시가 유행하자, 우리나라 갯벌에는 사람들이 몰려들어 일본에 낚시미끼로 수출할 갯지렁이를 잡았다. 70년대에 들어서며 KOTRA 내에는 '수출상품 연구부'가 설치됐다. 이곳에서 다양한 수출상품 개발과 수출방안을 연구했다. 매월 상공부 장관이 직접 주재해 수출아이디어 회의를 했다. 아이디어만 3백여 건이 나올 정도였다. 회의는 ‘수출을 해야 하는데 뭘 해야 하나?’ ‘어떤 제도를 고치면 좋겠냐?’ 수출전반에 대해 KOTRA맨들과 새로운 상품을 의논하고 토론하는 장이었다. 당시 주요 수출품목은 중석, 한창(우뭇가사리), 생사,견직물,도자기,고무제품,조개와 전복 등 어패류,칡으로 만든 갈포벽지,가발,양송이버섯 통조림 등이었다. 원단 공장에서는 일본의 기모노를 가공해서 수출을 했다. 그리고 섬유에 실로 모양을 내서 묶어 염색하는 홀치기도 수출했는데 시설도 원자재도 필요 없고 인건비는 싸서 이런 상품들은 효자노릇을 톡톡히 했다. 이 때 발굴된 신규 수출상품이란 것이'마른 상어지느러미,번데기 튀김,멸치분말,누에똥 가공품,꿩알,병아리,곶감,은행잎,만화영화 등'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참 소박한 것들이다. 그런데 당시에는 하나라도 더 수출할 것이 없을까 헤매던 때라 이런 것들도 수출이 될 수 있다고 믿었고 실제로 적은 금액이나마 수출했다. 이런 일화도 있다. 담배의 국내 소비를 조금만 줄이면,그러니까 담배길이를 1cm만 줄이면 엽연초 1천4백만 달러를 수출할 수 있다는 아이디어가 나왔다. 길이를 1cm를 줄이면 국내 소비자가 싫어한다는 의견에 결국 7mm만 줄여 6백만 달러어치를 수출한 적도 있었다. (출처; 임인택의 수출입국 회고, 월간 경제풍월 2000년, 신경윤)
              글 홍익희 세종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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