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W T = ♣/역사 이야기

8 조식, 무엇을 지키려 했나

浮萍草 2015. 12. 17. 10:33
    出仕 어명 7번이나 거절하며 은둔한 영원한 處士
    일러스트 = 전승훈 기자 jeon@munhwa.com
    하의 국사가 잘못되어 하늘의 뜻도 인심도 모두 떠났습니다. 백 년 동안 벌레가 갉아먹어 진액이 다 말라버린 고목에 사나운 비바람이 언제 닥칠지 모를 형국입니다. 조정에 충신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낮은 벼슬아치들은 주색이나 즐기며 높은 벼슬아치들은 뇌물 챙기기에 급급할 따름입니다. 궁궐 안 신하들은 연못 속 용처럼 자기 세력을 끌어들이려 혈안이고 궁궐 밖 신하들은 들판의 이리처럼 날뛰며 백성들을 핍박하고 있습니다. 신은 이 때문에 낮이면 하늘을 우러러 장탄식하고 밤이면 멍하니 천정을 쳐다보며 아픈 가슴을 억누른 지 오랩니다. 자전(慈殿)께서는 생각이 깊으시나 깊숙한 궁중의 과부(寡婦)에 불과하고 전하는 어리시니 선왕의 고아(孤兒)일 따름입니다. 하늘의 재앙과 민심의 이반을 어떻게 감당하고 수습하시겠습니까? 이 글은 명종 10년(1555) 10월 11일 조식이 단성 현감에 제수되었을 때 올린 상소문의 일부다. 이 상소에서 조식은 명종의 어머니 문정왕후(文定王后)를 과부라 불렀고, 명종도 어린 고아라 일컬었다. 나라는 거센 비바람에 맞선 벌레 먹은 고목 형국인데,사리사욕에 눈먼 관료들은 백성들을 겁박하는 데만 혈안이고,왕실도 이반된 민심을 되돌릴 능력이 없다는 비판이다. 물론 유학자들의 상소가 늘 그러하듯이 조식의 상소에도 임금에 대한 충성어린 제안이 담겨 있었다. 제안의 핵심은 모든 정치의 근본이 임금의 마음에 달려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상소의 최종 결론은 훗날 정사가 제대로 펼쳐질 때 마부가 되어 채찍을 잡을지언정 지금은 자신이 나설 때가 아니라는 것이었다. 조식이 출사를 거부한 것이 이때가 처음은 아니었다. 그는 중종 33년(1538)에 헌릉(태종의 능) 참봉(종9품)에 제수되었지만 받아들이지 않았고 명종 3년(1548)에 제수된 전생서 주부와 명종 6년(1551)에 제수된 종부시 주부도 모두 사절했다. 주부는 종6품 관직이다. 그리고 55세 때인 명종 10년엔 단성 현감 직(종6품)을 사양했고, 59세 때엔 조지서 사지(종6품)에 임명되었으나 역시 받아들이지 않았다. 66세 때인 명종 21년(1566)에는 상서원 판관(종5품)으로 임명되었지만 임금과 독대 후 실망해 사직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69세 때인 선조 2년(1569)에는 그를 종친부 전첨(정4품)으로 불러들였지만 사양하고 나가지 않았다. 조식이 일곱 번이나 임금의 부름에 응하지 않은 이유는 무엇일까? 그가 처음부터 출사(出仕)에 뜻을 두지 않고 처사(處士)의 삶을 지향했기 때문일까? 물론 ‘졸기’(卒記·실록에 실린 간략한 전기)에도 기록되어 있듯이 세상에서는 그를 처사로 기억했고, 임종할 때 제자들에게 밝혔듯이 그 자신도 처사로 불리기를 원했다. 그러나 그가 처음부터 처사가 되기를 고집했던 것은 아니다. 그도 젊은 시절에는 여느 사대부가의 자제들처럼 과거 급제를 통한 입신양명의 길을 숙명으로 받아들였다. 