浮 - 채마밭/기획ㆍ특집

“조선은 국가 주도로 무예서를 만들어 보급한 세계 유일의 나라”

浮萍草 2016. 1. 5. 12:09
    무카스 무예산업연구소 박금수 박사
    KBS 역사프로그램〈역사저널 그날〉에서 우리 역사를 좀 더 입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게끔 도와주는 인물이 있다. 당시 전쟁에서 어떤 무기를 들고 어떻게 싸웠는지 시연하는 박금수 박사다. 신라 화랑 황창이 검무를 추다 백제왕을 어떻게 기습했는지 보여주는 그의 몸동작은 유연하면서도 날카롭고 위협적이다. 그를 통해 우리나라 무예의 역사를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다. “황창의 검법은 정조 때 편찬한 《무예도보통지(武藝圖譜通志)》에 본국검(本國劍)이라는 이름으로 등장합니다. 본국검은 오늘날 청와대 경호실에 해당하는 무예청의 무예별감들도 필수로 익힌 무예로 황창의 고사에서 그 기원을 찾습니다. 본국검과 예도(銳刀)는 우리나라에서 내려온 독창적인 검법으로 명나라 말 병법서인《무비지(武備志)》에‘조선세법(朝鮮勢法)’으로 올라 있습니다. 《무비지》의 저자는“중국에서도 제대로 갖추어진 검보가 사라졌는데 조선에서 완전한 검보를 얻어 조선세법이라 이름 붙였다”고 밝혔습니다. 조선세법에는 대략 세 가지 동작으로 이루어진 24개의 세법이 정리되어 있는데 세법을 어떻게 연결하느냐에 따라 수백,수천 가지 연결형 검법을 만들어낼 수 있죠. 《무비지》에 올라 있는 조선세법은 《무예도보통지》에 다시 수록되었습니다. 요즘도 국방력을 높이기 위해 세계 최강의 무기를 들여오려고 하잖아요? 무력이 국가의 존망에 차지하는 비중이 컸던 옛날은 더했겠죠. 강하다는 무기, 무예는 국경을 넘어 빠른 속도로 전파되었습니다. 우리나라와 중국, 일본 사이 활발히 영향을 주고받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ㆍ서울대 전기공학과 재학 중 전통무예에 빠져들어
    박금수 박사를 무예미디어회사인 ‘무카스’에서 만났다. 얼마 전부터 무카스 무예산업연구소 선임연구원으로 출근하고 있다고 했다. 둥그스름 부드러운 인상만으로 그가 무예 전문가인지 짐작하기 어렵다. 대학 전공은 더 동떨어져 있다. 서울대 전기공학과를 졸업한 그는 대학 동아리에서 무예를 연마하다 아예 서울대 체육교육과 대학원으로 진학해 무예 연구로 박사학위까지 받았다. 돌이켜보면 어릴 때부터 무예에 빠져 지냈다고 한다. “서울 화곡동 산동네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 집 뒤에 있는 산에서 목검을 휘두르며 전쟁놀이를 하는 게 일상이었죠. 초등학교 때에는 학교 대표 태권도 시범단으로 활동했고요. 고등학생과 겨뤄 이긴 적도 있어요. 무기도 좋아해 중・고등학교 때에는 활이나 총까지 만들었습니다. 공부하다 머리가 아프면 총 설계도를 그리곤 했죠. 고 3때 2연발 화약총을 만들 정도였으니까요.” 그는 ‘로보캅(로봇경찰)’을 만들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서울대 공대 전기공학과에 진학했다. 공장을 운영하는 아버지의 영향도 컸다. 그러나 입학하자마자 찾은 곳은 무예 동아리였다. “입학식이 끝난 바로 그날 오후,학생회관에 있는 동아리들부터 뒤졌어요. 그런데 ‘전통무예연구회’란 간판이 보이는 거예요. 문을 열었더니,기타를 치고 있던 한 선배가 ‘자네 혹시 무술 배우러 왔냐?’ 고 묻더군요. 그 후 제 대학생활의 중심은 전공 공부가 아니라 무예가 되었습니다. 대학생활 내내 목검과 곤봉을 휘두르며 지냈죠.” 알고 보니 그곳은 십팔기를 연구하는 동아리였다. 어감도 생소하던 십팔기를 대학에서 처음 접하고 빠져들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으로 한반도는 전쟁터가 되었지만 실전에서 얻은 경험을 바탕으로 동양 최고의 무예들을 흡수해 독자적인 무예체계를 정립한 계기가 되기도 했다. 조선의 왕들은 문약했으리라는 생각과 달리 무예로 심신을 단련하는 것은 왕이 되기 위한 훈련 중 하나였다고 한다. 효종이나 사도세자는 무거운 월도를 자유자재로 휘두르고 말 타고 달리면서 쏜 활이 백발백중일 정도로 무인 기질이 넘쳤다. 정조 역시 문(文)과 무(武)가 조화를 이루는 나라를 꿈꿨다. 