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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박헌영의 두번째 여인 주세죽, 그의 파란만장한 인생

浮萍草 2015. 9. 25. 18:58
    때 박헌영은 운명의 두 번째 여인인 주세죽(朱世竹)을 만났다. 
    박헌영보다 두 살 연상인 그는 함흥(咸興) 출신으로 관북 제일의 명문인 함흥 영생고보(永生高普)를 마치고 상하이 안정씨(晏鼎氏)여학교에서 피아노를 전공했다. 
    이들은 허정숙(許貞淑)의 소개로 알게 된 사이였는데 1925년 2월 19일자 동아일보 1면 하단에 광고로 게재된 화요회 주최의 전조선민중지도자대회 준비 회의 
    명단에 박헌영·허정숙·주세죽이 함께 경성 대표로 등재되어 있고 1926년 제2차 공산당 체포 기록에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이 무렵에 그들은 이미 이념의 동지였던 
    것으로 보인다. 
    주세죽은 3·1운동 당시 함흥에서 만세 시위에 참여하여 1개월간 함흥경찰서에 수감된 바 있다.
    이후 주세죽은 서울에서 조선여성동우회(朝鮮女性同友會) 등을 주도하며 여성운동을 이끄는 한편,고려공산청년동맹 중앙 후보위원으로 활동하는 등 사회주의 
    운동의 핵심에 있었다. 
    일제는 그를 “여성 사회주의자 가운데 가장 맹렬한 자”로 평가하며 요시찰인물(要視察人物)로 감시했다. 
    그는 1924년 5월 서울에서 사회주의 여성단체 여성동우회 집행위원으로 선임되고 이듬해 1월 경성(京城)여자청년동맹 결성을 주도했으며 4월에는 조선공산당에 
    가입하였다. 
    1925년 11월 제1차 조선공산당 검거 사건으로 박헌영이 일경에 붙잡힌 뒤 그 또한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으나 증거 불충분으로 석방되었다.
    박헌영과 주세죽은 결국 사랑에 빠져 결혼했다. 딸(비비안나)도 낳았다. 
    결혼 연도는 1921년이라고 했다가 1924년이라고 했다가 법정에서 한 말이 다르다. 
    호적등본에는 1926년에 신고한 것으로 되어 있다. 
    1926년 6월 주세죽은 일거수일투족을 주시하던 일경에 다시 붙잡혔으나 2개월 만에 풀려났다. 
    1927년 5월 근우회(槿友會) 임시집행부에서 활동하던 주세죽은 병보석으로 출감했다. 
    망명과 도피, 그리고 투옥 생활을 거치면서 그들은 가정을 돌볼 겨를이 없었다. 
    어느 날 오랜만에 박헌영이 아내를 만났을 때 그의 배가 불러 있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자기 아이가 아니었다. 박헌영은 김단야(金丹冶)를 의심했고 주세죽도 그가 아기의 아버지라고 시인했다. 
    이것을 불륜이니 치정이니 따질 일은 아니다. 궁핍한 혁명가의 삶을 살면서 비좁고 불편한 주거 환경 속에서 벌어진 ‘접촉 사고’였을 뿐이다. 
    어쨌든 둘은 이 일로 헤어졌다.
    
    ㆍ두 번째 여인 주세죽의 파란만장한 생애
    주세죽은 소련으로 건너가 ‘한베라’라는 이름으로 살았다. 거기서 그는 1934년 김단야와 재혼하여 아들을 낳았다. 소련에서도 주세죽은 ‘사회적 위험분자’로 낙인찍혀 박해를 받았다. 주세죽은 1938년 일본의 밀정이라는 혐의로 체포되어 모스크바로 주거가 제한되었다가 카자흐스탄으로 추방되어 1946년 형기를 마친 뒤에도 그곳에서 살다가 1950년대 중엽에 죽었다. 한국의 좌파정권 시절인 2007년에 주세죽은 독립유공자 애족장(7등급 가운데 5등급)을 받았다. 좌익이라고 해서 서훈을 받지 말라는 법은 없다. 그러나 그가 독립운동을 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의 공적으로 볼 때 그가 과연 그럴 만한 자격이 있는지에 대해서 우익들은 다른 의견을 피력했다. 그가 박헌영의 아내였다는 후광(?)이 작용했을 것이다. 서울로 돌아온 박헌영은 1924년 4월에 동아일보 기자로 입사하여 그해 7월까지 있다가 8월 조선일보에 기자로 들어가 11월 중순에 퇴사했다. 동아일보를 퇴사한 것은 그가 동맹파업에 동정적이었기 때문이었고 조선일보를 퇴사한 것은 그가“러시아의 힘을 빌려 조선 독립을 쟁취하자”는 글을 쓴 후 사회 주의자를 내쫓으라는 일제의 강압 때문이었다. 1929년에 박헌영은 간도(間島),블라디보스토크를 거쳐 모스크바로 떠난다. 그는 그곳에서 동방노동자공산대학(모스크바공산대학)에 입학하여 2년 동안 수학한 다음 1932년에 다시 상하이로 돌아갔다. 그는 1933년에 상하이에서 체포되어 본국으로 송환되어 6년형을 받고 1939년에 출감했다. 그는 다시 광인 행세를 하면서 경성 콤그룹(Com Group)의 대표자로서 조직의 운영을 위해 암약했다. 박헌영은 이 무렵에 이득균이 경영하는 광주시(光州市) 월산동의 벽돌 공장에서‘김성삼’또는‘김추삼’이란 가명으로 직공 행세를 하다가 광복을 맞이했다. 광복이 되자 박헌영은 휘황한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다. 서울 종로에는“지하에 숨어 있는 박헌영 동무여,어서 나타나서 있는 곳을 알리라. 그리하여 우리의 나갈 길을 지도하라”는 전단이 나붙었다. 9월 8일이 되어 서울 계동에서 개최된 공산당열성자대회에 나타난 박헌영은“조선 인민공화국 만드느라고 동무들 만나기가 늦었다”고 말했다. 그는 조선공산당의 재건에 착수했다. 이때 잊을 만하던 운명의 여인이 다시 찾아왔다. 현앨리스가 군정 요원으로 자원하여 서울에 들어온 것이다. 물론 박헌영과 자주 접촉했다. 군정청은 영어와 한국어가 자유로운 그를 쓰면서도 공산주의자로 의심하고 있었다. 그는 끝내 한국에서 추방되었다.
    Premium Chosun        신복룡 전 건국대 정치외교학과 석좌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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