浮 - 채마밭/기획ㆍ특집

조선 초기 호랑이는 물가에 살았다 上

浮萍草 2015. 12. 17. 19:25
    호랑이는 일제강점기에 이미 몰락의 길을 걷고 있었다
     <편집자 주> 영화 ‘대호’가 개봉을 앞두고 있습니다.  지리산에 살고 있던 마지막 호랑이를 잡으려는 일본군과 ‘산군(호랑이 중의 호랑이를 호칭하는 말)’을  지키려는 어느 사냥꾼(최민식)의 이야기입니다. ‘  대호’ 덕분에 호랑이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고 이에 조선 시대에 살았던 호랑이의 삶에 대해 알려드립니다.  매일 업데이트 되는 소식, 놓치지 마세요~!
    2015년 12월 16일 개봉하는 영화 ‘대호’ 조선에 마지막 남은 호랑이와 그에 얽힌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뤘다. - &credit 제공 제공
    영화 ‘대호’가 개봉을 앞둔 가운데 한국 호랑이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과연 한국에서 호랑이는
    어떻게 살고, 어떻게 사라졌을까. - 과학동아 2013년
    8월호, 전규만 그림
    오늘날에는 멸종위기종의 개체수를 전국적으로 조사해 그 수가 얼마나,어떻게 줄고 있는지 파악한다. 하지만 그렇지 않았던 수백 년 전은 어떻게 알 수 있을까. 바로 그림과 기록을 통해서다. 고구려의 무용총이나 약수리 고분의 벽화에는 황급하게 쫓기는 호랑이,말을 탄 채 활을 당기고 있는 무사, 사냥감을 모는 몰이꾼 그리고 사냥감을 운반하는 사람등이 다큐멘터리처럼 그려져 있다. 이는 당시 사람과 호랑이 또는 표범이 서로 활발히 접촉했음을 보여준다. ‘고려사’‘고려사절요’‘조선왕조실록’‘승정원일기’‘대동사목’‘탁지지’ 그리고 각종 문집에는 더욱 자세한 내용이 생생하게 기록돼 있다. “각종 기록을 보면 호랑이는 조선시대까지도 한반도에 흔했다. 인적이 드문 산이 아니라 강가 수풀에서도 태연히 놀거나 사냥하는 모습을 볼 수 있을 정도였다. 이런 상태로 호랑이는 수천 년 동안 한반도에서 한민족과 더불어 살았다. 그런데 지금은 호랑이를 전혀 볼 수 없다. 어떤 일이 벌어졌던 걸까.” ㆍ호랑이의 몰락은 17세기 말부터
    한반도에서는 호랑이를 의미하는 ‘호’자가 호랑이와 표범을 모두 의미할 때가 많았다. 우리말로 호랑이는 범, 갈범, 칡범 등으로 불렀고, 표범은 돈범으로 불렀다. ‘경국대전’의 포호조(호랑이 포획에 대한 항목)에도 호랑이, 표범, 스라소니가 포함돼 있다.
    과학동아 2013년 8월호 (클릭하면 커집니다)

    필자는 이런 기록을 통해 호랑이와 표범이 출현한 지역을 조사했다. 출현 공간을 사람들이 생활하는 공간(가용공간)과 호랑이나 표범이 안정적으로 사는 공간(서식 공간), 그리고 이들 사이의 점이지대로 나누고 분포를 비교했는데, 결과가 흥미로웠다. 먼저 고려시대에서 17세기까지,호랑이와 표범이 사람이 사는 공간에서 출현하는 비율이 꾸준히 높아졌다. 반대로 호랑이가 원래 살던 공간(서식 공간)에서 만나는 비율은 크게 감소했다. 이것은 호랑이가 사람이 사는 곳에 다가갔다는 뜻이다. 농업 개발로 한반도의 많은 지역이 농경지로 바뀌었고 새롭게 만들어진 촌락 주변은 땔감을 채취하는 공간이 됐다. 호랑이와 표범 입장에서는 안정적인 서식지가 줄어들었고, 자꾸만 사람이 사는 곳 주위를 어슬렁거리게 됐다. 18~19세기가 되면서 사정이 달라졌다. 호랑이와 표범은 여전히 사람들이 사는 공간에 많이 출현했지만,서식 공간과 점이지대에서 출현하는 비율이 매우 높아 졌다. 하지만 호랑이와 표범의 서식지가 늘거나 개체수를 회복해서가 아니었다. 조선 왕조가 오래 이어지면서 왕족의 능침이 경기도 부근에 많아졌고 이 지역이 봉금 지대(출입이나 접촉을 금지한 지대)로 지정돼 주변이 원시림이 됐다. 그 결과 사람이 살지 않는 지역에서 호랑이를 만날 확률이 높아졌던 것뿐이다. 실제로 호환(호랑이를 만나 입은 피해)이 가장 많이 발생한 17세기 후반 이후,호랑이와 표범의 수는 급속히 감소했다. 동시에 한반도 최상위 포식자는 호랑이에서 점차 늑대로 바뀌기 시작했다. 일제시기에는 이른바 ‘해수구제정책’으로 맹수를 잡아들였는데 이때 포획된 맹수의 대부분이 늑대였다. 즉 일제시기에 호랑이는 거의 절멸에 가까운 상황을 맞았고 이런 호랑이의 본격적인‘몰락’은 17세기 말부터 시작됐다.
    에디터 윤신영 동아사이언스 기자 ashilla@donga.com 김동진 전 서울대 수의대 BK부교수 한국교원대학교 역사교육과 강사이자 (사)한국범보전기금 인문학술이사, 인간동물문화연구회 공동연구원이다. 전 서울대 BK 연구교수를 역임했다.
          
