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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붕당 조정론자 - 이이

浮萍草 2016. 2. 18. 10:10
    兩是兩非論으로 붕당 화합 꾀했던 율곡, 당쟁의 표적이 되다
    일러스트 = 전승훈 기자 jeon@munhwa.com
    종 31년(1536) 12월 26일 한 천재 소년이 강릉 북평촌에서 태어났다. 그해도 올해와 마찬가지로 간지(干支)로는 병신년(丙申年)이었다. 어머니 사임당 신 씨는 아이를 낳기 전날 검은 용이 침실로 날아드는 꿈을 꿨고,그래서 아이 이름을 현룡(見龍)으로 지었다. 용의 기운을 받고 태어난 아이는 말을 배우자마자 곧바로 글을 읽었다. 3세 때는 석류가 어떻게 생겼느냐는 외할머니의 질문에“석류 껍질 속엔 부서진 붉은 구슬이 있네(石榴皮裏碎紅珠)”라는 고시(古詩) 한 구절을 기억해내 주위 사람 들을 놀라게 했다. 7세 때는 권세는 높았지만 소인배였던 진복창(陳復昌)의 평전을 지었는데, 결국 그는 을사사화의 주동자가 되었다. 이 천재 소년이 글에만 능했던 것은 아니다. 9세 때는 ‘이륜행실록(二倫行實錄)’에서 당나라 사람 장공예(張公藝)의 9세동거(九世同居) 대목을 읽고 형제가 부모를 받들고 함께 사는 그림을 손수 그려두고 감상 하기도 했다. 장공예는 당나라 고종이 아홉 세대가 한집에 살 수 있는 비결을 묻자 참을 인(忍) 자 백 개를 써서 바친 고사로 유명한 인물이다. 장공예를 흠모한 소년은 아버지의 병환이 위독하자 자신의 팔뚝을 찔러 피를 내어 드리고 사당에 들어가 자신을 대신 데려가 달라고 간절히 기도했다. 일설에는 이때 기적적으로 살아난 아버지가 꿈속에서 신선을 만나 아이가 장차 위대한 유학자가 되리라는 예언을 듣고 아이의 이름을 이(珥)로 고쳤다고 전해진다. 효심 깊은 이 천재 소년에게 닥친 인생의 첫 번째 고비는 그가 16세 때 겪게 된 어머니 사임당 신 씨의 죽음이었다. 그는 어머니의 상례와 제례를 주자가례(朱子家禮)에 따라 치르고 3년 동안 여묘(廬墓)살이를 했지만 슬픔을 이기지 못해 밤낮으로 울부짖었다. 결국 19세 때 입산을 결심하고 금강산에 들어가 불경을 익혔다. 그가 금강산에 머무를 때 승려들 사이에선 생불(生佛)이 나타났다는 소문이 나돌기도 했다. 그러나 입산 1년 만에 불교가 이단임을 깨닫고 강릉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11개 조목으로 된 자경문(自警文·스스로 경계하는 글)을 짓고 일생 성현의 가르침을 실천해 나가기로 결심했다. 소년 이이는 13세 때 진사 초시에 합격한 이후 더 이상 과거에 매달리지 않다가, 21세 때 다시 한성시에서 장원으로 뽑혔다. 29세 때는 7월과 8월에 열린 아홉 번의 과거에서 모두 장원을 차지해 ‘아홉 번 장원한 분(九度壯元公)’이란 별호를 얻으며 그의 천재성을 세상에 다시 알렸다. 그리고 이해에 호조 좌랑에 임명돼 관계에 발을 들이기 시작해서, 예조 좌랑,사간원 정언,이조 좌랑,홍문관 교리 등을 거쳐 36세 때 이조 정랑에 제수되었다. 선조 4년(1571)의 일이었다. 다만 그때 이이가 정랑 직을 실제로 맡지는 않았다. 이이에게 제수되었던 이조 정랑(정5품)과 좌랑(정6품)은 비교적 낮은 관직이었다. 그러나 통칭하여 전랑(銓郞)이라 불리듯이 관원을 천거하고 전형(銓衡)하는 데 실질적인 권한을 행사할 수 있는 직책이었다. 게다가 전랑은 전랑법(銓郞 法)에 따라 전임자가 후임자를 직접 추천할 수 있었기 때문에 특정 세력이 자파의 권력 기반을 안정적으로 유지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차지해야 할 요직이었다. 이조 전랑 임명을 둘러싼 갈등은 이이가 정랑 직 수행을 고사한 다음 해인 선조 5년(1572)에 시작되었다. 