萍 - 저장소 ㅁ ~ ㅇ/인물로 본 해방정국의 풍경

1 가난한 수재 박헌영, 불우한 어린시절이 그를 공산주의자로 이끌다

浮萍草 2015. 9. 25. 18:23
    박헌영의 비극적 삶 뒤에 두 여인과의 엇갈린 사랑이
    “슬픔도 분노도 없는 사람은 조국을 사랑하지 않는다.” - 네크라소프(Nikolai Nekrasov)
    박헌영(오른쪽)과 부인 주세죽. 이들은 딸을 낳았다. /주간조선
    2000년 7월 그해 여름은 유난히도 더웠다. 나는 집필 중이던 ‘한국분단사연구:1943~1953’의 마지막 보완 작업을 하다가 문득 충남 예산군(禮山郡) 신양면 (新陽面)으로 답사를 떠났다. 그곳은 박헌영(朴憲永)의 고향이다. 뭔가 부족한 듯한 원고의 마지막 작업에 대한 영감을 얻고 싶어서 갔다. 머리에는 역사학자 토인비(Arnold Toynbee)의 충고가 맴돌고 있었다. 그의 말에 따르면, “나의 역사학은 현장에서 보고 느낀 것이 책을 통해 얻은 것보다 더 많다. 그리스 역사의 기술은 더욱 그러했다. 역사학자는 현장을 가보아야 한다. 그곳에서 그는 책에서 알지 못한 영감을 얻을 것이다.” 이 충고는 나의 역사 연구의 중요한 등대였다. 그래서 나는 ‘전봉준 평전’을 쓰면서도 그가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살았던 곳을 ‘모두’ 밟아 보았다. 그리고 그 답사는 나에게 많은 영감을 주었다. 폭염 속의 신양면 옛 장터는 고즈넉했다. 동네 이름처럼 햇살이 맑았다. 나는 먼저 신양면사무소에 들러 박헌영의 제적등본을 신청했다. 개인 정보 보호가 없던 시절이라 면서기는 쉽게 그것을 보여 주었다. 나는 박헌영의 제적등본을 받아들고 망연자실했다. 어머니 이학규(李學圭)의 직업은'주막업(酒幕業)’이라고 적혀 있고 그와 호주인 남편 박현주(朴鉉柱)와의 관계는 ‘첩(妾)’으로 되어 있고 박헌영과 아버지인 호주와의 관계는 ‘서자(庶子)’로 되어 있었다. 나는 이렇게 가혹한 호적등본을 일찍이 본 적이 없다. 1922년에 조선호적령이 실시되었으니까 박헌영이 22살 때부터는 이 등본을 들고 다녔을 터인데 그때 그 감수성 많은 청년 수재의 심정은 어떠했을까를 생각하니 이념의 여부를 떠나 나는 연민과 분노를 주체할 수 없었다.
    박헌영의 제적등본.어머니 이학규의 직업은‘주막업’이라 적혀 있고
    이씨와 이씨의 남편 박현주와의 관계는‘첩’으로 아들 박헌영은‘서자’로
    적혀 있다. /주간조선
    면사무소를 나와 후손을 찾으니 삼종손 박대희(朴大熙)씨를 소개해주는 사람이 있었다. 77세인 그는 처연한 심정으로 박헌영의 소년 시절을 들려주면서 첫 아내 주세죽 (朱世竹)과의 행복했던 시절 사진을 보여 주었다. 박헌영은 1900년에 충남 예산군 광시면(光時面) 서초정리(瑞草井里)에서 아버지 영해(寧海) 박씨 현주(1867~1934)와 어머니 신평(新平) 이씨 학규(1867~?) 사이에 출생했다. 제적등본에 따르면,박현주에게는 이미 맏아들 지영(芝永·1891년생)이 있었고 박헌영 뒤로 두 딸(1905년생·1912년생)이 있었다. 이미 맏아들이 있었던 점으로 보아 자식을 얻기 위해 소실을 맞이한 것 같지는 않다. 아버지는 쌀가게를 경영하면서 약간의 농지를 소유한 중상의 재산가였던 것으로 보아 궁핍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박헌영은 훗날 자신이“봉건 양반 가정에서 출생했다”고 말한 바 있지만 이는 아마 열등감의 표현이었으리라고 생각된다. 신의주(新義州) 지방법원 검사국이 작성한‘박헌영의 피의자 신문 조서’(1925년 12월 12일)에는“나에게는 부모님,형님 내외분,그리고 나와 아내,이렇게 여섯 가족이 있고 재산은 나에게 없으나 아버님께 약 1만원의 재산(동산·부동산)이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ㆍ가난한 수재의 응어리진 삶
    박헌영은 소년 시절에 비만하고 키가 작았다. 그는 1910년에 서당을 다녔고 1912년에 예산군 대흥면의 대흥(大興)공립보통학교에 입학했으며 1915년에 경성제일고등보통학교(경기고등학교의 전신)에 합격했다. 재학 중에는 남들과 어울리지 않고 혼자서 책을 읽는 것이 취미였다. 어머니와 아버지가 이혼하기 전이었으니 학비는 아버지가 보내주었을 것이다. 1974년에 다시 편책한 박헌영의 호적등본에 따르면 무슨 연유였던지 1932년에 어머니 이학규는 박현주와 이혼했으며 1934년에 박헌영은 아버지의 사망과 함께 호주를 상속 했다. 1932년이면 박헌영이 이미 장성하여 결혼을 하고 공산주의자로 활약하던 시기였다는 점으로 본다면 아마도 첩실(妾室)의 서출(庶出)로 기록되기보다는 일가 창립을 하는 것이 더 떳떳하다는 판단에 의해서 이혼했을 수도 있다. 어머니가 이혼하기 전에 작성된 호적에 직업이 주막업으로 된 것을 보면 이미 이혼 전에 남편으로부터 버림을 받고 주막을 경영한 것으로 보인다. 이 불우한 소년은 신양장터에서 주막집을 경영하면서 주정뱅이 사내들에게 시달리는 어머니의 모습을 보며 술심부름을 하는 동안 가진 자에 대한 분노와 적의(敵意)를 많이 느꼈을 것이다. 뒷날 박헌영이 인민 전선에 몰두하게 된 계기는 그가 누구보다도 계급적 적의가 강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아무리 민족의 해방이나 통일이 중요하다고 할지라도 지주를 용서할 수 없었는데 그 이면에는 강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Oedipus complex)가 작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일제강점기의 토지 모순에서 해방 정국에 대한 해법(解法)의 교훈을 얻으려 했다.
    Premium Chosun        전 건국대 정치외교학과 석좌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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