    글 김동진 전 서울대 수의대 BK부교수 kimdj66@hanm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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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호랑이, 사람에게 쫓겨 산 속으로 들어가다
    “각종 기록을 보면 호랑이는 조선시대까지도 한반도에 흔했다. 인적이 드문 산이 아니라 강가 수풀에서도 태연히 놀거나 사냥하는 모습을 볼 수 있을 정도였다. 이런 상태로 호랑이는 수천 년 동안 한반도에서 한민족과 더불어 살았다. 그런데 지금은 호랑이를 전혀 볼 수 없다. 어떤 일이 벌어졌던 걸까.” ㆍ물과 불에 쫓겨 산으로 숨어들어가다
    한반도에서 범이 사라지게 된 원인은 무엇일까. 농지개간으로 서식지가 감소한 것이 가장 중요한 이유다. 예로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농업 개발은 15세기에 본격화됐다. 그 이전까지, 강가는 사람들이 가끔 시초(땔나무로 쓰던 풀)를 채취하거나 사냥을 하던 곳이 었다. 하지만 개간이 이뤄지고 나서는 일상적으로 생산 활동을 하는 공간이 됐다. 주로 천방(川防), 방천(防川),보(洑)와 같은 새로운 수리 시설이 설치됐다. 이는 강가에 수리시설을 짓고 논(무논, 수전)을 마련한 것을 의미한다. 소하천의 물을 이용해 농사를 짓고, 이 과정에서 강가에 자생하고 있던 숲을 제거해 농경지로 바꿨다. 문제는 이곳이 식생이 풍부해 호랑이가 즐겨 찾던 곳이라는 점이다. 물가를 빼앗긴 호랑이는 결국 산속으로 들어갔다. 17세기에서 19세기에는 산에 불을 지르는 화전이 극성을 부렸다. 과거 수전의 개발은 생산력의 증가로 이어지고,그 결과 인구가 급격히 늘어났다. 늘어난 인구를 부양하기 위해 더 많은 농경지가 필요해졌다. 수전으로 부족해지자 사람들은 산골짜기와 중턱에 화전을 개발하기 시작했다. 화전은 지력을 고갈시킨다. 사람들은 한번 개발한 화전을 몇 년간 버려두고 다시 새로운 지역에서 화전을 개발했다. 이런 방식은 호랑이와 표범이 살아가는 공간을 이전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잠식했다. 안 그래도 수전 때문에 숲으로 떠밀려 간 호랑이는 천변보다 식생이 부족해 먹잇감의 밀도가 낮은 산 속 서식공간에서도 오갈 곳이 없게 됐다. 호랑이와 표범의 서식지가 급격히 줄어들자 호환이 기승을 부렸다. 이 시기의 연대기를 보면 “호랑이가 마을과 마을 사이를 미친 듯이 돌아다니고 있다” 같은 기록이 일상적으로 등장하고 있다. 더구나 비슷한 시기에 유행한 우역 바이러스는 먹이 마저 앗아갔다. 소 등 우제류에만 감염되는 이 바이러스는 1636년 5월 만주에서 조선으로 전파됐다. 한 번 들어온 우역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고 조선의 소는 주기적으로 우역에 걸리게 됐다. 그런데 사람이 산지에서까지 살기 시작하면서 우역은 가축(소)에서 야생 동물(사슴)로 전파됐고,병자호란 이후에는 사슴이 거의 멸종 단계에 들어섰다. 개마고원 등 고산지대와 섬, 바닷가 정도에서만 사슴을 볼 수 있을 정도였다. 사슴은 당시 호랑이의 주요 먹이였다. 먹을 게 없어진 호랑이는 먹이를 찾아 점점 마을로 내려왔고 호환은 더 늘었다. ㆍ공물과 돈을 위한 사냥감이 되다
    사냥도 중요한 이유였다. 호랑이 사냥은 당시 유통되던 가죽의 양으로 간접적으로 추정할 수 있는데, 내용이 흥미롭다. 15세기에는 호랑이와 표범의 출현이 늘어난 이후 호피와 표피의 사용량이 늘어났다. 당시 시행된 포호 정책은 ‘위민제해(백성을 위해 해로운 것을 없앤다)’라는 성리학적 통치 이념을 실현하는 과정이었다. 따라서 호랑이가 많이 나타나면 백성을 위해 잡았고 그 결과 부수적으로 호랑이 가죽 사용도 늘었다.
    과학동아 2013년 8월호, 전규만 그림

