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W T = ♣/역사 이야기

6 ‘文行不一致’ 김종직

浮萍草 2015. 10. 22. 17:00
    ‘조의제문’ 짓고도 세조 때 出仕… 글재주만 있고 지조는 없었다
    “질(質)이 문(文)을 이기면 거칠고 문이 질을 이기면 정성이 부족하다. 문과 질을 고루 갖추어야 군자라 할만 하다.” 재주만 앞세운 영혼 없는 글을 질타한 공자의 말이다. 진정한 지식인이라면 글 속에 송곳 같은 진리를 담아야 한다. 이것을 ‘문이재도(文以載道)’라고 한다. 김종직(金宗直·1431∼1492)의 ‘조의제문(弔義帝文)’도 문이재도의 전형으로 알려져 있다. 세조의 왕위 찬탈에 맞서 지식인의 저항 정신을 드러냈다고 평가되기 때문이다. 게다가 김종직 자신은 그 글로 인해 부관참시(剖棺斬屍)까지 당했다. 그러나 그 내막은 그리 간단치 않다. 그가 27세 때 지은 ‘조의제문’의 첫머리는 다음과 같은 자신의 꿈 이야기로 시작된다. “정축년(丁丑年·세조 3년·1457) 10월 어느 날 나는 밀성(密城)을 출발해 경산(京山)을 거쳐 답계역(踏溪驛)에서 묵었다. 꿈에 칠장복(七章服)을 입은 신인(神人)이 헌걸찬 모습으로 와서 ‘나는 초(楚)나라 회왕(懷王)의 손자 심(心)인데,서초패왕(西楚覇王) 항적(項籍)에게 시해되어 침강(침江)에 던져졌다”고 말하고는 홀연히 사라졌다. 나는 깜짝 놀라 꿈을 깨며 되뇌었다. ‘회왕은 남초(南楚) 사람이고, 나는 동이(東夷) 사람이다. 지리상의 거리는 만여 리도 넘고 세대의 선후 또한 천여 년이나 되는데 꿈자리에서 교감했다. 이 얼마나 상서로운가. 또 역사를 상고해 보면 강에 던졌다는 말은 없는데, 혹시 항우가 사람을 시켜 은밀히 격살하고 그 시체를 물에다 던져버렸던 것인가. 이것은 알 수 없는 일이로다.” 김종직이 남긴 글 중엔 문제의 작품이 또 있었다. 그것은 45세(성종 6년·1475) 때 도연명(陶淵明)의 ‘술주(述酒)’라는 시에 화답하여 지은 ‘화도연명술주(和陶淵明述酒)’라는 시와 그 시에 덧붙인 서문이었다. 서문의 골자는 두 가지다. 첫째는 유유(劉裕)의 제위(帝位) 찬탈을 비판한 도연명의 시에 충분(忠憤)의 뜻이 담겨 있다는 것이다. ‘충분’이란 충의(忠義)에서 비롯된 분한 마음이란 뜻이다. 둘째는 자신의 시도 후세에 난신적자를 경계하는 춘추의 필법으로 인정되길 바란 것이다. 김종직이 살았을 땐 이 글들이 전혀 논란을 일으키지 않았다. 사달은 연산군 4년(1498) 무오사화(戊午史禍)가 일어나며 불거졌다. 사화는 선비들이 화를 입었다는 뜻에서 흔히 사화(士禍)라고 하지만,무오사화의 경우에는 사초(史草)라는 역사 기록을 빌미로 발생한 사건이기에 사화(史禍)라 고도 한다. 무오사화의 발단은 세조의 왕위 찬탈을 비방한 김일손(金馹孫)의 사초였다. 김일손은 세조의 계유정난에 반대했던 황보인 김종서 등을 절개를 지키다 죽은 인물로 평가했고,단종의 시신이 유기된 사실도 기록하며 그 끝에 ‘조의제문’을 덧붙였다. 처음 김일손이 의금부로 압송되었을 때 그는 자신이 실록청 당상관 이극돈(李克墩)의 불미스러운 행실을 사초에 그대로 기록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김일손이 기록한 이극돈의 행실이란 그가 세조 때 불경을 잘 외웠다는 이유만으로 전라도 관찰사에 임명되었으며,정희대비의 상을 당했을 때 관기를 가까이 한 일이었다. 그러나 연산군이 김일손의 사초를 지목했던 것은 이극돈에 관한 기록 때문이 아니었다. 