萍 - 저장소 ㅁ ~ ㅇ/인물로 본 해방정국의 풍경

2 박헌영이 공산주의 활동 중 만난 현앨리스

浮萍草 2015. 9. 25. 18:43
    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그는 이에 참가했으며 휴교로 인해 개별적으로 경성고등보통학교의 졸업장을 받았다. 
    그는 YMCA 영어반과 승동교회 성경반에서 영어 공부를 하며 미국 유학을 준비 중 학자금을 마련해주겠다던 윤돈구(尹暾求)가 맹장염으로 세상을 떠나자 유학의 
    꿈도 사라졌다. 
    그것도 운명이었다. 
    역사에서의 가정이란 덧없는 것이기는 하지만 윤돈구가 죽지 않고 박헌영이 미국 유학을 가 이승만(李承晩)에 못지않은 명문대학에서 학위를 받고 귀국했더라면 
    그의 운명과 한국 현대사는 어떻게 바뀌었을까? 
    교육 환경이라는 점에서 본다면 박헌영은 수재로서 일찍부터 정규적인 영재 교육을 받았으며 그의 학문적 열정의 배후에는 학업을 통한 신분 상승의 욕구가 강렬
    했다.
    실의에 빠진 박헌영은 1920년 가을,일본으로 밀항하여 도쿄(東京)와 요코하마(橫濱)를 거쳐 상하이(上海)로 건너갔다. 
    거기에서 그는 상과대학에 입학할 준비로 지나(支那)기독청년회 영어과에 들어가 약 6개월간 공부했는데 이때 처음으로 공산주의에 입문했다. 
    그는 1921년 4월 상하이상과대학에 들어가 1922년 6월까지 다녔다. 
    박헌영은 영어·일어·러시아어·에스페란토어 등 4개 언어에 능통했다. 
    그는 교회를 다녔음에도 불구하고“기독교는 평민 계급의 반역자로서 귀족의 노예이며… 제후와 영토를 옹호하고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자본가 계급의 이익을 변호
    하는 도구”라고 생각했다.
    
    ㆍ 현앨리스와의 사랑과 헤어짐
    박헌영을 연모했던 현앨리스.박헌영과 함께 북한에서 간첩죄로
    처형됐다. /주간조선
    박헌영은 1920년 11월~1922년 4월 상하이에 머물렀다. 그 기간에 운명적으로 한 여인을 만났다. 노동당 강원도당 부위원장이었던 강상호(姜尙昊)의 증언에 따르면 그는 상하이에서 고려공산 청년동맹(共靑)을 조직하여 책임비서로 있을 당시 그곳에 망명해 있던 평남 출신 현순(玄楯) 목사 집에서 하숙을 한 적이 있었다. 현순은 이르쿠츠크파 공산당 계열이었다. 현 목사에게는 훗날 미국대사관 일등서기관(CIA의 한국 책임자) 노블(Harold J. Noble)의 부하인 현(玄)피터(대위)라는 아들과 현앨리스(玄Alice)라는 딸이 있었는데 그 여인이 박헌영을 연모 (戀慕)했다. 그는 박헌영보다 세 살 아래였으니까 17~18세 전후였을 것이다. 현앨리스의 평전을 쓴 정병준 교수(이화여대)의 기록에 따르면 그들이 사랑하는 사이는 아니었고 “애틋한 감정을 느끼는 정도”였다고 하며 전 남로당원으로 일본으로 망명하여 박헌영의 전기를 쓴 박갑동은 그들이 사랑하는 사이였다고 증언했다. 현앨리스는 1922년 상하이에서 다른 남자와 결혼했으나 곧 이혼하고 부모를 따라 미국으로 이주 했다. 그는 이화여대를 잠시 다녔다고 한다. 그들이 사랑했든 사랑하지 않았든 꿈 많은 청소년기의 감정은 그들의 생애에 깊은 추억으로 남았으리라는 것은 그들의 그 후 행적으로 미루어 알 수 있다. 이 무렵은 러시아혁명이 성공하여 정착하는 단계였다. 레닌(V. I. Lenin)은 러시아혁명의 축제 분위기를 보여주고 싶었기에 ‘극동피압박민족대회’ (1922년 1월 21일~2월 2일)라는 이름으로 극동의 공산주의자를 모스크바에 초치했다. 일행인 조선공산당 대표 가운데에는 현순 목사도 들어 있었다. 이때 박헌영도 좌익 지도자들과 함께 회의에 참석하여 레닌을 만났다. 다른 지도자들이 다 그랬듯이 그도 러시아혁명의 열기와 레닌의 지도력에 깊은 감화를 받은 듯 하다. 귀국 후에는 주로 화요회(火曜會·마르크스의 생일이 화요일이었기 때문에 이를 기념하여 지은 이름)에 가입하여 활약했다. 모스크바에서 상하이로 돌아온 박헌영은 러시아 정부의 후원 밑에 조직된 고려공산당 당원인 김만겸(金萬謙)으로부터 100원의 여비를 받아 조선에 공산주의를 선전할 사명을 띠고 귀국길에 올랐다. 상하이에서 안동(安東)으로 돌아온 그는 조선으로 잠입을 기도하던 중에 경찰에 체포되어 신의주 지방법원에서‘대정(大正 8년1919) 제령 제7호’위반으로 징역 1년6월의 형을 받았다. 그는 1924년 1월 18일에 출옥하여 서울로 돌아왔다.
    박헌영은 1925년 4월 18일 조선공산당을 창당하여 이끌어가던 중에 1925년 11월 신의주에서 술김에 친일 변호사 박유정(朴有楨)과 그 일행인 경관을 폭행한 사건 으로 조사를 받았다. 이때 가택수색으로 조직이 폭로되어 체포되었으나 광인(狂人) 행세를 하여 병보석으로 석방되었다. 미친 사람 행세가 어찌나 천연스러웠던지 수사관들도 속았다.
    Premium Chosun        신복룡 전 건국대 정치외교학과 석좌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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