    하지만 17세기 후반이 되자 사정이 바뀌었다. 두 차례의 호란에서 승리한 청이 중원을 장악하기 위해 전쟁을 벌이고,그 비용을 조선에게 공물로 요구했다. 조선은 청이 강요하는 공급량을 조달하기 위해 전에 잡던 수량의 호피와 표피를 먼저 보내고 추가로 더 많은 호랑이와 표범을 사냥해야 했다. 그 결과 기록에는 호피와 표피의 사용량이 늘어난 이후 호랑이와 표범의 출현도 늘어났다(사냥을 하러가서 만나게 됐다). 이후 중원을 완전히 장악한 청이 표피 공물을 감면하고(1711년), 조선 역시 호속목(호랑이를 잡아주는 대가로 면포나 쌀 등을 징수하는 제도)을 폐기하면서 (1728년) 호피와 표피의 강제 조달을 중단했다. 하지만 이미 늦어서 18세기 후반에는 한반도 대부분에서 호랑이와 표범의 서식지가 축소됐고 서식지에서도 개체수가 크게 감소했다. 야생에서 사람들이 발견한 개체수를 봐도, 17세기까지 2~5마리 가량의 집단도 발견됐지만 18세기 이후에는 한두 마리가 대부분이었다. 경제적 이윤도 큰 동기였다. 가죽은 값비싸고 중요한 자원이었다. ‘만기요람’에 나타난 호랑이 가죽과 표범 가죽의 값은 각각 쌀로 13석 5두(약 1200L)와 20석(1800L)이었다. 당시 최고급 기술자인 궁장(활과 화살을 만드는 장인)의 임금으로 따지면 각각 500일치와 750일치 임금에 해당하는 수준이다. 2013년 2월 기준으로 환산해보면 1억 3500만 원(호랑이 가죽)에서 2억원(표범 가죽)에 달하는 금액이다. 이렇게 값비싼 호피는 국내에서 고가의 물품을 거래할 때나,국제무역에서 고액의 상품을 결제할 때 널리 사용됐다.
    ㆍ한 해 1000마리가 사냥됐다?
    
    사냥된 호랑이나 표범의 수는 얼마나 많았을까. 
    15~16세기의 자료를 보면 성종 무렵에는 창고에 수만 장의 호피가 쌓인 채 썩어가고 있다는 주장이 나온다. 
    일본이 대마도를 통해 1000여 장의 호피를 구하는 대복도 있다. 
    17세기 전반 비변사의 논의에서는 전국 220여 개 군현에서 매년 3장 씩의 호피를 진상했다고 나와 있다. 
    단순하게 계산해도 전국에서 매년 1000여 마리의 호랑이와 표범을 사냥했다는 뜻이다. 
    기록에는 호랑이와 표범 가죽이 섞여 있다. 각각의 비율은 어땠을까. 
    18~19세기에 작성된 탁지지나 만기요람을 보면,조선 국왕이 19세기 초에 받게 된 명목상(값으로 환산하여 받아들이는)의 호피와 표피는 각각 26장과 85장
    이었다. 
    청에 조공으로 바치는 예단은 각각 27장(호피)와 30장(표피)이었으며,일본 측에 매년 보내는 회사품은 각각 12장(호피)과 16장(표피)이었다. 
    즉 호피나 호송목 등으로 표현된 호랑이의 절반 이상은 사실상 표범이었다. 
    역사 기록에는 호랑이의 비율이 압도적으로 높게 나타나지만,표피 사용량을 통해 추정해보면 한반도에서 살며 사냥된 수는 표범이 호랑이보다 더 많다. 
    