당시 전랑이었던 오건(吳健)이 자신의 후임으로 김효원(金孝元)을 추천하자 심의겸(沈義謙)이 이를 반대하고 나섰다. 오건과 김효원은 모두 조식(曺植)의 문인이었고 심의겸은 이이와 가깝게 지내는 사이였다. 거꾸로 선조 8년(1575)에는 전랑이 된 김효원이 심의겸의 아우 심충겸(沈忠謙)의 전랑 직 임명에 반대하면서 두 세력 사이에 갈등의 골이 깊어지게 되었다. 당시 김효원은 한양 동쪽 건천동(乾川洞)에 살았기 때문에 김효원 일파를 동인(東人)이라 불렀고 심의겸은 서쪽 정릉방(貞陵坊)에 살았기 때문에 그 일파를 서인(西人) 이라 불렀다. 동인은 주로 이황(李滉)과 조식의 문인들로 구성되어 있었고 서인은 주로 이이와 성혼(成渾)의 문인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동인과 서인의 구분이 단순히 사림세력 내부의 후배와 선배 또는 사는 곳의 구분이 아니라 학파에 따른 학문적 지향의 차이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었던 것이다. 전랑 직을 둘러싼 사림세력 내부의 분열과 갈등을 처음 비판한 사람은 영의정 이준경(李浚慶)이었다. 그는 죽기 직전인 선조 5년에 붕당(朋黨)의 조짐이 보인다는 상소를 임금에게 올렸다. 이준경이 비난의 표적으로 삼은 대상은 심의겸 일파였다. 그러자 이이는 곧바로 이준경의 주장을 반박하는 상소를 올렸다. 상소의 핵심은 붕당의 결성 그 자체가 비난받을 일이 아니라, 그 당이 공익을 지향하는 당인지 사익을 앞세운 당인지를 잘 분간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준경이 붕당을 결성해 사론(私論)을 앞세웠다고 비판한 자들은 오히려 임금 사랑과 나라 걱정을 공론(公論)으로 모아 가려고 노력하는 자들이기 때문에 이들을 배척할 것이 아니라 이들의 사기(士氣)를 진작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준경의 상소가 붕당의 결성 자체를 비판하는 데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다면 이이의 상소는 붕당의 공론 형성 기능을 긍정하는 데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다. 선조 8년에 심의겸과 김효원의 대립이 격화되자 이이는 우의정 노수신(盧守愼)과 상의해 두 사람을 모두 외직으로 보내자고 제안했고 선조는 두 사람을 각각 황해도 개성(開城) 유수와 함경도 부령(富寧) 부사로 임명했다. 두 사람 모두에게 잘잘못이 있다는 이이의 양시양비론(兩是兩非論)에 근거한 결정이었다. 그러나 양시양비론은 양쪽의 비판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다. 우선 김효원을 지지하는 후배 사림들의 입장에서는 김효원의 부임지가 심의겸의 부임지보다 훨씬 멀고 험준한 지역이었기 때문에 그 결정이 달가울 리 없었다. 한편 이이와 절친했던 성혼도 이이가 시비를 정확히 가리지 않아 화를 키웠다고 평가했다. 양쪽의 논의를 조정하려 했던 본의와는 달리, 결국 이이는 서인의 영수로 지목되면서 정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리고 말았다. 본인이 정쟁의 표적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이이는 양시양비론에 입각한 붕당 간의 화합,즉 조제(調劑)가 가능하다는 신념을 버리지 않았다. 이이는 이 신념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먼저 군자의 당과 소인의 당을 구분하는 붕당에 대한 전통적 인식을 바꿀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군자와 소인의 구분을 고집한다면, 자신의 당을 군자의 당으로 간주하고 상대 당을 소인의 당으로 간주하는 극단적 대결의식에서 벗어날 수 없다고 판단했다. 