사도세자가 조선군의 무예를 18가지로 정리하면서 붙인 명칭이 십팔기(十八技)다. 정조는 십팔기의 각 종목을 체계적으로 정리하면서 그림을 곁들여 상세하게 설명한 《무예도보통지》를 편찬, 조선의 군사들이 무예수련의 기본으로 삼게 했다. “국가 주도로 무예를 정립해 무예서를 편찬하고 전국에 보급한 예는 세계에서 유례를 찾기 어렵습니다. 하지만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십팔기의 맥은 끊기다시피 했습니다. 이를 되살린 분이 해범 김광석 선생이죠. 도가 문중의 후손인 김광석 선생은 어려서부터 다양한 수행법과 무예를 익혔고 집안 어른으로부터 십팔기를 전수받으셨다 합니다. 1969년 십팔기 도장을 열어 후학을 기르기 시작했고 1987년에는 민속학자 심우성 선생과 함께 《무예도보통지실기해제》를 펴내셨죠.” 그 역시 대학생 때부터 김광석 선생에게 십팔기를 전수받아 4단에 이르렀다. 그는 “태권도의 겨루기에서는 손을 사용하지 못해 답답했는데 십팔기를 하면서 답답함이 풀렸다”고 말한다. “십팔기에서는 주먹을 사용하는 권법이 중요합니다. 손에 어떤 무기를 잡든 권법의 연장선에 있죠. 검을 잡든 봉을 잡든 권법의 동작에서 에너지가 나오니까요. 무예수련을 할 때도 권법이 기본이 됩니다.” 군 복무를 마치고 복학했을 때 그는 본격적으로 진로를 고민했다. “전공을 살려 로봇 관련 일을 해볼까 생각했지만 저 자신을 돌아보니 사람에 더 관심이 많더라고요. 사람에 관한 공부를 하고 싶었습니다. 한의대에 갈까 하는 고민도 했죠. 그런데 십팔기를 함께 수련했던 친구가 ‘수련이 곧 연구 활동이 될 수 있다’면서 체육교육과 대학원 진학을 권했어요. 좋아하던 십팔기를 학문적으로 접근할 수 있는 기회였죠. 하지만 해범 선생님은 ‘생계를 해결하기 여의치 않아 순수한 무예인의 길을 고수하기 어려울 수도 있다’고 걱정하면서 말리셨습니다.”
    ㆍ각종 방송 프로그램에서 전통무예 자문
    대학원에서 무예 역사를 연구한 그는‘조선후기 진법(陳法)과 무예의 훈련에 관한 연구’로 2013년 박사학위를 받았다. “드라마에서 장군이 ‘돌격 앞으로’라고 외치는 장면은 사실과 달라요. 아수라장인 전쟁터에서 그 소리가 제대로 전달되겠어요? 실제로는 깃발 그리고 북, 징, 나팔, 방울 같은 악기를 동원해 병사를 일사불란하게 지휘했습니다. 어떻게 전투지휘를 하는지, 진을 치는지가 개개인의 전투 능력 이상으로 큰 영향을 끼치죠. 명나라 장수가 고안한 진법인 원앙진(鴛鴦陳)은 여섯 가지 무기를 든 열두 명이 한몸처럼 움직이며 각 무기의 단점을 보완하고 장점을 극대화합니다. 협동정신이 무엇보다 중요하죠. 임진왜란 때 평양성 탈환으로 위력을 보여준 이 진법은 우리나라에서 오랫 동안 영향을 끼쳤습니다. 독립군 편제에도 활용되었을 정도니까요.” 전통무예십팔기보존회의 사무국장인 그는 매년 봄가을 경복궁에서 국왕의 사열의식인 첩종(疊鐘)을 재현하고, 남한산성 행궁에서는 상황극 ‘아랏차차 수어청’을 보여준다. 일반인들이 조선시대 군사들의 복식과 무기, 무예를 한눈에 볼 수 있는 기회다. “첩종은 조선시대 왕이 문무백관과 병사들을 집결시킨 후 직접 호위군을 사열하던 의식입니다. 남한산성은 한강을 지키는 천혜의 요새로 고대부터 우리 민족이 무혼(武魂)을 불태우던 곳이죠. 수어청(守禦廳)은 정묘호란 이후 군사력을 강화하는 과정에서 남한산성에 설치한 중앙군영으로, 300여 년간 이곳에 주둔했습니다. ‘아랏차차 수어청’은 수어청 군사들의 생활과 무예를 이야기로 섞어 보여주는 상황극입니다.” 그는 국방부 전통의장대 지도위원, 서울 경찰특공대 전통무예시범단 무예지도를 맡고, 각종 방송 프로그램 에서 전통무예 자문을 해오고 있다. 드라마 〈추노〉의 주인공을 맡은 장혁과 오지호의 무술지도를 하기도 했다. 지금은 한중합작으로 제작 중인 임진왜란 관련 다큐멘터리의 자문을 맡고 있다고 한다. 이제까지 무예라고 하면 중국 무술과 일본 사무라이부터 떠올린 사람이 많지 않을까? 그의 활동 폭이 넓어질수록 우리 무예도 제자리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해본다.
              글 : 이선주 월간탑클래스 기자 / 사진 : 김선아 월간탑클래스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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