    사진으로만 볼 수 있는 한국 호랑이의 흔적. 다시 백두대간에서 만날 날은 언제일까. - 동아일보 제공

    에디터 윤신영 동아사이언스 기자 ashilla@donga.com
          
    글 김동진 전 서울대 수의대 BK부교수 kimdj66@hanm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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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ㆍ그 많던 호랑이는 다 어디로 갔을까
    지 개간과 사냥에 시달리던 호랑이는 결국,19세기에서 20세기에 이르는 시기에 한반도의 중남부 지역에서 사실상 절멸했다. 
    19세기 후반 샤를 달레 신부는 ‘한국 천주교회사’에서 “(한반도) 북쪽의 두 도를 빼놓고는 거의 어디나 산이 일궈져서 호랑이는 제 굴에서 쫓겨나 그 수가 훨씬 
    적어졌다”고 말했다. 
    실제로 개항 이후 조선을 찾은 많은 외국인들은 조선의 호랑이를 찾아 함경도 평안도를 향해야 했다.
    이 시기 남한 지역에서 호랑이가 절멸하게 된 원인은 세 가지를 꼽을 수 있다. 
    먼저 일제의 해수구제정책이다. 
    일제는 호랑이 사냥을 위해 조직됐던 포수가 항일의병이 되는 것을 두려워했다. 
    그래서 무기 소지를 불법화했는데, 이 때문에 호랑이 늑대 등의 맹수로 인한 피해가 다시 급격히 늘어났다. 
    이에 따라 일제는 한반도의 곳곳에 헌병을 파견해 맹수를 잡아들였다.
    
    ㆍ17세기 후반부터 줄어든 호랑이, 일제시기에 절멸
    하지만 해수구제정책에서 일본의 실제 역할은 미미했다. 경주 대덕산에서 호랑이를 잡은 사건이 대표적인 예다. 이 호랑이는 사실 조선의 포수가 사냥한 것인데, 일본의 헌병이 가로채서 자신의 공으로 보고했다. 게다가 이 호랑이 가죽을 일본 천황 가에 충성의 표시로 바치고, 이를 보통학교 국어 독본에 실어 일제와 천황 가에 대한 충성을 요구했다.
    1921년 경주 대덕산에서 호랑이를 잡은 모습(왼쪽)과 구한말 조선 포수의 모습(오른쪽) - 동아일보 제공

    일제는 서구 열강의 자본가들의 호피 수집도 지원했다. 제국주의의 우월성을 선전하면서 조선인들의 독립의지를 말살하기 위해서였다. 특히 앞장 선 것은 영국과 미국의 성공한 실업가들이었다. 1903년 전라도를 찾아 해남과 진도 일원에서 사냥한 영국의 포드 바클레이 일행, 1922년 함경도에서 호랑이를 잡은 루스벨트 일행 등이 그 예다. 일본의 민족적 색채를 드러낸 제국주의자도 있었다. 야마모토 타다사부로는 임진왜란에서 활약한 일본 장수 가토 기요마사의 후예임을 자처하면서 ‘호랑이 정벌군(정호군,征虎軍)’을 조직해 함경도,금강 산록,전라도 일대에서 호랑이를 사냥했고 ‘정호기(征虎記)’라는 책까지 남겼다. 하지만 이들 사냥에는 대부분 조선의 명포수나 지역 주민들이 참여했다. 마지막으로 한국전쟁 뒤에 생긴 휴전선은 한반도에서 호랑이와 표범이 절멸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였다. 한반도의 남부 지역에 살았던 호랑이와 표범의 대부분은 17세기 후반 이래 백두대간에 형성된 생태축을 따라 이동해왔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런데 휴전선으로 생태축이 인위적으로 단절되자 호랑이와 표범은 더 이상 남한 지역에 살아갈 수 없게 됐다. ㆍ호랑이의 귀환을 기다리며
    남한에 살던 호랑이 가운데 가장 마지막으로 사진을 남긴 것은 1921년 경주 대덕산에서 잡힌 호랑이다. 하지만 1930년대까지 호랑이를 잡았다는 다른 공식 기록도 적지 않다. 해방 이후에도 남한에서 호랑이가 나타났다는 제보도 있었고 1960년대 초반에는 합천의 가야산 일원에서 표범이 잡혀 당시 동물원이 있던 창경원에 옮겨진적이 있다. 그리고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야생의 한국 호랑이와 표범은 이렇게 우리의 곁에서 사라졌다. 하지만 아직도 아직도 연해주와 만주에는 한반도를 포효하던 호랑이의 중심무리가 살아 있고, 백두산 일원에 살아있다는 주장도 있다. 호랑이의 존재는 한반도 생태계의 건강성을 보여주는 지표다. 또 한국인은 호랑이가 존재하는 생태 환경속에서 살며 독특한 문화를 발전시켜왔다. 이제 한반도에서 호랑이를 복원하는 방안도 생각해볼 때다. 물론 넘어야 할 난관이 많다. 하지만 문화와 생태,환경,그리고 복잡하고 섬세한 문제도 해결해 내는 현대 과학의 발전 덕분에 호랑이 복원은 실현 가능한 꿈이 돼가고 있다. 호랑이의 귀환을 기다려본다.(끝)
    에디터 윤신영 동아사이언스 기자 ashilla@donga.com
           글 김동진 전 서울대 수의대 BK부교수 kimdj66@hanm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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