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MOH/文化財사랑

한국의 근대 음악사를 간직한 배재학당 피아노

浮萍草 2015. 12. 10. 18:41

    ㆍ배재학당 재학당은 한국에 세워진 최초의 근대식 교육기관으로 1885년에 미국 감리교 소속 선교사 헨리 게르하트 아펜젤러(Henry G.Appenzeller, 1858~1902)에 의해 설립되었다. 배재학당이라는 교명은 고종이 직접 지어 내려준 것으로 ‘유용한 인재를 기르고 배우는 집’이라는 의미이며 여기에는 당대 급변하는 국제정세에 능동적으로 대처 하고자 한 고종의 의지가 담겨있다. 이후 배재학당은 통역관을 배출하고 관직에 나아가는 창구로서가 아닌 신분의 빈천을 넘어 모두에게 동등한 교육의 기회를 제공하는 평등교육의 중요한 토대로서 한국의 역사 속에 뿌리를 내리게 되었다. ㆍ배재학당과 한국의 근대기 음악
    배재학당 130년의 시간 동안 수없이 많은 인물들이 배출되었다. 정치,역사,문화,종교 등의 분야에서 배재학당 출신들의 활동은 한국 근대의 형성과 발전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그 중에는 한국 근대 음악사에 주요한 족적을 남긴 인물들도 매우 많은데,대표적인 인물로는 성악가이자 작곡가로 남북 음악계에 중요한 영향을 미친『조선민요 합창곡집』의 저자 안기영(安基永,1900~1980), 오케레코드와 조선악극단 설립자이자 오케음악무용연구소를 만들어 전문적인 예능인을 길러냈던 이철(李哲, 1903~1944) 등을 꼽을 수 있다. 그리고 이들의 이와 같은 활동은 서양음악을 공부한 배재학당 최초의 한국인 음악교사 김인식(金仁湜, 1885~1963)과 그 뒤를 이어 배재학당 음악교사를 역임 하였던 피아니스트 이흥렬(李興烈,1909~1981)과 같은 교사가 있어 가능했다. 이들 주요한 음악인들의 활동과 더불어 배재학당이 한국 근대 음악사에 중요한 위치를 매김 할 수 있었던 데에는 1930~1950년대 우리나라에 주요한 음악회장 이었던 배재강당의 역할을 빼놓을 수 없는데,바로 이 강당에 지금의 배재학당 피아노가 놓여 있었다. 이 배재학당 피아노는 이흥렬 선생의 지도하에 교내 밴드부에서 활동했던 김계원(1942년 졸업)의 증언을 근거로 당시 배재의 교장이었던 헨리 닷지 아펜젤러가 학교 대강당을 신축하면서(1932~1933년경) 직접 미국에서 들여온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특히 배재 출신의 유명 연극배우 김동원(金東園, 1916~2006)이 1933년 배재강당에서 이 피아노의 반주에 맞춰 노래하고 있는 장면을 담은 기록물이 있어, 이 시기에는 확실히 이 피아노가 배재강당에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배재학당 피아노가 놓여 있던 배재강당에서는 당대를 대표하는 많은 음악가들이 연주회를 가졌는데,배재음악교사이자, 1930~1940년대 최고의 피아니스트, 작곡가였던 이흥렬 선생도 귀국기념 행사에서 이 피아노를 연주한 바 있으며,서울대 음대 학장을 지낸 전봉초의 제1회 첼로독주회, 서울대 교수이자 예술원 회원을 지낸 피아니스트 김순열의 첫 독주회,천재적인 작곡가인 김순남의 작품연주회, 연세대 교수를 지낸 황병덕의 제1회 독창회 등도 이곳에서 개최되었다.

    또한 배재 출신으로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피아니스트인 한동일과 백건우는 학창시절 이 피아노를 연주하였고,특히 한동일은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기 직전 배재 강당에서 이 피아노로 도미고별 연주회를 개최하기도 하였다. 이렇게 여러 기록들을 통해 알수 있듯배재강당이 당대 중요한 음악회장으로 자리매김 할 수 있었던 데에는 배재학당 피아노의 존재가 큰 역할을 했음을 알 수 있다. 현재의 세종문화회관 대강당이나 예술의전당이 생기기 전,수준 높은 음악을 향유하는 문화의 공간으로 배재강당이 가지는 위상은 배재학당 피아노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할 수 있다. 배재학당 피아노는 지금은 소리를 내는 악기로서의 수명은 다 했지만,한국 근대 음악사에 있어 주요한 음악가들의 연주와 그 연주를 향유했던 사람들의 기억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는 점에서 역사적 유물로서의 가치는 더욱더 높아지고 있다.


            글. 이순령 배재학당역사박물관 학예연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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