이 점에 대해 이이는 선조 12년(1579) 5월에 올린 상소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른바 조제한다는 것은 양쪽이 모두 사류(士類)이기 때문에 서로 화합시킬 수 있다는 것입니다. 만일 한쪽은 군자고 다른 한쪽은 소인이라면,물과 불이 한 그릇에 있을 수 없고 향기로운 풀과 냄새나는 풀이 한 뿌리에서 날 수 없는 것과 같이 서로 용납할 수 없는 것입니다.” 군자당과 소인당의 주관적 구별은 종국에는 국론 분열을 초래하기 마련이다. 그래서 이이는 상소의 말미에 ‘과격하여 갈라짐(激而分)’이 ‘패하여 없어짐(敗而盡)’ 으로 변해 나라가 망할 지경에 이를까 염려된다고 첨언했다. 그러나 건강한 나라를 운영하기 위해서는 공론을 만들어낼 수 있는 공당(公黨)의 존재가 필수적이다. 이이가 선조 16년(1583) 4월에 올린 상소에서 붕당을 미워하여 제거하려 하면 결국 나라를 망치는 데 이르게 될 것이라고 경고한 이유도 여기에 있었다. 이이가 군자당과 소인당의 구별에 집착하지 않고 공당의 건설적 기능에 주목했던 것은 그의 성리학에 대한 독창적 이해와 무관하지 않다. 흔히 성리학에서는 모든 존재의 근원과 현상을 이(理)와 기(氣)의 관계로 설명한다. 이의 독립성과 운동성을 강조하는 것이 주리론(主理論)이다. 이황의 “이가 발동하면 기가 거기에 따르고 기가 발동하면 이가 그것에 올라탄다(理發而氣隨之 氣發而理乘之)”는 입장이 여기에 속한다. 반면에 기의 운동성만을 인정하는 입장이 주기론(主氣論)이다. 이이는 이발(理發)과 기발(氣發)을 모두 인정한 이황의 입장(互發說)을 비판하고 기발(氣發)만을 인정했다(氣發理乘一途說). 주리론의 입장은 이와 기의 분리와 독립을 강조하지만 이이는 이와 기는 하나이면서 둘이고(一而二) 둘이면서 하나(二而一)라고 주장했다. 이이의 이런 인식 틀을 붕당론에 적용하면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이이라면 사림의 당은 색깔이 다른 두 개 이상의 당들로 나뉘어 있지만 결국 그 당들은 경쟁을 통해 공론을 형성해 가는 공당이 되어야 한다고 풀이할 듯하다. 이이는 죽기 전날 문병 온 정철(鄭澈)에게 인재 등용에 당색을 가리지 말라고 당부할 정도로 붕당 조제의 신념을 평생 지키고자 했다. 그러나 서인 중에도 쓸 만한 사람만 거두어 등용하고 동인 중에는 편벽되고 간사한 사람만 억눌러 등용하지 말자고 했던 그의 방식이 모두에게 중립적인 대안으로 여겨졌던 것은 아니다. 이이가 제시한 대안도 하나의 당론임에 분명했고 적어도 동인의 입장에서는 서인에게 유리한 것으로 비쳤다. 그 결과 이이 사후 그의 문묘 배향도 숙종이 주도한 환국정치의 소용돌이 속에서 집권 당파에 따라 종향(從享)-출향(黜享)-복향(復享)을 반복하며 정쟁의 표적이 되는 운명을 겪을 수밖에 없었다. 자기 당의 분명한 색깔과 신념을 지키면서도 여러 당론을 보합(保合)하고 조제하여 국시(國是)로 모아가는 것은 과연 불가능한 일일까? 여기에서 우리는 상식에서 출발한 이이의 국시론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국시란 온 나라 사람들이 서로 의논하지 않고도 모두 옳다고 여기는 것이다. 이익으로 유혹하는 것도 아니며, 권위로 위협하지 않아도 삼척동자도 옳은 줄 아는 것이 국시이다.
          최연식 정치외교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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