연산군이 처음부터 의도했던 것은 임금에 대한 언관(言官)들의 능상(凌上·아랫사람이 윗사람을 업신여김) 혐의를 찾아내려는 것이었다. 연산군 시대의 언관들은 임금에게 신하의 간언을 받아들이라고 요구할 때, 흔히 자신들의 행위를 ‘충분’에서 우러난 것이라고 정당화했다. 이러한 연산군 시대 언관들의 자유로운 언론 활동은 성종의 정치가 남긴 유산이었다. 13세에 즉위한 성종은 정희왕후나 한명회와 같은 후견세력에 둘러싸여 있었고 성년이 되어서야 대간(臺諫)을 육성해 독자적으로 왕권을 행사할 수 있었다. 반면에 연산군은 왕세자로 책봉된 8세부터 제왕 수업을 받았고 19세에 즉위했기 때문에 대간의 언론활동을 왕권에 대한 도전으로 인식했다. 연산군의 입장에서 언관들의 ‘충분’ 운운은 왕권에 대한 도전을 미화하려는 불온한 수사에 불과했다. 게다가 연산군은 “세조께서 일찍이 김종직을 불초하다 하셨는데, 김종직이 이것을 원망했기 때문에 글을 지어 기롱하고 논평한 것이 이 지경에 이른 것이다”고 언급했다. 연산군은 김종직의 충분 운운을 세조에 대한 사감(私感)에서 비롯된 것으로 간주했던 것이다. 그리고 김종직과 그의 문도들이 불신(不臣)의 마음으로 세조 이래 세 조정을 내리 섬기면서 세조의 성덕을 기롱했고 역사에 거짓 기록을 남겼다며,‘조의제문’으로 불거진 사건에 대한 최종 평가를 내렸다. 그러나 김종직에 대한 연산군의 평가가 사실무근의 완벽한 날조만은 아니었다. 김종직의 석연치 않은 정치적 행보는 아버지 김숙자(金叔滋·1389∼1456)의 불운과도 무관하지 않았다. 김숙자는 한변(韓變)의 딸을 맞아 슬하에 2남 1녀를 두었는데,과거에 급제한 후 부친의 명에 따라 첫 부인 한 씨를 내치고 박홍신(朴弘信)의 딸을 새로 맞아 김종직을 비롯해 3남 2녀를 두었다. 그런데 조강지처를 내친 전력은 김숙자의 출세길을 번번이 가로막았다. 세종 3년(1421)에는 사관(史官)으로 뽑혔지만,출처(出妻) 사실이 예문관에 알려져 임명되지 못했다. 세종 4년엔 성균학록(成均學錄)이 되었지만 이듬해에 사헌부로부터 ‘곤장 80대를 치고 아내를 찾아와 가정을 회복하라’는 명령을 받고 파직까지 당했다. 그의 불운은 만년에도 계속되었다. 51세 때인 세종 21년(1439)에는 성균주부(成均注簿)에 천거되었지만,역시 출처 문제로 파직되고 사표(師表)들의 명부인 사유록(師儒錄)에서 이름이 삭제되는 수모마저 겪었다. 김숙자는 자신의 한이 아들의 출세를 통해 풀릴 수 있기를 열망했다. 그래서 김숙자는 어린 김종직을 끼고 가르치며 책문(策問)의 주제에 맞는 글을 익히도록 권했다. 책문이란 정치에 관한 계책을 물어 답하게 하던 과거 과목이었으니 그 의도를 미루어 짐작하기에 충분하다. 그러나 김종직은 부친이 살아계실 때 과거에 합격하지 못했다. 그가 26세 때인 세조 2년(1456)에 형과 함께 회시(會試)에 응시했지만, 형만 합격하고 자신은 합격하지 못한 채 부친상을 맞았다. 그가 ‘조의제문’을 지은 것은 그 다음 해 일이다. 세조의 조정에 참여하려 했던 그가 오히려 낙방과 부친상이 겹친 실의의 상황에서 세조를 비난하는 글을 쓰고 있었던 것이다. 29세 때 다시 문과에 응시해 급제한 김종직은 34세 때 사헌부 감찰(監察)에 임명되었으나 잡학을 익히라는 세조의 명령에 불복하다 파직당했다. 그러나 김종직은 세조가 승하한 후 세조의 공덕을 극찬하는 ‘세조혜장대왕악장(世祖惠莊大王樂章)’을 지었고,예종 원년(1469)에는 세조가 지은 ‘훈사(訓辭)’를 인쇄해 올리라는 명을 받고 기뻐서 잠을 이루지 못했다고 술회하기도 했다. 