그는 약관의 나이에 한성시 초시와 사마시 초시에 합격했고 이후 여러 과거 시험에서 급제와 낙방을 거듭하며 나이 서른을 넘겼다. 10년 동안 과거에 매달렸지만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자 조식은 자신의 문장이 과문(科文·과거 시험의 문체)에 맞지 않는지 의심했다. 그래서 그는 평이하고 간결한 책을 구해 읽기 시작했고, 이때 마침 읽은 책들 중 하나가 ‘성리대전(性理大全)’이었다. 그런데 우연히 읽은 이 책의 다음 한 단락이 그의 운명을 결정적으로 바꾸어 놓았다. 이윤(伊尹)이 뜻한 바에 뜻을 두고 안회(顔回)가 배운 바를 배워라. 벼슬길에 나아가면 크게 이룬 것이 있어야 하고, 물러나 은거하면 굳게 지킨 것이 있어야 한다. 장부라면 마땅히 이와 같이 해야 한다. 벼슬길에 나아가도 크게 이룬 일이 없고 물러나 은거해도 굳게 지킨 것이 없다면, 뜻을 품고 학문에 힘쓴들 장차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성리대전’ 권50, 力行) 원나라 유학자 허형(許衡)의 말이었다. 스스로 술회했듯이, 조식은 이 글을 읽고 부끄럽고 위축되어 정신을 잃을 정도로 충격을 받았다. 이제 과거 합격만을 위한 공부는 재고되어야 했다. 벼슬에 뜻을 둔다면 이윤과 같은 포부를 품어야 했고, 출사를 포기하고 은둔하려면 안회의 길을 따라야 했다. 그러나 어느 길이든 쉽지 않기는 마찬가지였다. 이윤이 추구한 길은 천하를 책임지는 길이었다. 이윤은 원래 노비 출신이었지만 요리사가 되어 임금을 알현한 후 탕임금의 천하 평정을 도운 인물이었다. 혹자는 그가 원래 처사였는데 탕임금의 부름을 다섯 번 거절하고서 신하가 되었다고도 했다. 노비였든 처사였든 일단 출사를 결심한 이윤의 행보는 거칠 것이 없었다. “누구를 섬긴들 임금이 아니며, 누구를 부린들 백성이 아니겠는가! 다스려져도 나아가고 어지러워도 나아간다.” 이것이 그의 출사의 변이었다. 맹자(孟子)는 이런 이윤을 천하의 무게를 스스로 떠맡은 자라고 칭송했다. 안회가 추구한 길은 안분지족(安分知足)하는 길이었다. 공자(孔子)의 애제자 안회는 누추한 마을(陋巷·누항)에서 가난하게 살았다. 그가 가진 것이라곤 한 그릇의 밥과 한 표주박의 물이 전부였지만, 그 즐거움을 무엇과도 바꾸지 않았다. 그래서 안회가 요절하자 공자는 하늘이 자신을 버렸다고 통곡했다. 안회는 안빈낙도(安貧樂道)하는 처사의 전형이었다. 허형의 글을 읽고 충격을 받은 뒤,조식의 선택은 안회가 추구한 삶으로 기울어져 갔다. 남긴 글이 많지 않은 조식이었지만, 안회를 기리는 글 ‘누항기(陋巷記)’를 짓고 삶의 좌표로 삼기도 했다. 그러나 이윤도 원래 처사였고,‘누항기’에 언급된 순임금도 원래는 초야에 묻혀 살던 농부였다. 은둔은 처사가 지향해야 할 목표가 아니라 미래의 출사가 잠시 보류된 상태에 불과했다. 때와 의리에 맞으면 출사해야 하는 것이 은둔한 처사의 숙명이다. 다만 은둔에서 출사로의 전환이 쉽지 않을 뿐이었다. 조식은 나이 서른 무렵 과거를 포기한 후 일곱 번이나 출사를 거부했다. 그에게 내려진 벼슬이 그의 학문과 경륜을 펼칠 만한 자리가 아니었기 때문일까? 이윤은 요리사가 되어 임금과 독대할 기회를 겨우 갖고 포부를 펼쳤는데 능참봉 자리는 그럴 만한 자리가 못 되는가? 물론 지위의 높고 낮음이 문제는 아니었다. 은둔한 자가 출사를 결심하기 위해서는 시기와 명분을 헤아리는 것이 중요하다. 이것은 조식에게도 고민거리였다. 조식의 고민은 동갑내기 유학자 퇴계 이황과 주고받은 편지에서도 읽을 수 있다. 1553년의 일이다.