또 성종 때는 함양군수를 비롯한 여러 관직을 거쳐 형조판서까지 지냈고 성종의 각별한 총애를 받아 하루 세 차례의 경연에 모두 참석해 진강(進講·임금 앞에 나아가 경서 등을 강론하는 것)했다. 이 점에서 연산군이 김종직을 평하며, 세조 이래 세 조정을 섬겼으면서도 세조의 성덕을 기롱했다는 것은 사실무근만은 아니었다. 김종직의 이율배반에 대한 부정적 평가에는 그의 문도들도 가세했다. 21세 때부터 김종직의 문하에서 ‘소학(小學)’을 배웠던 김굉필(金宏弼)도 그중 한 명이었다. 김굉필은 김종직이 성종 17년(1486)에 이조참판이 되었지만 조정에 아무런 건의도 하지 않았다며 풍자시를 지어 비판했다. 정여창(鄭汝昌)도 성종 3년(1472)에 김굉필과 함께 함양군수로 부임한 김종직을 찾아가 배움을 청하며 사제관계를 맺었다. 그러나 정여창도 김종직과 갈라서고 말았다. 무오사화 때 김일손의 사초에 정여창이 거론돼 공초를 받게 되자,정여창은 김종직과의 사제관계를 부인했다. 당시 정여창은 공초에서 김종직의 함양군수 시절 어머니가 그곳에 살았기 때문에 종종 만나기는 했지만,김종직에게 수업받은 적도 없고 시문집을 읽은 적도 없다고 항변했다. 김굉필과 정여창 모두 김종직의 제자였다는 이유로 무오사화에 연루되어 희생되었지만, 정작 그들 자신은 김종직의 제자란 사실을 부정했다. 후세에 김종직의 이율배반을 가장 신랄하게 비판한 사람은 허균이었다. 허균이 김종직을 비판한 초점은 두 가지였다. 첫째, 김종직이 ‘조의제문’을 짓고도 노모 때문에 마지못해 세조의 조정에서 벼슬한 것처럼 처신한 것은 본래부터 위선이었다는 것이다. 둘째, 그의 학문이란 것도 가학(家學)을 주워 모은 것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김종직은 자신의 부적절한 처신 때문에 시호(諡號)도 개정당하는 수모를 겪었다. 김종직 사후에 처음 내려진 시호는 ‘문충(文忠)’이었다. 도덕이 높고 학문이 넓은 것을 ‘문(文)’이라 하고, 청렴하고 공정한 것을 ‘충(忠)’이라고 한다는 의미에서 내려진 시호였다. 그러나 김종직의 시호에 ‘충’자가 들어가는 것은 합당하지 않다는 여론이 비등했다. 결국 그의 시호는 성종 24년에 ‘문간(文簡)’으로 개정되었다. 문학이 넓고 본 것이 많은 것을 ‘문’이라 하고 간소하게 행동하는 것을 ‘간(簡)’이라고 한다는 의미였다. 이황이 김종직에 대해 학문하는 선비가 아니라 화려한 사장(詞章)을 즐겼던 문장 잘하는 선비에 불과하다고 가혹하게 평가했던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다. 그 후 그의 시호는 숙종 34년(1708)에 다시‘문충’으로 회복되었다. 그러나 광해군 2년(1610)에 김굉필과 정여창이 문묘에 종사될 때 정작 그들의 스승이었던 그는 논의 대상에서 배제되었다. 부적절한 처신을 한 지식인은 국가가 공인한 지식인의 사당에 들어갈 자격이 없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지식인의 글엔 날선 비판정신이 담겨야 하지만 행실과 괴리된 글은 생명력을 지닐 수 없다. 글과 행실이 일치하지 않았던 김종직은 비판적 지식인이 귀감으로 삼아야 할 역설적이지만 모범적인 반면교사였다.
    Munhwa ☜       최연식 연세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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