    조식이 전생서 주부에 제수되었지만 출사하지 않자 이황이 이를 안타까워하는 편지를 보냈다. 그러자 조식은 자신이 눈병으로 사물을 제대로 분간하지 못하니 발운산(撥雲散)을 보내달라는 답장을 보냈다. 발운산은 눈병을 치료하는 안약이지만, 글자 그대로 해석하면 구름을 걷어내 흩어버린다는 뜻이다. 자신이 어리석어 세상을 제대로 분간하지 못하니 이황의 명철함으로 깨우쳐 달라는 요청이다. 출사하려면 명분이 필요하니 해답을 달라는 요청에 이황도 다시 답장을 보냈다. 발운산은 찾아보겠지만 자신도 당귀(當歸)를 찾고 있는데 아직도 구하지 못했노라고 당귀는 약초 이름이지만 마땅히 돌아가야 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황도 돌아갈 길을 찾고 있었던 것이다. 결국 조식은 출사에 필요한 명분을 평생 찾지 못했다. 조식은 ‘엄광론(嚴光論)’에서 후한의 광무제를 피해 숨어 살았던 엄광에 대해 논평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용 잡는 기술자는 희생(犧牲) 잡는 부엌에 들어가지 않고,왕도(王道)를 보좌할 자는 패도(覇道)에 발을 들이지 않는다.” 처사의 상책은 기량을 맘껏 펼칠 수 있는 세상이 올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다. 하물며 설익은 기량을 펼치려다 세상을 더 어지럽힐 수야 있겠는가! 처사는 은둔한 뜻이 깊고 멀수록 스스로 채비도 철저히 해야 한다.
    조식은 항상 몸에 방울을 차고 다녔다. 방울에 성성자(惺惺子)라는 이름도 붙였다. 성성이란 혼미하지 않게 깨우쳐 준다는 뜻이다. 청량한 방울 소리로 혼미한 정신을 깨우치려고 성성자를 차고 다녔던 것이다. 조식은 작은 칼도 차고 다녔는데 공부하다 졸음이 오면 칼을 어루만지며 잠을 깨웠다(‘졸기’에는 칼로 턱을 괴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칼에는 ‘내명자경 외단자의(內明者敬 外斷者義)’라는 여덟 자로 된 좌우명을 새겼다. ‘안으로 마음을 밝히는 것은 경(敬)이요, 밖으로 행동을 결단하는 것은 의(義)’라는 의미다. 처사에게는 자신의 결백을 지키는 것도 중요하지만 세상에 정의를 실현할 결단력도 필요하다는 각오다. 조식은 은둔한 처사로 불렸지만, 칼날처럼 강인한 사람이었다. 처사 조식의 강인한 의지는 몇 수 짓지 않은 시에도 드러났다. 浴川(냇물에 멱 감으며) 全身四十年前累, 온몸에 찌든 사십 년 찌꺼기, 千斛淸淵洗盡休. 천 섬 맑은 물에 싹 씻어버리라. 塵土당能生五內, 티끌이 혹시라도 오장에 남았거든, 直今고腹付歸流. 지금 당장 배 갈라 물에 흘려보내리라. 題德山溪亭柱(덕산 시냇가 정가 기둥에 쓰다) 請看千石鐘, 천 섬들이 종을 보게나, 非大구無聲. 크게 치지 않으면 소리 나지 않는다네. 爭似頭流山, 어찌하면 두류산처럼, 天鳴猶不鳴. 하늘이 울려도 울지 않을 수 있을까? 조식은 내면의 경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내장에 남았을 한 점 티끌도 용서하지 않았다. 외면의 의를 실천하기 위해서라면 천 섬들이 종만큼 큰 포부를 품었어도 크게 쓰일 만한 때가 아니면 함부로 나서지 않았다. 이것이 바로 은둔한 처사 조식이 지키려 했던 것이다.(
           최연식 연세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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